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V. 뎁스
미국 대선에 1900년부터 1920년까지 다섯 번 출마한 사회주의자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출마하고 주목 못 받고 사라지고, 이게 아니고 최대 6%까지 표를 얻었다. 사회당 소속으로 계속 출마하며 진보의 가치를 주창했다.
당시 미국의 사회주의/진보주의 계열 정당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거나 다수가 되는 건 힘들거나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인식하고, 선거를 자신들의 가치관을 전파하고 광고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 결과 정권을 잡은 적은 없지만 이들이 주장하던 사회보장제도, 최저임금제, 주 40시간 노동, 어린이 노동착취 금지 등의 개념을 주류 미국인들의 의식에 주입시키는데 성공했고, 주류 정당들이 어쩔 수 없이 강령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정권을 한 번도 못 잡고 냉전의 시작과 함께 사라져 갔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목표했던 정책들은 다 정착된 후 였다. (정의당, 듣고 있나). 소수파 정당 운동의 교과서적 케이스로 꼽힌다.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니고 진짜 일부 주 교과서에 나온다. 사실 나도 미국에서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웠다.
유진 뎁스는 지금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여중인 버니 샌더스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의 지역구 버몬트 사무실에도 유진 뎁스의 사진이 걸려있다. 버니 샌더스도 평생을 일관성있게 같은 주장을 해온 사람이고, 2016년에 민주당 대선 후보로 주목 받으면서 시급 15불(현 연방 최저임금은 시급 7.25불) 같은 요구를 계속해서 아마존 같은 대규모 고용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공공의료체제, 대학 등록금 융자 채무 탕감하기 등을 주장하고 일반 미국인들로 하여금 "… 왜 아직 이런 제도가 없는거지?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부자 나라 아니였나?"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고 있다.
민주당 기득권 층의 눈물겨운 노력/강압에 의해 샌더스의 경선흥행은 이미 끝난 걸로 보인다. 물론 전체 경선의 절반도 안 끝난 상황이라 바이든이 꽤 자주 하는 말실수나 다른 변수에 의해 뒤집힐 수도 있지만, 지금 통계학자들의 의견은 99 대 1의 확율로 바이든의 경선 승리가 점쳐진다. 심지어 본선에서는 샌더스가 트럼프를 쉽게 제압하고, 바이든은 살짝 뒤지는 여론조사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2016년에도 그랬지만 샌더스 지지자들은 민주당 기성 후보들 싫어해서 본선에서 투표 안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샌더스가 이렇게 잘 나가다가 민주당 지도부가 밀실합의로 중도후보군을 싹 정리하고 진보후보 중 약체를 강력하게 밀어서 진보표를 분산시키는 무리수로 사실상 샌더스의 민주당 대선 후보지명 기회를 빼앗은 게 2016년 이어 두번째다. 미국 진보 유권자들은 지금 화가 날만큼 나있다. 실제로 2016년에는 샌더스 지지층의 10% 가까이가 트럼프를 찍었다. 일방적으로 힐러리를 밀어주는 "심판" 민주당 지도부에 너무 분노해서.
샌더스가 노구를 이끌고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해서 진보의 가치와 미국의 참담한 현실을 일깨우는 작업을 하는 거라고 보면 경선에 지건 이기건 대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근데 그런 의미에서 경선이 끝나기 전에 한가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바이든과 정책합의를 통해 공공의료, 대학 무료, 등의 정책 중에 하나를 보수 바이든이 받아들이게 하고 서로 손잡는 모습을 연출하는 거다. 바이든, 민주당, 그리고 반-트럼프 성향의 국민들 입장에서는 민주당의 진보층이 선거일에 투표소를 멀리해서 트럼프에게 유리해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고, 샌더스는 백 년 전 유진 뎁스처럼 미국을 좀 더 상식적인 나라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생애 중에 직접 이뤄낼 수 있다.
물론 샌더스가 끝까지 바이든과 싸워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를 쓰는 것도 아직 불가능은 아니고, 그게 지지층이 오히려 바라는 바이니까, 바이든과 민주당도 정신차리고 합의에 임해야 한다. 경선은 아직 많이 남았고, 더 중요한 건 조만간 처음으로 바이든-샌더스 토론이 있다. 바이든으로 후보 정리하고 본선에 나가려면 토론 전에 합의 하는게 좋다. 토론 후에는 샌더스가 바이든 지지 선언을 해도 안 될 정도로 바이든이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오바마 정권 8년 간 부통령으로서 오바마 옆에 서 있으면서 이미지 세탁이 아주 잘 됐지만, 바이든은 여전히 입만 열면 금융규제완화, 공공의료반대 주장이 저절로 나오는 강경보수파다. 70-90년대에는 사실상 공화당과 함께 투표하는 빨간(공화당 색) 민주당의원이었고, 이후 민주당의 세대교체에서 선두주자가 되면서 중도진보정당이던 민주당을 신자유주의 정당으로 탈바꿈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샌더스가 갑자기 어떤 색다른 주장을 들고 나와서 선풍이 분게 아니라 미국의 양극화 상황이 너무 안 좋아져서 항상 같은 말을 하던 샌더스가 주목 받는 지금 상황에서,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오는 사람에게 이건 큰 약점이다.
게다가 바이든은 그 동안 나온 #미투 고발자만 모아서 광고 띄워도 바로 침몰할 가능성이 있다. 그 광고를 본선에서 트럼프 캠프에서 제작할지, 이번에 샌더스가 토론 중에 전국민에게 말로 설명해 줄지의 차이는 매우 크다.
바이든의 계획은 아마도 진보층을 교란해준 워렌을 부통령으로 지명해서 진보층을 달래려는 것일거고, 그건 워렌이 경선포기하자마자 민주-중도-보수 성향의 일간지들이 일제히 "미국 정치의 상식을 다시 썼다!" "여성혐오의 피해자" 등등 워렌을 추켜세우는 사설로 응답하는 걸 보면 확연해진다. 수퍼 화요일 직전에 "버니를 막으려면 빨리 중도 단일화를!"이라고 매일 사설 쓰던 신문들이다. 워렌도 경선 포기 후 잠수타고 있다. 인터뷰라도 했다가는 왜 샌더스 지지 선언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 받을 테니까.
따라서 바이든이 워렌으로 진보표 가져가기는 힘들거다. 차라리 샌더스와 타협해서 안정적으로 트럼프를 누르고 한가지라도 복지정책을 받아들이는게 최선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왕이면 공공의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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