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마패 제도는 단순한 신분 증명 수단이 아니라 역참 제도의 일부였다. 마패를…

조선 시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마패 제도는 단순한 신분 증명 수단이 아니라 역참 제도의 일부였다. 마패를 가진 사람은 전국의 역참에서 말을 교체해 탈 수 있었고, 숙식까지 제공받았다. 이 제도는 조선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고려 시기에 이미 한양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시행된 전례가 있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인 범위가 아니라 수도와 주요 경로 위주로만 운영됐다. 이 제도의 원형은 몽골의 ‘파이자(paiza 牌子 패자)’였다. 파이자는 금속이나 목재로 만든 패로, 몽골 제국의 관원이나 사신이 제국 전역의 역참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보장하는 증표였다. 이 시스템은 몽골이 지배하던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통용됐고, 말 교체와 숙식, 경호까지 지원하는 규모로 운영됐다. 당시로서는 국제적인 이동권 보장 제도이자, 사실상 세계 최초의 ‘범유라시아 여권’에 가까웠다. 파이자는 몽골어로 ‘게레게(gerege)’라고도 불렸고, 재질과 등급에 따라 권한이 달랐다. 금·은·동(혹은 청동) 순으로 권한이 강했고, 상단에는 ‘영원한 하늘의 힘으로’ 같은 권위 문구가 새겨진 경우가 많았다. 표면에는 몇 필의 말을 요구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인원과 수레를 동원할 수 있는지 등 구체 권한이 기재되기도 했다. 문자는 몽골-위구르 문자를 기본으로, 중국어·페르시아어 병기가 확인되는 사례도 있다. 파이자가 보장한 핵심 인프라는 ‘얌(Örtöö, 역참망)’이었다. 역참은 대략 하루 반나절 거리마다 배치되어 말과 기수를 교대시켰고, 급행 공문·사절·군사 수송을 빠르게 처리했다. 파이자 소지자는 이 네트워크에서 말, 식량, 숙소, 안내병을 합법적으로 ‘관용 징발’할 수 있었다. 이 특권은 외교 사절과 행정관뿐 아니라 국고와 동업한 상인(오르톡 상단)에게도 제한적으로 부여되어, 제국의 장거리 상업과 조달을 촉진했다. 특히 오게데이 칸(1229~1241) 시기에는 파이자 제도가 대폭 확장·정비됐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하나의 작전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 통신망 구축이었다. 오게데이는 몽골의 모든 주요로와 국경 거점에 역참을 촘촘히 배치하고, 기존보다 말 교체 주기를 짧게 줄였다. 덕분에 기마 전령이 하루 300~400km를 주파하는 기록도 가능해졌다. 이 속도는 당시 어떤 문명도 따라잡지 못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외교·군사·무역 사건이 중앙의 카라코룸까지 불과 몇 주 만에 보고될 수 있었다. 이 초고속 네트워크는 단순 보고용이 아니라 즉시 반격·원정 명령·외교 지시까지 내려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서방 전선에서 크림 반도의 상황을 카라코룸에서 파악한 뒤, 몇 주 안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새로운 지시를 전달하는 일이 가능했다. 파이자 중에는 군사를 동원할 권한이 부여된 종류까지 있었다. 그 결과 몽골 제국은 대륙 양 끝에서 동시다발적 군사 작전을 조율할 수 있었고, 무역로·외교 사절의 안전도 보장됐다. 파이자는 이 네트워크의 열쇠로서, 단 한 장만으로 제국 전역의 말·사람·물자를 공인된 속도로 동원하게 했다. 남용도 있었다. 일부 소지자가 필요 이상으로 말과 물자를 요구하거나 사적 용무에 쓴 탓에, 13세기 중엽부터 대칸과 분국 황실은 파이자 등급을 재정비하고 발급·회수를 엄격히 했다. 권한 범위를 표기해 오·남용을 줄였고, 역참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지 납세 체계와 보급 예산을 분리하는 시도도 이뤄졌다. 이후 원·일한국·차가타이·킵차크한국 등 각 분국은 자국 사정에 맞게 파이자와 역참망을 조정했고, 이 표준이 동아시아와 이슬람권 행정 문화에도 흔적을 남겼다. 몽골 제국이 최대 규모였을 때, 파이자를 가진 사신이나 고위 관리라면 오늘날의 베이징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약 8,000km를 3~4개월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말만 바꾸면 하루에 200km를 달리는 것도 가능해, 평시라면 유라시아 횡단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이뤄졌다. 여정은 위험과 편의가 공존했다. 한 역참에 도착하면 피로에 찌든 기수와 말은 교체되고, 준비된 뜨거운 차와 따뜻한 식사가 기다렸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가는 긴장감, 예기치 않은 기후, 초원과 사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 속에서, 파이자를 목에 건 그 순간만큼은 제국의 보호 아래 있다는 안도감이 함께했다. 당시 이를 경험한 여행자는, 말 그대로 “패 하나로 세계를 가르는” 감각을 누릴 수 있었다. 반대로 파이자가 없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에 직면했다. 말과 짐꾼, 숙소를 모두 사비로 해결해야 했고, 역참의 말 교체는 허가 없이 불가능했다. 하루 30-40km를 겨우 이동하며, 경로 우회와 계절 대기까지 포함하면 8,000km 여정이 최소 12-15개월, 나쁘면 2년이 걸렸다. 비용은 말과 인력 교체마다 눈덩이처럼 불었고, 도적·기후·질병 같은 위험도 혼자 감당해야 했다. 파이자의 존재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장거리 이동의 가능성을 결정짓는 경계선이었다. 흥미롭게도, 파이자의 상징성은 현대 몽골의 국가 이미지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몽골 지폐, 일부 기념주화에는 파이자의 둥근·방패형 문양이 들어가 있다. 칭기즈 칸 초상 옆이나 뒷면 장식에 새겨진 이 디자인은, 단순 장식이 아니라 ‘국가 공인 권위’와 ‘역사적 통합 네트워크’를 상징한다. 현대 화폐 속 파이자 문양은, 몽골이 과거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었던 제국의 후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장치다. 우리 역시 그 제국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