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 안은 컴퓨터 화면의 푸른빛만이 조용히 깔려 있었다. 키보드 소리, 환기팬의 낮은 울림, 커피잔에서…

1.

방 안은 컴퓨터 화면의 푸른빛만이 조용히 깔려 있었다. 키보드 소리, 환기팬의 낮은 울림, 커피잔에서 나는 잔향 — 그때 갑자기, 먼 곳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라디오의 끊긴 채널처럼 끝없이 늘어진 한 음, 곧이어 더 또렷한 음이 겹쳐졌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듯한 정적이 지나갔다.

나팔은 단번에 방의 공기를 밀어붙였다. 창틀이 미세하게 울리고, 램프 전구가 깜박이며 화면의 색감이 왜곡됐다. 귀에는 금속 맛이 도는 소리가 남고, 혀끝에 작은 전류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니터의 알림들이 서로 겹쳐 깜박이다가, 한 줄의 텍스트가 화면에 고정됐다 — 뜻도 모를 고대어의 단음절들이 번쩍이며 지나갔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평소와 달리 무겁게 찌그러졌다. 피와 불과 피 섞인 우박이 떨어지는 듯 도시 위로 불빛이 흩어졌다. 먼 수평선이 불길하게 붉게 물들고, 구름이 수평으로 갈라지며 어딘가에서 빛줄기가 떨어졌다. 거리의 소음이 순간적으로 서늘하게 줄어들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낮은 합창이 들려왔다. 바람이 방 안으로 휘몰아치며 종이와 먼지를 함께 흔들었다.

전자기파가 변한 듯, 휴대폰과 스피커의 알림 소리는 왜곡된 합창으로 바뀌었다. 내 손은 키보드 위에 멈춰 섰고, 화면의 텍스트들이 읽을 수 없게 흘러내렸다. 집 전체가 아닌, 이 순간만은 방 하나가 세계의 축처럼 느껴졌다 — 모든 것이 평범했는데 동시에 평범하지 않았다. 시간 감각이 늘어나고, 초침이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움직였다.

나팔 소리가 잦아든 듯했지만, 방 안 공기는 여전히 압박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순간 정적 속에서 땅 밑에서 울리는 듯한 진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책상이 미세하게 떨리고, 마우스 커서가 혼자서 움직이며 화면에 알 수 없는 기호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번개 같은 빛줄기가 수평으로 길게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천둥과 달리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눈을 찌르는 빛만 남겼다. 마치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가 잠시 지워진 듯, 구름은 검게 찢어지고, 그 틈으로 끝없이 내려오는 광선은 도시의 윤곽을 이리저리 뒤흔들었다.

멀리서는 함성과 같은 음성들이 들려왔다. 언어로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합창과 비명 사이를 오가는 묘한 울림이었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집 안 가구가 함께 떨렸다. 전등이 번쩍이며 꺼졌다 켜지고, 바닥 위 그림자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꼬여 올라왔다.

내 눈은 모니터를 향했는데, 거기에는 더 이상 브라우저 창이 없었다. 대신 수없이 겹쳐진 눈 모양의 영상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 시선들은 마치 ‘너를 보고 있다’는 무언의 확신을 주며, 숨조차 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2.

그리고 다시, 두 번째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방 안에서 터져 나온 듯했다. 공기가 한순간 찢어지며, 내가 있던 공간 전체가 낯선 문 앞에 도달한 듯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가려 했다.

두 번째 나팔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맑아진 듯 고요해졌다. 하지만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모든 것이 멈춘 뒤의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소음이 사라진 세상, 심지어 내 심장 소리조차 멀어진 것 같았다.

그 순간, 벽이 서서히 투명해지며 방은 사방이 열린 듯했다. 내 방이면서 동시에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빌딩마다 창문에서 불빛이 흘러나왔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형상들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날개와도 같은 실루엣,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인간인지 짐승인지 구분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자 천장에서 길게 금이 생기더니, 그 틈에서 쏟아지는 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 빛은 눈부시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뼛속까지 투명하게 드러나버릴 것 같은, 숨을 틀어쥐는 냉정한 빛이었다.

3.

그리고 세 번째 나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공간 전체가 공명하며, 땅이 흔들리고, 건물들이 멀리서 무너져내리는 장면이 동시에 겹쳐 보였다. 방 안의 물컵이 금이 가고 터지며, 실제로 목이 마르고 메마른 듯한 감각이 몰려왔다. 쑥(苦艾)의 쓴맛이 상징하는 절망과 오염이 내 방까지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 움직이지 못했고, 단 하나의 확신만 남았다. 이 소리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시작의 신호라는 것.

세 번째 나팔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공기는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마치 세계 전체가 압축되는 듯한 울림이었다. 벽과 천장은 더 이상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었다. 마치 숨을 쉬는 생물처럼 들썩이며 방 안을 조여왔다.

창밖에서는 어두운 구름이 땅 가까이 내려앉아 도시를 덮었다. 그 구름 속에서 불길처럼 붉은 번개가 뻗어나오며, 건물마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비명도, 기도도, 환호도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뒤섞여 무너지는 합창 같았다.

방 안의 공기는 숨 쉬기 어려울 만큼 차가워졌다가, 곧 뜨겁게 달아올랐다. 책상 위 물컵이 흔들리더니 금이 가며 터졌다. 바닥은 벌어지듯 갈라지고, 그 사이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작은 방 하나가 거대한 심연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4.

그리고 네 번째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의 뼛속, 피 속, 세포 하나하나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 소리에 맞춰 창밖에서는 바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땅의 형체가 흐려졌다. 도시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새로운 무대로 넘어가는 듯한 순간이었다.

네 번째 나팔의 울림이 끝나자, 방 안 공기가 순간적으로 텅 비어버린 듯 가벼워졌다. 하지만 곧 천장에서 검은 균열이 열리며 연기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왔다. 창문은 완전히 시커멓게 덮였고, 바깥 도시가 보이지 않았다.

5.

다섯 번째 나팔이 울리자, 방 천장에서 균열이 열렸다. 그 틈으로 검은 연기가 솟구치며 방 안을 메웠다. 연기 속에서 곤충의 날갯짓과 쇳소리가 섞인 듯한 진동이 퍼졌다. 그리고 전갈 꼬리를 가진 메뚜기들이 몰려 나왔다.

이들은 가구나 물건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직 내 몸을 향해 다가왔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죽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풀이나 나무는 해치지 않고, 사람들만 다섯 달 동안 괴롭히는 메뚜기들. 방 안은 하나의 무저갱이 되었고, 나는 그 속에서 고통의 증인이자 실험체가 되었다.

6.

공기가 다시 흔들리며 여섯 번째 나팔이 울렸다. 벽은 투명해지고, 그 너머에 거대한 강이 드러났다. 그곳에 묶여 있던 네 존재가 풀려났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가득 찼다.

창문 밖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수한 기병들이 말을 타고 몰려오는데, 그 말들의 입과 꼬리에서는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방 안은 붉은 빛으로 덮였고, 모니터는 무너지는 건물과 불타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인류의 삼분의 일이 사라지는 듯, 내 방에서조차 공기의 절반이 사라져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들이 풀리자, 도시 전체에 불과 연기와 유황 같은 것이 쏟아졌다. 불길이 번쩍이며 아스팔트를 갈라버리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뒤엉켜 검은 재로 변해갔다. 방 안에서도 바닥 틈새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다.

창문 너머, 군대 같은 발굽 소리가 울렸다. 무수한 병사들이 말을 타고 몰려오는데, 그 말들의 입과 꼬리에서 불과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병사들은 세상을 휩쓸며 삼분의 일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모니터 화면도 붉게 물들어, 불타는 도시의 모습을 끝없이 반복했다.

모든 소음과 혼란이 정점에 다다른 순간,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시간이 멈춘 듯, 메뚜기의 날갯짓도, 말발굽 소리도, 불길도 멈춰 서 있었다. 오직 방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 남았다.

7.

그때,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단순한 음향이 아니었다.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선언의 음성이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세계가 종결되고 새로운 질서가 선포되는 순간을 알렸다.

창밖 하늘은 찢어지며 거대한 성전 같은 형체가 나타났다. 번개, 음성, 천둥, 지진, 그리고 거대한 우박이 연달아 쏟아졌다. 하지만 그 안에는 혼돈이 아니라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방은 더 이상 내 방이 아니었고, 나는 세계의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의 경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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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일 방안에 있는 동안 나팔이 불기 시작하면 어찌될까 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