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2015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당시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이 봄방학 기간에 리비아 내전에 참전했던 얘기가 잠시 화…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당시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이 봄방학 기간에 리비아 내전에 참전했던 얘기가 잠시 화제가 됐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나 문득 궁금하기도 하고, IS에 가담했다는 김군도 생각나고 해서 소식을 찾아봤다. http://iamkoream.com/january-issue-the-real-story-behind-college-student-turned-libyan-freedom-fighter-chris-jeon/ 의 2013년 기사 내용을 대략 간추려보면….

1980년대에 가족과 이민을 가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크리스 전은 한국계 학생들이 흔히 그렇듯 최고의 성적으로 UCLA에 진학했고, 수학을 전공했다. 3학년을 끝내고 Black Rock이라는 세계 최대 자산관리 회사에 인턴을 시작한 그는 아마도 앞으로 평생 하게 될 그 일이 너무나도 따분하게 느껴졌고, 그때까지 착하게 공부만 하고 살며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분출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마침 리비아 내전 뉴스를 접한 크리스 전은 유튜브를 통해 리비아와 전투에 대해 약간의 공부를 마치고 바로 리비아로 향했다.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하고. 우여곡절 끝에 반란군에 가담하게 된 그는 조금씩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하다가 미국인 기자들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때의 인터뷰가 미국과 한국의 뉴스에 올라가게 됐다.

그 뉴스를 계기로 크리스 전이 리비아에 있음을 알게 된 부모님이 귀환을 호소하기도 했고, 친하게 지내던 반군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또 자신도 정부군 한 명을 처음으로 사살하는 일을 겪은 뒤 미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뒤에는 수업에도 흥미을 잃었고, 캘리포니아의 친구들 보다는 리비아의 반군 출신 친구들과 더 자주 연락하고 지냈다.

결국 미국에서 다시 엘리트 코스를 밟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크리스 전은 또 리비아로 향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각종 민병대들이 지배하고 있고, 외국인 납치가 흔하게 벌어지는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걸 확인하며 매일 또 다른 모험을 찾아 배회한다.

http://www.koreatimes.com/article/68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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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애도하고 프랑스의 정신을 기리는게 왜 지금 한국의 민중총궐기와 무관하지 않은지는 프랑스 국가인 La…

파리를 애도하고 프랑스의 정신을 기리는게 왜 지금 한국의 민중총궐기와 무관하지 않은지는 프랑스 국가인 La Marseillaise의 가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K1q9Ntcr5g

1.

가자,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다.
우리에 맞서 전제정이 들어섰다.
피 묻은 깃발이 올랐다,
피 묻은 깃발이 올랐다.
들판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느냐,
이 잔인한 군인들의 포효가.
그들이 바로 우리 곁에 왔다,
너희 조국, 너희 아들들의
목을 따기 위해서.

후렴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너희의 부대를 만들어라
나가자, 나가자!
그들의 불결한 피를
우리 들판에 물처럼 흐르게 하자.

2.

신성한 조국애여,
우리의 복수심에 불타는 팔을 인도하고 떠받쳐라.
자유, 사랑하는 자유여,
네 지지자와 함께 싸워라,
네 지지자와 함께 싸워라.
우리의 깃발 아래에, 승리가
네 씩씩한 노래에 맞춰 돌진하리라.
네 죽어가는 적들이
네 승리와 영광을 보도록.

https://www.facebook.com/poi76/posts/110737969927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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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정치활동과 동기 분석.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아버지인…

박근혜의 정치활동과 동기 분석.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아버지인 박정희가 한국 국민들에게 독재자였다고 인식되고 있는 상황을 바꾸기 위함이었다. https://youtu.be/NF9wA5FOvJI?t=78

10.26 이후 근신하다시피 하다가 민자당에서 공화당 출신들이 축출되어 자민련으로 나가 독자세력이 되고 1995년에 자신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취임도 하게 되면서 이제 자기가 나서서 정치세력이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다. 게다가 10.26 직전까지 자신과 최태민 목사가 구축해놓았던 새마음 운동 조직이 1989년 근화봉사단으로 재조직됐고, 전국에 수십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이 박정희/박근혜 충성조직은 박근혜의 정치세력화에 기반이 됐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0329

박근혜의 입장에서 자신이 대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적어도 아버지 편이었다가 배신한 수많은 5공 세력들과는 차별화되는, 박정희 우호세력이 국회에 생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회창의 부름으로 1997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다음 해에 대구 달성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2년 만에 한나라당 부총재가 됐다.

국회 입성이라는 1차 목표는 달성했고, 아마 그다음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아버지 박정희가 단순히 독재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군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지킨 대한민국의 아버지 같은 존재라는 걸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서 한나라당을 장악하고 독주하던 이회창에 반기를 들어 탈당, 복당도 해보고, 김정일을 만나 2002년 당시 이회창 노무현 등의 대선주자들과 차별화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http://blog.donga.com/kem7chul/archives/361

결국, 참여정부에 들어서 탄핵정국을 만나 한나라당을 완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박근혜는 2007년에 이명박에게 진다. 자신의 측근들이던 친박들의 변절을 통해 1979년의 아픈 기억도 다시 한 번 되뇐 그는 이명박 정권 동안 다시 근신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이명박 정권 말 비대위를 통해 다시 한 번 당을 장악한 박근혜는 2012년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됐고, 자신이 자신의 정치 소명을 이루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국민들의 표를 얻어 박정희의 딸인 자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만큼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주는 일이 또 있을까.

목적을 다 이룬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박근혜의 기본 태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듯했다. 뭔가 얻는 게 있는 외교라기보다는 홍보 성격의 해외순방에 전력을 다했고, 국내에서는 언론과의 인터뷰는 절대 사절에, 청와대 집무실에도 잘 안 나가고, 국가비상사태가 터져도 기본적으로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고 책임도 권한도 없다는 태도를 반복했다.

아마도 왜 자꾸 문제가 생기는지 박근혜 본인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인 박정희 때는 대통령은 아무도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하던 존재였고, 건설 현장에 가서 휘호나 써주며 사진 찍고, 매일같이 안가에 가서 술 마시고 해도 박정희 사유인 나라는 멀쩡히 유지가 됐으니까. 자기도 국내에서 비서들 몇 명 외에는 심지어 국무총리도 연락할 수 없는 존재로 군림하며 해외에 나가 화려한 패션으로 의전행사에 국빈대우 받으며 다니는데, 왜 자꾸 불통이라 하고 무책임하다고 하는 것인지…

박근혜의 결론은 아마도 국민들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자신이 70년대에 주도했던 새마음 운동을 계속했더라면 국가에 충성하고 대통령을 아버지로 모시는 훌륭한 국민들이 되었을 텐데, 아버지가 불행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법통을 잇는 지도자가 없이 33년을 표류한 국민들의 혼…. 그것을 바로 잡는 게 자신의 정치 소명을 완결짓는 길이라고 결정한 것이다.

아직 2017년 임기 완료까지는 2년이나 남았다. 먼저 교과서들을 국정으로 바꿔서 어린 국민들부터 다시 교육하고, 모든 국민들을 다시 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건강한 혼을 지닌 백성들로 돌려놔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박근혜의 생각이고, 현실은 이런 시도로도 박정희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하던 6, 70년대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박근혜의 다음 행보는 뭐가 될지 예측하긴 힘들지만, 그 동기는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모두가 아버지 박정희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방법이 뭐가 됐건 그걸 하려면 일단 자신에게 권력이 있어야 하므로,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 및 다시 국정원 중심의 정치활동이 유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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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othroughable… “This extensive borrowing from classical…

ungothroughable…

"This extensive borrowing from classical languages caused much learned debate between linguistic purists, and progressivists. The former, concerned with the effect of massive borrowing on the purity of English, proposed that native linguistic resources should be used to express the necessary meanings. Thus the word impenetrable should be dropped, and English speakers should say ungothroughable. Inconceivable should be rendered as not-to-be-thought-upon-able. …… Writing in 1531, Sir Thomas Elyot apologised for some of the Latin Based words which he included in this work "The Book Named the Governor" but he justified himself by saying that such words would become:

"facile to understande as other wordes late commen out of Italy and Fraunce"

– from "English Grammer: An Introductory Description"

이븐 알하이삼. 인류역사상 최초의 이론물리학자이자, 광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수학자, 서기 965년부…

이븐 알하이삼. 인류역사상 최초의 이론물리학자이자, 광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수학자,

서기 965년부터 1040년까지 아바스 왕조 시절 지금의 이라크 땅에서 살았다. 사실상 몇 백년 뒤 중세 유럽에서 과학문명이 태동하는데 필요한 기반을 다 마련해줬다. 그때까지도 사람 눈에서 빛이 나와 물건에 반사된 것을 감지해서 볼 수 있다고 하던 광학의 수준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시각의 정확한 작용원리, 빛의 성질 등을 밝혀냈다.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현대 과학문명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설, 실험, 귀납적 추론 등을 통한 과학적 방법을 만들어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르네상스도, 현대과학도 없었거나 그 시작점이 몇 백 년 늦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B8%90_%EC%95%8C%ED%95%98%EC%9D%B4%EC%82%BC

https://en.wikipedia.org/wiki/Alha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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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현대가 vs 범 삼성가 1994년 총 자산 범현대 58조 8600억원(2013년 화폐가치로 110조 9…

범 현대가 vs 범 삼성가

1994년 총 자산
범현대 58조 8600억원(2013년 화폐가치로 110조 93억원)
범삼성 48조 850억원(2013년 화폐가치로 89조 8709억원)

2013년 총 자산
범현대 292조 3860억원(1994년 대비 화폐가치하락을 감안하면 266% 성장)
범삼성 386조 616억원(1994년 대비 화폐가치하락을 감안하면 430% 성장)

액수만 놓고 보면 20년 사이 그냥 1위와 2위 자리만 서로 바꾼것 같지만 그 위상은 사뭇 달라졌다. 1994년 당시 현대가 재계 서열 압도적인 1위의 재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과 1992년 대선에서 대결했다는 이유로 문민정부 내내 견제와 불이익을 받아 상당히 급속도로 세력이 약해지는 일이 가능했지만, 그로부터 10년 뒤 재계 서열 1위가 된 삼성은 참여정부도, 이명박도 박근혜도, 그 어떤 위정자도 건들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두 재벌 모두 20년 동안 회사 규모를 세 배 네 배 키워갔지만, 현대와 달리 삼성은 만년 2위였던 시절부터 수십년에 걸쳐 언론계, 정계, 법조계를 모두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삼성공화국으로 만들었기에 그 위상에서 현대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20년 동안 양대 재벌들이 어마어마한 성장을 하는 동안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은 경제적으로 황폐화 됐고, 독재정권이 차지하고 있던 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삼성을 위시한 재벌들이 고스란히 가져가 사회정의 또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북한 휴대전화 서비스 가입자 수 2014년 기준 280만 명 추정. 참고로 평양의 인구도 280만 명….

북한 휴대전화 서비스 가입자 수 2014년 기준 280만 명 추정. 참고로 평양의 인구도 280만 명.

"2014년 발표된 ‘북한의 휴대전화’ 보고서는 고려링크에 등록된 이동통신 가입자수에 의문을 나타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800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통계치와 같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과연 핸드폰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럼에도 엘-노아마니 씨는 본인이 북한에 있었던 3년 전에도 이미 가입자 수가 190만 명에 달했다면서 이는 오라스콤의 보고서에 나와있는 가입자 증가 수치와 거의 일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급속한 통신자수 증가세가 한풀 꺾이긴 했으나 수요를 다시 자극한다면 4-5백만 명 또는 6백만 명까지도 통신가입자 수를 확대할 여력이 있다고 전망했다.

엘-노아마니 씨는 자신이 만난 북한 사람들은 축구선수 메시나 심지어 강남스타일에 대해서도 익히 아는 등 외부 세계에 대해 꽤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물론, 북한에서 공개적으로 강남스타일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http://kr.nknews.org/archives/898#more-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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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te Co. Ltd.’s founder SHIGEMITSU Takeo was born SHIN Kyuk…

Lotte Co. Ltd.'s founder SHIGEMITSU Takeo was born SHIN Kyuk-Ho in Korea in 1922. He went to Japan in 1941 at the age of 19, leaving behind his pregnant wife in Korea, to make money. He soon married the niece of SHIGEMITSU Mamoru, a powerful politician who as the Japanese Foreign Minister signed the surrender document in front of General MacArthur aboard USS Missouri in 1945. https://youtu.be/AsZ0qwJSbuQ?t=30 SHIGEMITSU lost his right leg in a bombing by YUN Bong-Gil, a Korean résistance fighter.

SHIN took his wife's uncle's last name and became SHIGEMITSU Takeo.

He founded Lotte in Japan in 1948 and turned it into one of the largest corporations in Japan at the time. He then founded the Korean branch in 1967. The Korean branch has since grown to surpass the Japanese branch 5 times over(or 20 times, according to some sources) and it is now the 5th largest corporation in Korea.

He used to travel back and forth between Japan and Korea, spending odd months in Korea and even months in Japan to run both branches until 2011. He resides in Korea now.

His two sons, Hiroyuki and Akio have equal number of shares in Lotte, with Hiroyuki, the elder son, being in charge of Lotte Japan and Akio in charge of Lotte Korea, until 2015 when Hiroyuki tried to take over both branches but failed and was pushed out along with his father, by Akio. SHIGEMITSU Akio now heads both Lotte Japan and Lotte Korea.

Most of his family members are Japanese but Hiroyuki and Akio, who were both born in Japan to a Japanese mother, have naturalised in Korea in recent years, possibly to maintain the family's control over the significantly larger Korean branch. Hiroyuki speaks very little Korean while Akio has a conversational knowledge of Korean.

It is not a well known fact in Japan that the founder and CEOs of Lotte are of Korean descent.

SHIGEMITSU Takeo's younger brother SHIN Chun-Ho is the founder of Nongshim, which makes Shin ram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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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1861 – 1865)이 한창 진행중이던때 미국 남부주들은 전쟁이 끝난 뒤 중남미를 침공, 병…

미국 남북전쟁(1861 – 1865)이 한창 진행중이던때 미국 남부주들은 전쟁이 끝난 뒤 중남미를 침공, 병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북부와의 휴전을 통해 두개로 갈라진 국가가 될 경우에 대비해 중남미를 흡수해서 방대한 국토와 인구로 공업이 전무한 남부의 국가경쟁력을 보완하려는 계획이었다. 남부주들은 북부의 간섭없이 노예제도를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영토를 원했고, 아직 국력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안정이 되지 않은 멕시코, 브라질 등은 점령당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빈땅으로 보였다.

남부주들은 전쟁중에 멕시코에 첩보원들을 보내 민란을 일으켜보려고 하기도 하고, 브라질 아마존 강 유역을 정탐할 첩자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전쟁에서 지면서 다 헛일이 되고 말았다. 앞에 먼저 브라질에 침략경로를 살펴보러 갔던 남부 미국인들은 결국 남부 골수 노예주의자들이 망명할 땅을 알아보는 일을 하게 됐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866년에 아직 노예제도가 합법이던 브라질 상 파올로주에 적게는 10000명에서 많게는 20000명의 남부 미국인들이 망명해서 아메리까나라는 도시를 이뤘고, 일부는 지금까지 살고 있다.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부인의 종조부도 그때 브라질로 망명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카터도 조지아 주 주지사 시절에 아메리까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논란이 된 남부기를 브라질의 아메리까나 시에서도 한동안 사용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Confedera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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