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원칙은 애초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조사·판단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막자는 취지에…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원칙은 애초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조사·판단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막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힘의 불균형 속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진보 진영이 사회적 정의를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특히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거나 모두 완전하지 않은 경우, 피해자의 입장을 우선 고려해야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사례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원칙이 피해자의 용기있는 폭로와 사회의 호응을 통해 하비 와인스틴 같이 너무 큰 권력을 누리고 있어서 기존 사법 시스템을 통해서는 잡기 힘들던 인물들을 잡게 되며 미투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이 잘못 적용되기 시작한다. 충분한 신빙성이나 일관성이 없는 상황에도, 그런 부족함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옳다, 그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를 배신해서는 안된다는 교조적 자세가 힘을 얻었다. 의혹이 제기 됐을 때 제기자의 주장 외에 정황 사실을 알려하는 행위 자체도 2차가해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사실관계 확인 과정없이 제기자가 원하는 사람을 가해자로 단정하는 것이 옳고 반론을 듣는 건 2차가해라는 수준까지 나아가버렸다. 한국에서는 최근에 이게 더 발전을 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립 상황이 아닌데도, 피해자가 제3의 대상과 대립하는 순간에도 “무조건 피해자 편을 들어야 한다”는 기계적 태도로 흘렀다. 강미정 전 대변인 사건처럼 피해자가 전혀 직접적 책임이 없는 당과 지도부를 상대로 이해하기 힘든 거짓이 많이 섞인 비난을 해도, 주변에서는 “그래도 피해자니까 들어줘야지”라는 반응이 퍼졌다. 원래 원칙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사실상 성역화된 방식이다. 이런 오해가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타인 입장에서 복잡한 사실관계를 이해하기보다는, 사회적 비난을 피하고 안전하게 처신하는 것이 개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피해자 편을 안 드느냐”라는 압력을 받는 순간, 대다수는 논리보다 본능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택한다. 피해자 주장이나 언행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걸 설명하는 과정에서 받는 '가해자 편이야?'라는 오해와 누명을 반기는 사람은 없다. 이상한 점이 보여도 조용히 하거나 무시하고 피해자 편을 드는 게 유리하다. 복잡한 사정과 관계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한 점도 있다. 결국 집단적으로 피해자 편을 드는 게 일종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면서, 원칙의 본래 취지는 퇴색한다. 문제는 이 왜곡이 실제 운동의 동력을 갉아먹는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가짜 미투였다. 원래 미투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 사회 구조의 불평등과 폭력을 바꾸려는 강력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미투가 힘을 얻은 뒤 그 힘으로 개인의 욕구를 성취하려는 사례들이 하나씩 나오면서, 사회 전체가 운동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검증보다 단죄에 촛점이 가 있는 미투의 헛점을 악용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재판이 그 상징적 사례였다. 허드는 자신이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주장했지만, 재판과정에서 그 반대 정황들이 드러났고 배심은 그녀의 핵심 진술을 허위이자 악의적 명예훼손으로 판결했다. 미투의 거대한 파도 한가운데서 이 사건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곧바로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드러냈다. 배우 조지 타케이 사건도 마찬가지다. 성추행 폭로가 크게 보도되었지만, 당사자가 이후 스스로 진술을 철회·정정하면서 사실관계가 뒤집혔다. 처음에는 운동의 상징처럼 다뤄졌던 사건이 결국 허공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폭로 직후 타케이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비난하고 있다. 조니 뎁 역시 지금도 성폭행자 이미지를 가지고 간다. 사람은 한번 형성한 의견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이렇게 거짓 사례들이 터져 나올 때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본래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진짜 피해자들을 더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진실을 앞에 두고도 기계적으로 "피해자"의 편을 들면, 원칙은 무너지고 운동전체의 신뢰는 흔들린다. 악용하려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반가운 철학이 없다. 이런 기계적 판정, 안전한 태도를 택하는 행위는 진보 가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첫째, 진실 규명보다는 편의적 판정을 강화한다. 피해자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사실 검증이 중단되면, 사회적 정의는 흐려지고 신뢰는 무너진다. 사실 검증 해도 피해자 존중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둘째, 정치적 악용의 여지를 남긴다. 원칙을 무기로 삼아 사실과 다른 주장도 성역이 되는 순간, 진보가 지켜온 ‘합리적 토론’과 ‘투명성’의 가치가 스스로 훼손된다. 강미정과 함께 한다는 사람들이 초기부터 어떤 종류의 대화도 거부하며 비대위 요구를 비롯한 당권투쟁에 집착한 것처럼. 셋째, 결국 진보 내부에서도 책임 있는 주체들이 설명할 기회를 잃고, 억울한 희생양이 만들어진다. 2019년부터 온가족이 죽어가다 이제 막 출감한 조국은 도대체 무슨 날벼락을 맞은 것인가. 가해자도 아니고 책임있는 자리에 있지도 않던 조국이 "피해자"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조국이 틀렸으니 조국이 책임져야할 부분을 열심히 찾았다. 찾아도 없으니 '공감을 충분히 안했다'가 나왔다. 죄가 없어도 바로 항복하고 모든 걸 시인하는 사과를 했어야한다는 주장이 황당하게도 정말 많았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무조건적인 편들기가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를 존중하되, 사실관계 검증과 조직적 책임을 분리해 사고하자는 원칙이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과정과, 관련 없는 대상에 대한 책임 추궁은 다른 문제다. 진보가 건강해지려면 불편하더라도 이 차이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원칙은 보호되고, 동시에 사회적 신뢰도 유지된다. 조니 뎁, 조지 타케이, 조국혁신당. 지금도 이들이 가해자라고 믿는다면 한가지 자문을 해보면 된다. 피해자 강미정이 가해자가 아닌 당에게 책임을 묻고 당이 가해했고 동감해주지 못한 조국이 책임져야한다고 주장했고 당신은 동의했다. 그러면 혹시라도 그게 사실이 아닐 경우 당입장에서는 어떻게 처신했어야 당신의 오해를 풀어줄 수 있었을까? 진상 조사도 했고 사과도 했고 만나려는 노력도 했지만 강미정은 세가지 다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거기에 당이 해명하니 "감히 피해자의 말에 반박을 하다니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라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 상황에서 뭘 했어야 오해를 풀 수 있었을까? 이들이 요구한 것은 오해를 풀려는 노력이 아니라 항복이었다. 지도부 사퇴와 비대위 구성을 벌써 몇달 전부터 요구했었다. 검사의 비리를 기소할 수 있는 게 검사 뿐인 구조에서는 당연히 검사들의 비리가 처벌 받지 않듯이,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구조에서는 거짓이 힘을 얻는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순하다. 진실 앞에서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제3자도 모두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아무리 숭고한 가치관이라도 진실을 무시하는 순간 또 다른 거짓이 될 뿐이다. 진실만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고, 그 앞에서만 사회는 다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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