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에서 1994년 학살 직후 12만 명의 후투 부족 가해자들이 억류돼 있었다. 계속 수용할 방법도 없었고…

르완다에서 1994년 학살 직후 12만 명의 후투 부족 가해자들이 억류돼 있었다. 계속 수용할 방법도 없었고 상황은 기존 사법제도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때 전통적 공동체 재판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것이 가차차(Gacaca)였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모여 범죄를 증언하고 심리하며, 가해자가 사실을 고백하면 형량을 줄여주는 방식이었다. 완벽한 법적 정의는 불가능했으나 억눌린 진실을 드러내고, 다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는 가능했다. 이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며 사람들은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찾아갔다. 진짜로 학살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사과와 용서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런 치유 과정은 사회적 회복뿐 아니라 국가 재건의 기초가 되었다. 학살 직후 폐허로 남은 르완다는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폴 카가메 정권은 강력한 통치와 함께 부패를 억제하고 교육·보건·인프라에 집중 투자했으며, ICT 스타트업 허브를 지향하면서 키갈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청결하고 안전한 도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성평등 지수 역시 세계 상위권에 올라 여성의 정치·경제 참여가 크게 확대됐다.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의 한계가 지적되지만, 극단적 분열에서 다시 경제·사회적 성취를 이룬 오늘의 르완다는 가차차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TRC)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피의 보복을 막고 사회를 합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해자가 공개적으로 범죄 사실을 고백하면 처벌 대신 사면을 받았고, 피해자는 억울한 역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형벌보다 “진실과 인정”을 우선시한 선택이었다. 이런 방식은 응징과 단죄 중심의 정의와는 달랐다. 대규모 학살이나 체제적 억압을 겪은 사회에서는 수십만 명을 다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처벌만으로는 사회가 합쳐지지 않았다. 가차차나 TRC는 “완벽한 정의보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지향하며, 공동체가 다시 숨 쉴 공간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실제로 르완다와 남아공은 오늘날까지도 불완전하지만 국가 단위의 재건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한국에서도 이런 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권위주의 시절의 국가 폭력, 민주화 운동 탄압 등을 조사했다. 억울하게 죽은 보도연맹원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용산참사 유족 같은 사람들이 뒤늦게나마 진실 규명을 요구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다만 임기가 짧고 정치적 반발도 많아, 피해자 명예 회복과 제도 개혁까지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 사회는 단죄와 응징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만, 르완다와 남아공 사례가 보여주듯 반드시 벌을 주는 것만이 정의의 길은 아니다. 때로는 범죄가 너무 규모가 클 때는 사회 통합과 공동체의 실익을 선택하는 방식이 장기적으로 더 큰 치유와 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