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한국

얼마 전까지 난 한국에게 한반도 근해 방어 이상의 해군력은 필요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게 된 이상 한국 해군이 가야할 방향은 대양해군으로 고정 됐다고 본다. 쉽지 않지만 그 과실도 크다. 한국에게 있어서 대양해군이란 말라카 해협, 인도양, 페르시아만, 아프리카 동해안 등에서 군사작전과 철수작전, 해상보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해군을 말한다. 타국 지원 없이도 지구 반대편에 가서 지속적으로 버틸 수 있는 해군이다. 한국이 모든 해역에서 우세를 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분쟁이 예상되는 시기와 장소에서 ‘제한적 우세’를 확보할 수 있으면 된다.

한국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해상 무역을 통한 수출과 수입에 의존한다. 한국식 대양해군의 첫번째 목표는 결국 무역 생명선 보호다. 특히 정유, LNG, 철광석, 곡물 등 핵심 자원은 결국 우리 힘으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북한, 중국, 일본의 군사적 변수뿐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남아시아의 불안정성, 미국 정치 변화에도 경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또 중요한 건, 분쟁 지역에서의 자력 철수 능력이다. 한국 기업들이 아직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못한 지역일수록 잠재 수익이 큰 경우가 많지만, 동시에 정세 불안이 심하다. 정부가 자력 철수 능력을 갖추면, 한국 기업들은 훨씬 과감한 해외 투자를 할 수 있고, 항만, 정유, 발전소, 원전, 조선, 중공업 패키지 딜까지 총체적인 국가 세일즈가 가능해진다. 한국은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소말리아 해적, WMD 확산, 해상테러 등 비전통적 위협을 직접 체감했다. 앞으로는 더 확실한 원해 전력이 필요하다. 특히 자원광산 운영권, 정유 협상, 항만 및 발전소 수주, 원전과 중공업 진출에서 대양해군을 가진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는 협상 경쟁력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오지 어디든 가서 개발도 해주고 안보도 해결해주는 솔루션 제공이 가능하다.

심해 에너지, 광물 채굴도 비슷하다. 육상의 코발트, 니켈, 망간단괴는 중국이 통제하는 희토류 대체 자원이다. 심해에는 바닥 표면에 이게 깔려있다. 누군가가 기술을 개발해 긁어모으는 사업을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해양풍력, 조력발전 같은 차세대 에너지 프로젝트도 빠르게 발전한다. 이 모든 분야에서 국방력은 가용성 + 신뢰도 + 투자 리스크 감소라는 결정적 요인이다.

대양해군을 가진 국가는 쉽게 정복할 수 없다. 영토 일부를 점령해도, 바다 위에서 남아 있는 지휘, 정찰, 타격, 보급 능력 때문에 전쟁 지속력이 유지된다. 쉽게 제압하기 힘든 별도의 화력과 지휘체계가 세계를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북한, 중국, 일본이 한국과의 군사분쟁을 고려할 때 자신들의 무역과 보급로 차단이 가능한 한국과 가능하지 않은 한국은 그 위압감에서 차이가 난다.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은 중국과 미국이 과점하는 바다 상의 경쟁 사이에 다양한 나라들이 숨쉴 틈을 한국이 만들어 줄 수 있다. 둘 사이에 긴장이 과도하게 쌓이는 걸 막아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책이 확 바뀌며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미국의 배신에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대양해군을 만드는 과정에서 건조하는 잠수함, 구축함 등은 대한민국 조선산업과 방산산업에 직접적인 투자를 의미한다. 건조 능력, R&D 능력, 수출 경쟁력, 모두 올라간다. 대한민국 대양해군의 활동은 한국 조선 산업의 시연 기회가 되고 세일즈의 장이 된다.

한국식 대양함대의 실제 구성은 항공모함을 비롯한 미국식 편대가 될 필요도 없다. 우크라이나 전에서 볼 수 있듯 재래식 전력 상당수가 무인 드론 등 저렴한 대량 무기에 무너지는 시대다. 드론의 공격력은 엄청난데 방어할 방법은 마땅하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의 대양함대는 비용이 싸고 인명 피해가 적은 무인 공격 수단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핵추진 잠수함의 높은 방어력과 합치면 시너지가 커질 수 있다. 한국의 해군으로 북한, 일본은 물론 열 배 이상 비용을 들여 만든 미국, 중국 등의 해군력도 제한적으로 억지하는 게 가능할 수 있다.

한국이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롤모델들도 많다. 베네치아 공화국,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덴마크, 초기 영국이 있다. 모두 1. 작은 본토에도 불구하고, 2. 무역+외교+조선+기술+해군력 조합으로, 3. 핵심 시점 핵심 장소에서 제한적 우세를 얻는 전략으로 세계를 누볐다. 지금 그 전략을 재현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게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