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채집 생활을 마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생산성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먹을 것을 스스로…

수렵채집 생활을 마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생산성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먹을 것을 스스로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힘은 시간과 에너지의 여유를 낳았고, 이 여유는 철학, 과학, 문자, 음악, 종교 같은 문명의 기초들을 가능하게 했다. 문화를 뜻하는 영어 단어 culture가 ‘경작하다’를 뜻하는 cultivate에서 유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명의 성장은 항상 먹을 것의 안정성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번영기를 맞은 것도 에게해 무역과 곡물 확보가 가능해진 덕분이고, 당나라의 전성기 역시 화북과 강남 지역의 이중 수확 체계와 대운하로 대표되는 물류 혁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삼국 말기나 고려 말기처럼 정치 혼란과 전란, 기근이 반복되던 시기에는 학문과 예술이 뿌리내릴 여유 자체가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보릿고개가 일상화되고, 기후 악화와 전란, 인구 폭증이 겹치면서 조선 전기와 같은 창조력은 더 이상 재현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도 국가나 왕조가 안정된 곡물 생산과 식량 자급 속에서 스스로 무너진 사례는 매우 드물다. 고려 말기나 조선 말기, 혹은 프랑스 구체제 말기, 명나라 말기처럼 우리가 ‘○○ 말기’라 부르는 시기는 대부분 내부적으로 이미 먹고 살기 어려워졌을 때다. 기후 악화와 전란, 세금 부담, 수탈, 행정 무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복되는 흉작이 민심을 무너뜨리고 반란과 개혁의 동력이 되었다. 국가 체제가 스스로를 유지할 만큼의 최소한의 생존 기반을 잃었을 때, 권위도 함께 붕괴되는 것이다. 반대로 평화와 식량, 기술과 제도가 조화를 이룰 경우 체제는 안정되고 문명은 꽃핀다. 창조는 배가 부른 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배가 부르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조건이다. 한국사에서도 그런 문명적 여유와 창조성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가 있다. 바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세종의 통치기다. 이 시기는 중세 조선의 황금기이자, 현재 대한민국 영토의 기틀이 확립된 시기다. 북방의 4군 6진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이 조선의 영역으로 정리되었고, 왜구와 여진의 위협도 상당 부분 제어되었다. 무엇보다 명나라와의 사대 우호 관계가 안정되면서 국방 문제의 상당 부분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국경이 안정되자 전쟁은 사라졌고, 평화는 곧 풍요로 이어졌다. 세종 시대는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풍요의 시대였다. 당시 조선은 전례 없이 넓은 경작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노동력이 집중되면서 쌀 생산량도 정점을 찍었다. 효율 높은 논농사가 이미 확산된 상태에서 경작지의 극대화가 이루어졌고, 밭농사 위주였던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유례없이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세종 말기까지 국가가 집계한 경작지는 조선 최대였으며, 이후 임진왜란으로 그 3분의 2를 잃고는 끝내 최대치를 회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시절 인구는 조선 말기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인구는 적고, 먹을 건 넘쳤다. 국가적 차원에서 시간과 에너지가 남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학문과 기술, 예술로 흘러들었다. 축적된 민중의 여가는 곧 당대 문명의 찬란함으로 드러난다. 굶주리는 백성들 속에서는 철학자, 예술가와 발명가들이 넘쳐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바로 세종 본인이고, 그가 만든 훈민정음이다. 당시 집현전은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싱크탱크였고, 이들이 세종과 함께 전례 없는 연구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한 합작이 아니었다. 집현전 학자들 다수가 강하게 반대했으며, 세종은 그들과 논쟁을 벌였고, 일부는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한글은 세종 개인의 주도와 고집, 그리고 비범한 천재성에서 탄생한 발명품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세종이라는 인물이 단지 위대한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창의력과 실력을 갖춘 천재였다는 점이다. 그런 인물이 역사에 등장했고, 그가 끝없는 전쟁이나 권력투쟁에 시간 허비할 필요없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풍요와 평화, 인재와 지식이 모두 준비된 시대였다는 점이 조선 전기의 진짜 위대함이다. 문자라는 것은 단지 말의 기록 수단이 아니라, 사고 체계 전체를 바꾸는 도구다. 백성 전체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조선 사회 전체의 지적 구조를 재편하는 혁명이었다. 네덜란드는 무역 열강 시기에 축적한 부를 지금까지 도시의 구조, 방대한 간척지, 치수 설비, 건축 양식 등으로 남겨두었기에 오늘날 방문객들도 그 영화를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은 세종 시대의 풍요와 창조력을 다른 방식으로 남겼다.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이라는,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만을 위해 발명된 문자다. 세종은 군주로서 권위나 업적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사고 방식을 바꾸는 도구를 만들었고, 그 덕에 한민족은 단순한 통치의 틀을 넘어서 문명적 구조 자체를 새롭게 획득하게 되었다. 그 어떤 물리적 유산보다도 깊고 넓은 자산이었다. 한민족은 세종 덕에 이때 업그레이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