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이 독일 전역을 점령했을 때, 항복하거나 체포된 독일군 포로 가운데 놀랄 만큼 많은…
2차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이 독일 전역을 점령했을 때, 항복하거나 체포된 독일군 포로 가운데 놀랄 만큼 많은 이들이 사실상 ‘군인’이라기보다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 출신의 십대 소년들이었다. 마지막까지 베를린 방어전에 투입된 대원들조차 14~17세 사이가 많았고, 전장에서 총을 든 경험 외에는 세상 물정도, 민주주의의 가치도 모른 채 성장한 세대였다. 이들이 미군에게 잡혔을 때 상당수는 "이제야 자유를 얻었다"고 여겼다 한다. 이들을 그냥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파시즘 교육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사회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특히 미국은 전후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될 조짐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이 젊은 세대를 ‘민주주의적 시민’으로 재교육하는 일이 전략적 과제가 됐다.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 북부의 아티시(Attichy) 지역에는 미군이 설립한 특수 포로 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새장 Bird Cage'라는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약 만 명가량의 청소년 포로가 이곳을 거쳐 갔다고 전해진다. 아티시 수용소에서 시행된 프로그램은 단순한 포로 관리가 아니라 일종의 ‘탈나치화 교육’에 가까웠다. 독일어 교재를 통해 자유주의 정치제도, 헌법, 시민권 개념을 가르쳤고, 토론 수업과 영화 상영, 신문 제작 등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훈련을 시켰다. 나치 시절 주입받은 인종주의나 전체주의적 사고를 교정하는 것이 핵심이었고, 전쟁 책임에 대한 토론도 포함됐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꼭 인도주의적 복지나 청소년 보호 차원만은 아니었다. 미국 입장에서 중요한 목표는 전후 서유럽 재건에서 잠재적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이들이 공산주의 진영에 매혹되지 않도록 미리 사상적 장벽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육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복잡한 구조를 체계적으로 이해시키는 것보다 ‘반(反)나치, 반(反)볼셰비즘’ 기조를 주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UN이 소년병을 금하는 등의 UN 아동권리협약을 채택한 건 이로부터도 한참 뒤인 1989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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