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안 될 김문수에 조롱했다가 급 숙였다가. 실속없는 일에 참 열심이긴 함.
어차피 안 될 김문수에 조롱했다가 급 숙였다가. 실속없는 일에 참 열심이긴 함.


어차피 안 될 김문수에 조롱했다가 급 숙였다가. 실속없는 일에 참 열심이긴 함.


검찰의 시작은 일본제국의 조선 침략과 함께.


일본에도 임꺽정같은 인물이 있다. 에도 시대에 부자들에게서 돈을 훔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도적 이시카와 고에몬이다.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 후손인데 이가 닌자들과 함께 살며 닌자가 됐다가 도적이 됐다는 말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을 털다가 잡혀서 죽었다. 죽을 때 어린 아들과 함께 끓는 기름 솥에 던져저 죽었는데, 아들을 머리 위로 들고 최대한 오래 버티다 둘 다 죽어서 의적 뿐 아니라 이상적인 아버지상으로도 받아들여진다 한다.


이재명 후보 선거운동중인 진보당 전 울산시의원 천병태 & 이은주. 이걸 시작으로 기본소득당&조국혁신당과 함께 굳건한 야권연대가 태어나길.



53년부터 91년까지 800번의 핵실험을 했던 네바다 사막. 오늘날도 그대로 있다.


안쓰럽다. 근데 그래도 찍어줄 30%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안 안쓰럽다.


손글씨로 쓰는 글과 타이핑해서 작문한 글이 다를 수 있다. 맛이 다르다던가.. 근데 근본적으로 글을 쓰는 행위인 것은, 의미를 표현하고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목표인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연구하던 시절과 구글로 검색하면 되는 시절과 AI에 물어 연구하는 시절이 다른 건 당연하다. 근데 얼마나 다른 걸까.
도서관에서 구글로의 전환 시기에도 사람들이 바보가 될거라는 예측과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연구 방식이 쉬워져도 연구 주제는 연구자가 생각해내야 한다. 사는 지역의 제한된 자료를 몇주 간 찾아 글 쓰는 법을 연마해 연구해야하던 시절에서 전세계의 모든 자료를 1초만에 검색할 수 있게 된 시절로 전환한 결과는 인간 문명의 급성장이었다. 발표된 논문 수에서 알 수 있다. 인류의 지식양과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생각해낸 100가지 아이디어 중 예전에는 평생 5가지 정도를 연구할 수 있었다면 구글 이후에는 20가지 연구가 가능해졌다.
그럼 직접 구글로 자료를 찾은 뒤 그 자료들을 분석해 세상에 전에 존재하지 않던 의미있는 결론을 추출하는 사람과 AI로 그냥 세상에 전에 존재하지 않던 의미있는 결론을 추출하는 사람의 차이는 뭘까. 이제 막 겨우 태동한 AI는 이미 세계 최고 석학에게 몇주 간 용역 준 수준의 결과물을 10분 만에 내놓는다.
구글에서 AI로의 전환은 모두를 문맹으로 만들까, 다시 한 번 문명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올까.

골드만삭스가 바이오테크 사업체 분석 페이퍼에서 '환자를 완치하는 게 지속가능한 사업모델인가'라고 자문. 사업 옵션 1은 수익이 줄지만 환자들이 완치되고 사업 옵션 2는 환자들이 계속 약이 필요해서 수익이 증가하는 상황이라면 인간은 하면 안되는 저 질문을 사업체는 하게 돼 있다. 그래서 예술가가 사업에 도전해 성공하는 경우는 있어도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하는 사업가가 갑자기 돌아서서 하는 사랑노래에 사람들이 관심주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은 고층빌딩 수에서 세계 6위. 인구당 고층빌딩 수로는 9위. 인구 천만 미만 국가를 제외하면 3위. 백만명 당 고층빌딩 수: UAE – 36.09 Monaco – 25.61 Qatar – 19.58 Singapore – 16.39 Panama – 15.45 Bahrain – 12.05 Malaysia – 8.72 Australia – 5.82 South Korea – 5.37 Kuwait – 3.64 인구 천만 이상인 국가에서 백만명 당 고층빌딩 수: Malaysia – 8.72 Australia – 5.82 South Korea – 5.37 Canada – 3.55 Israel – 3.15 United States – 2.65 Japan – 2.24 China – 2.23 Taiwan – 2.09 Thailand – 1.90



큰 전쟁, 특히 단순한 자원 확보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생사를 건 전쟁 이후에는 ‘후속 처리’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제국을 예전처럼 14개의 국가로 분할해 힘을 약화시키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그것을 추진할 동력은 부족했다. 그 결과, 독일은 다시 부활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2차대전 후 독일을 어떻게 ‘거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는 수십 가지 방안이 나왔다. 프랑스나 폴란드가 독일 영토를 분할 점유하는 제안도 많았지만, 과거 나폴레옹 시절처럼 프랑스에 힘이 집중되는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결국 현실에서는 독일을 4개 구역으로 나누는 안이 채택되었다. 서북부는 영국, 서남부는 프랑스, 동북부는 소련, 동남부는 미국이 각각 관리했다. 이후 소련이 점령군 철수를 거부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의 관할 구역이 미국 쪽에 합쳐지고,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일본도 비슷한 구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홋카이도와 도호쿠는 소련, 혼슈는 미국, 주고쿠와 규슈는 영국, 시코쿠는 중국, 오사카는 영국과 중국의 공동 관리, 도쿄는 국제공동구역으로 설정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미국이 전 지역을 군정하에 두고, 아시아의 핵심 군사기지로 삼았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군사적으로 중성화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소련과 경제체제 경쟁 때문에 경제적으로 두 나라가 미국에 도전이 가능할 수준까지 성장하는 것을 방치했다. 1차대전 이후 독일은 분할을 피했지만,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은 그러지 못했다. 대부분의 제국들은 강력한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국가적 정체성과 회복력을 유지했지만, 이미 다민족 제국으로 구성되어 있던 오스만 제국은 달랐다. 패전 후 군사력과 정치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열강에게 분할되기 쉬운 ‘사냥감’이 되었다. 19세기 내내 유럽 열강에게 조금씩 영토를 잃어왔던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 직후 완전히 해체되었고, 현재 튀르키예의 땅 역시 앙카라 주변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영국 등이 분할 점령했다.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저항과 개혁으로 현재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이나 협상을 통한 영토 변경은 흔한 일이었고, 보통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협상이 이뤄졌다. 하루아침에 독일인이 러시아인이 되는 일도 가능했고, 몇 세대에 걸쳐 자신이 어느 나라 국민인지 모르는 시골 주민도 많았다. 그러나 유엔이 창설되고 핵무기가 등장하면서, 노골적인 영토 전쟁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UN 헌장 제2조 4항은 무력에 의한 영토 획득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물론 줄어들었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식민 열강과 소련의 해체 외에도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 전쟁, 중국의 티베트 병합,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의 전쟁 등이 있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중심의 양극 체제가 형성되면서, 핵무기 억지력으로 인해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한국전, 베트남전처럼 ‘대리전’이 많았고, 그만큼 영토 변경은 상대적으로 드물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