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에 폼페이는 원래 기원전 8세기쯤 그리스인들이 항구로 사용했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 공…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에 폼페이는 원래 기원전 8세기쯤 그리스인들이 항구로 사용했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 공화국의 일부가 됐고 서기 1세기에는 1만에서 2만 명 인구의 큰 도시로 성장했다.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며 화산재가 섞인 비가 18시간 동안 내렸다. 덕분에 인구 전체가 몰살당하지는 않았고, 일부는 귀중품 등까지 잘 챙겨서 피신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1000명에서 2000명 정도가 6미터의 화산재에 깔렸다. 화산에서 흘러나오는 용암으로부터 10km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는 그 열기로 즉사했다. 참사 직후 정부에서 나와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으나,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이미 도둑들이 귀중품, 건축자재 등의 약탈을 시작한 상태였다. 빈 땅에서 다시 시작하듯 또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도 했지만 5세기에 다시 화산이 분출하며 유적을 더 깊이 파묻었다. 너무 깊이 파묻히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 자리가 폼페이였다는 것도 모두가 잊었다. 사람들은 그 근처에 또 마을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라 시비타 La Civita(도시)라고 불렀다. 화산재가 차마 다 덮지 못한 건물 상부들이 도시 모양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16세기, 17세기에 라 시비타에서 조금씩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적이 발견됐지만 그냥 넘어갔고, 1738년에 나폴리 왕국의 궁전을 짓기 위해 땅을 알아보다가 유적 전체가 발견된다. 건물에 쓰여진 글씨 등에서 이게 폼페이였음을 그제야 다시 깨닫게 됐다. 수십 년에 걸친 발굴을 하다가, 발굴 책임자 쥬세페 피오렐리가 1863년에 굳은 화산재 속에 이상한 공간들이 사람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시신 위에 화산재가 쌓여 굳고, 시신은 1800년간 썩어 없어지고 시신 모양의 구멍 속에 뼈만 남아있었던 거다. 피오렐리는 석고를 그 구멍에 부어 공간을 채우면 시신 모양이 그대로 나온다는 걸 깨닫고 피해자들의 모습을 석고상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폼페이 화산 피해자들의 생생한 모습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뼈가 남아있는 구멍 속에 석고를 부어 석고상을 만들다 보니 그 안에 뼈가 석고상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해골과 이빨. 훗날 추가로 발견되는 구멍에는 석고 대신 합성수지를 부어, 반투명하고 기괴한 시신 유적들도 만들어진다. 사진은 폼페이에서 즉사한 강아지 석고상과 합성수지로 만든 전신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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