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레츠(系列)

한국의 재벌 체계는 일본 재벌 체계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미쓰이(三井) 같은 일본 케이레츠를 이해하려면 용어부터 짚어야 한다. 일본에서 재벌은 자이바츠(財閥), 계열은 케이레츠(系列)다. 둘 다 한국어 ‘재벌’, ‘계열’과 같은 한자를 쓰지만, 실제 의미와 작동 방식은 꽤 다르다.

스미토모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자이바츠였다. 구리 광산을 기반으로 금융·상업·제조로 확장했고, 전전(戰前)까지는 스미토모 가문이 소유와 지배를 장악했다. 이 시기의 구조는 한국 재벌과 매우 흡사했다. 가문 중심, 내부 규율, 계열 간 강한 결속이 특징이었다.

이 구조가 무너진 건 전후 미군정 시기다. 일본의 자이바츠는 전쟁 책임과 독점 문제로 강제 해체됐고, 스미토모 가문은 지배권을 상실했다. 여기서 한국 재벌과 길이 갈라진다. 한국의 재벌 체제는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됐지만, 일본은 “총수 없는 기업 집단”으로 재편된다.

그 결과물이 스미토모 케이레츠(住友系列)다. 케이레츠는 지주회사나 오너 가문이 없다. 스미토모 상사, 스미토모 화학, 스미토모 전기공업, NEC 같은 회사들이 스미토모 미쓰이 은행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을 뿐이다. 연결 고리는 소량의 교차지분과 정기적인 사장단 모임 정도다. 한국으로 치면 같은 재벌 집안에서 지분 정리하고 독립해 나간 방계 간의 관계에 가깝다.

그렇다면 “같은 케이레츠라서 가능한 일”은 무엇일까.

첫째, 금융 안정성이다. 중심 은행과의 관계 덕분에 위기 시 급격한 자금 경색을 피하기 쉽다. 다만 한국 재벌처럼 무제한 지원은 아니다.

둘째, 정보 공유와 신뢰다. 적대적 M&A 방어, 장기 거래 관계, 인사 교류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셋째, 장기 전략 협력이다. 단기 수익보다 산업 안정과 기술 축적을 중시하는 공감대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안 해주는 것”도 분명하다.

계열사가 흔들린다고 그룹 전체가 나서서 구제하지 않는다. NEC가 장기 침체에 빠졌을 때도 스미토모 케이레츠는 총력 지원에 나서지 않았다. 각 회사는 독립적으로 구조조정하고 외부 자본을 받아들였다. 한국 재벌에서 흔한 내부 거래 확대나 총수 결단과는 결이 다르다.

이 느슨함은 위기 시 전체의 생존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결정이 느리고 책임 소재가 흐려지는 단점도 있다.

탈퇴도 마찬가지다. 케이레츠에는 공식적인 가입·탈퇴 절차가 없다. NEC는 지금도 역사적으로는 스미토모 계열로 분류되지만, 2000년대 이후 실질적 케이레츠 색채는 거의 사라졌다. 이름은 남고 연대는 희미해졌다. 한국 재벌에서 계열 분리는 곧 지배권 문제로 이어지지만, 일본에서는 자연스러운 거리 조정에 가깝다.

한국 재벌과의 가장 큰 차이가 소유구도인 만큼, 한국 재벌의 모든 힘이 한 명에게 집중됐을 때의 막강한 권력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승계와 상속 문제도 일본 케이레츠는 한국 재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하다. 일본에서 한 케이레츠의 전력이 하나의 목표에 집중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외부에서 적대적 공격이 들어올 때는 케이레츠 전체가 묵시적으로 한 편이 된다.

한국에서는 금산분리로 재벌의 은행 소유를 막아 국민의 예금이 재벌의 사업 자금으로 전용되는 것을 제한해 왔다. 반면 일본은 자이바츠 시절부터 은행이 중심에 있었다. 대신 은행 운영 자체를 엄격히 관리해 예금 남용을 제도적으로 억제했다.

케이레츠 전체를 묶는 지주회사는 없지만 케이레츠 안에 기업들은 1997년 이후 순수지주회사 설립이 허용돼서 스미토모 화학, 미쓰비시 UFJ 파이낸셜 그룹 등은 지주회사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2015년 기업지배구조 코드로 케이레츠 간 소량의 교차지분도 많이 정리해 처분하는 트렌드다. 점점 더 연결 고리가 느슨해져 사장단 친목회에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 재벌 계열사 간의 교차소유는 1인이 소량 지분으로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힘을 한 곳으로 모으는 구조다. 차트를 보면 명확해진다. 반면 교차소유가 지금보다 심했을 때조차도, 케이레츠의 교차소유는 상호 연대를 위한 성격이 강해 구조의 꼭지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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