눈먼 돈

2000년대 닷컴 거품이 꺼졌지만, 시장에 풀린 유동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거대 자본은 다시 IT 산업을 첫 번째 사냥감으로 지목했다.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들이 석유회사들이었지만 순식간에 IT 기업들로 교체됐다. 현존 모델이든 새로운 아이디어든, 설명회만 그럴듯하면 요청한 자금의 몇 배 규모 자금이 투자되는 일이 잦았다. 아무것도 없는 팀이 수천만 달러를 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실패의 교훈은 ‘조심하자’가 아니라 ‘이번엔 더 크게 가자’로 해석됐다.

IT 업계에서 가능성을 찾은 자본은 세상 모든 산업에 IT의 렌즈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업에 IT라는 ‘혁신’을 입히고 공유경제, 구독모델로 뒤바꾸기 시작했고 추가 가치가 창출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실 사모펀드들이 하던 구조조정/차입/해체 일을 더 크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승차공유, 숙박공유는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도시를 재편한다”는 이야기로 포장됐고, 경쟁이 붙자 손익은 무시된 채 보조금 전쟁이 벌어졌다. 중국에선 그 강도가 훨씬 셌다. Didi를 중심으로 한 공유 택시, Meituan, Ele.me 같은 음식 배달, 자전거 공유까지 필요 이상으로 큰 돈이 한꺼번에 몰렸다. 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모두 피를 보는 구조였다. 시장은 커졌지만, 남은 것은 출혈과 구조조정이었다.

규제 철폐, 무분별 투자로 야기된 경제위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양적 완화는 다시 이 자본의 규모를 매번 더 키웠다. 문제는 큰 자본이 마련됐다고 좋은 투자처가 갑자기 생겨나지는 않으니, 아마존과 쿠팡이 했던 것처럼 수익구조가 없는 사업에 거대 자본을 투자해 규모부터 형성한 뒤 수익모델을 찾는 엉뚱한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거였다. 투자 회사들끼리 경쟁이 붙어 절대 수익이 날 수 없는 작은 규모 시장에 그 몇 배 되는 돈이 투자 되곤 했다.

정책이 기름을 부은 사례도 있다. 각국의 보조금과 목표치에 힘입어 중국 태양광 산업에도 한때 과잉 투자가 발생했다. 설비는 늘었고 패널 가격은 폭락했다. 기술은 남았지만 수많은 기업이 사라졌다. ‘옳은 방향’이라는 확신이 자본을 과속하게 만든 전형적 사례다.

비슷한 경로를 밟은 업종은 더 있다. SPAC 열풍으로 실체가 빈약한 기업들이 상장했고, 전기차와 배터리는 미래 서사 하나로 밸류에이션이 먼저 달렸다. 암호화폐와 채굴 산업은 에너지, 부동산까지 끌어들였고, 게임, 메타버스, NFT도 같은 자본의 파동 위에 올랐다. 어떤 곳은 일시적 성공을, 어떤 곳은 급락을 겪었다. 공통점은 “돈이 먼저, 검증은 나중”이었다는 점이다.

손정의의 비전펀드 등으로 대표되는 이 눈먼 묻지마 자본은 한 업종에서 빠져나와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다음 업종,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원자재로 이동했다. 지금은 AI 업계에 집중된 상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의 이동이 거품을 만들고, 그 잔열이 생활 물가로 전이됐다. 오늘날의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통화 문제만이 아니라, 지난 20여 년간 ‘판을 키우며 이동한 자본’이 남긴 흔적이기도 하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