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June 2025

신기하네. 김민석 정청래 둘 다 성결교회 집사들. 김민석은 기성이고 정청래는 나성인듯. 성결교회는 교회사…

신기하네. 김민석 정청래 둘 다 성결교회 집사들. 김민석은 기성이고 정청래는 나성인듯.

성결교회는 교회사에서 보면 감리교와 순복음 사이에 있는 교파. 둘 다 복음주의 종파지만 방언 등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순복음과 달리 성결은 윤리, 성화 등을 더 강조.

첫임기 끝에 시도한 친위쿠데타가 미국 군부의 협조 거부로 실패했던 트럼프는 이번주 자신의 생일에 맞춰 미군의…

첫임기 끝에 시도한 친위쿠데타가 미국 군부의 협조 거부로 실패했던 트럼프는 이번주 자신의 생일에 맞춰 미군의 행진 행사를 벌여 자신 개인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바로 두주 뒤면 독립기념일이라 그때 했으면 덜 북한스러웠겠으나 꼭 자신의 생일에 행진을 요구했다. 군에서 명령을 따르긴 했으나 미사일, 최신 무기 등으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는 행진이 아니라 미군 군복 디자인의 변화 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공연이었고 트럼프는 거의 졸다시피했다. 군은 아직 트럼프 편이 아닌 것 같다.

2019년, 미국은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이 조치는 단순히 하나의 기업을 겨눈 것이 아니라, 중국…

2019년, 미국은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이 조치는 단순히 하나의 기업을 겨눈 것이 아니라, 중국의 첨단 기술 산업 전체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너무 늦었다. 중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반도체 자립과 독자 노선을 준비해왔고, 제재는 오히려 내부 결속과 기술 내재화를 가속하는 계기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SMIC와 YMTC 같은 기업들이다. 미국의 압박 이후에도 SMIC는 자체 7nm 칩을 생산했고, YMTC는 3D NAND 분야에서 독자 기술로 미국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다. 화웨이는 TSMC 없이도 자체 스마트폰용 칩을 설계해 양산 가능한 체계를 만들었고, 샤오미는 AI 반도체 분야에서 공격적으로 고성능 모바일 칩 시장에 진입했다. ASML을 대체하려는 시도도 본격화됐다. 상하이의 SMEE는 28nm DUV 스캐너를 상용화했고, EUV 장비 개발에도 착수했다. 반도체 장비 스타트업 사이캐리어(SiCarrier)는 2024년 세미콘 차이나에서 식각, ALD, 계측 장비 등 다양한 공정을 아우르는 제품들을 선보였고, 자체 SAQP 공정을 통해 DUV 기반 5nm 제조 가능성을 시사했다. 한편 상하이광학미세기계연구소는 EUV 광원 플랫폼을 개발했고, 중국은 동관 등지에서 자체 EUV 장비 시제품 테스트를 진행 중이며, 일부는 2026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AI 분야에서도 중국은 독자적 해법을 찾고 있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최신 NVIDIA 고성능 칩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은 막대한 수의 고학력 인재와 낮은 인건비를 기반으로 대형 모델을 훈련시키고 있다. 대표 사례가 DeepSeek이다. 자국 서버, 국산 또는 중급 GPU, 저비용 연구 환경을 활용해 OpenAI나 Google에 근접하는 성능의 LLM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재와 시간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지만, 무시못할 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에 인재 유출까지 겹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함께 시작된 유학생 비자 제한과 추방 정책은 미국의 전통적 기술 우위의 기반이던 글로벌 인재 풀을 흔들었다. 한때는 당연하던 유학과 연구 인재의 미국행이 점차 줄어들고, 일부는 중국으로 선회하고 있다. 중국은 귀환 인재와 외국 전문가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전방위적 투자와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미국이 이런 기술 봉쇄 전략을 10년만 앞당겼더라면 상황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반도체만이 문제가 아니다. EV, AI, 재생에너지, 우주개발, 기초과학, 무역흑자 등 거의 모든 전략 분야에서 중국은 이미 따라잡았거나 추월 중이다. 화웨이 제재는 미국이 기술 패권을 방어하기 위한 첫 시도였지만, 지금의 대응은 구조적 우위를 복원하기엔 너무 늦었고, 중국은 이미 제재를 견디는 국면을 넘어 그 제재를 성장의 촉매로 삼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국을 적시에 견제하지 못한 실패는 기술 패권 경쟁을 넘어 전 지구적 군사안보 질서까지 흔들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시간과 유연성을 갖고 전략을 조율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전쟁이 자꾸 난다. 미국은 이제 갈등을 회피하거나 외교적 절충으로 해결하려는 전략보다, 직간접적인 개입과 무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무기 및 전쟁 자금 제공,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에 대한 묵시적 혹은 명시적 지원은 그 신호다. 이는 미국이 경쟁국 견제에 있어 더 이상 군사적 옵션을 ‘최후의 수단’이 아닌, ‘선제적 전략 선택지’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압박은 대만 해협에서 더욱 위험한 형태로 드러난다. 기술 격차로 중국을 묶어둘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질수록, 대만이라는 전략적 거점을 사용해 중국의 안정을 깨려는 미국의 강경책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것은 외교나 무역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군사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적 긴장이다. 미국의 타이밍 실패는 단지 경쟁의 판을 놓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전쟁의 문을 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제국과 정복자들은 단순한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는 새로운 법체계와 행정시…

제국과 정복자들은 단순한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는 새로운 법체계와 행정시스템을 정복지에 이식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얻은 땅을 오래 지배하려면 칼보다 체계가 필요했고, 법은 그 핵심 도구였다.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에 프랑스 민법전, 즉 나폴레옹 법전을 퍼뜨렸다. 이 법전은 봉건적 특권을 철폐하고 재산권과 계약의 자유, 법 앞의 평등 같은 근대적 가치를 담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뒤에도 그가 세운 법과 제도는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동유럽 곳곳에 남았다. 무력으로 만든 제국은 무너졌지만 법으로 만든 질서는 남아 근대 유럽의 기초가 되었다. 징기스칸도 다르지 않다. 그는 단지 유목민의 무자비한 정복자가 아니라 ’야사(Yassa)’라는 공통 법체계를 통해 동서 유라시아의 광대한 영역에 통일된 질서를 부여했다. 야사는 군율, 외교, 도로, 조세, 종교 자유까지 다뤘고, 이는 다양한 민족을 다스리기 위한 일종의 초국가적 헌법이었다. 몽골 제국은 야사를 통해 수많은 부족을 하나의 제국 시스템에 통합했다. 알렉산더 대왕 역시 단순히 도시를 세운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를 확산시키며 기존의 법과 제도를 통합·조율하는 방식으로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가 정복한 지역에서는 그리스와 지역 법률이 절충되며 새로운 복합 법질서가 형성되었고, 이는 후에 로마제국 법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정복자의 성공은 무력의 순간이 아니라, 그 뒤에 남기는 제도화된 질서에 달려 있다. 혼란을 끝내고 예측 가능한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법은 제국의 언어다. 결국 제국이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은 국경이 아니라 규칙이다. 이 점에서 한국이 곧 마주할 개헌 과제는 단지 국내 정치의 일정이 아니다. 개헌은 대한민국 시스템 전반을 재정비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국가적 작업이다. 중진국을 넘어 글로벌 강대국으로 부상하려는 한국에게, 시대에 맞는 헌정 구조와 통치 시스템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더 나아가,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파장을 줄 수 있는 움직임이다. 세계는 점점 블록화되고 있고, 각 지역은 중심국을 기준으로 새로운 질서를 짜고 있다. 동아시아의 정치·경제·외교 구조는 한국이 어떤 국가 시스템을 갖추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개헌은 한 나라의 제도 정비를 넘어, 아시아 질서 재편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이 개헌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도약이 될 것이다. 개헌은 과제가 아니라, 미래로 가는 길을 그리는, 사실 굉장히 신나는 일이다.

이스라엘 중도우파를 포함한 우파들이 미는 아이디어 중에 “大이스라엘” Greater Israel 이라는 게…

이스라엘 중도우파를 포함한 우파들이 미는 아이디어 중에 "大이스라엘" Greater Israel 이라는 게 있는데, 쉽게 말해 할 수 있으면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흡수하고나서 요르단과 시리아, 레바논 등을 합병하는 계획이다. 네탄야후 정권의 장관들도 공공연하게 거론하던 계획이다. 원래는 창세기 15장 18절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나오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이라크 중간까지가 신이 자신들에게 준 땅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복 후에는 당연히 무슬림 거주민은 추방되거나 학살된다. 현재도 이스라엘 국민 20%는 아랍 무슬림들이지만 아랍계 정당들은 의회에서 소외당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투표권이 없다. 이스라엘이 비유대인 토착민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며 중동을 정복할 방법은 없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장을 허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 지역에서 이스라엘 혼자만 핵을 보유해야 이 계획 시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란은 중동 패권에 지분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중동을 먹게 두지 않는다. 같은 무슬림 국가고 핵보유국이지만 파키스탄은 중동에 관심이 없다. 팔레스타인인 학살과 이란 폭격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라크는 단순한 중동의 한 국가가 아니다. 그 땅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

이라크는 단순한 중동의 한 국가가 아니다. 그 땅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이른바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최초의 도시 국가들—수메르, 아카드, 바빌론, 아시리아—가 탄생한 자리이며, 이후에도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 시기 이슬람 문명의 수도로서 세계 최대의 도시이자 지식과 문화, 정치의 중심이었다. 인류 문명의 기원이자 이슬람 황금기의 심장이었던 이 지역이 오늘날처럼 혼란과 분열의 상징이 된 것은 단지 내부 문제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유럽 열강 특히 영국은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추진했다. 하나는 오스만의 부활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스만이 지배하던 주요 지역들, 특히 바그다드 일대를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로 다시 세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영국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민족과 종파가 혼재한 지역—쿠르드족이 주로 사는 북부 모술, 수니 아랍이 중심인 바그다드, 시아파 아랍이 다수를 차지하는 남부 바스라—를 억지로 하나의 나라로 묶어 '이라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중동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코 스스로 통합되거나 강해질 수 없는 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조치였다. 오늘날 이라크 중심으로 중동을 민족별로 지도로 그려보면 이 전략의 정교함이 보인다. 북쪽에는 쿠르드족이, 남쪽에는 시아파 아랍이, 중앙에는 수니파 아랍이, 동쪽 국경에는 이란계 부족이, 서쪽 국경에는 수니파 부족이 있다. 여기에 종교와 종파가 교차하고, 석유 자원은 주로 쿠르드 지역과 시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바그다드 중심의 중앙정부는 늘 자원과 종족 통합의 문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라크가 '하나의 국가'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국가 존속의 핵심인 물 자원과 해상 접근권까지 구조적으로 제한해 놓은 점도 중요하다. 이라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답게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라는 거대한 강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 모두 발원지가 이라크 외부에 있다. 튀르키예(터키)와 시리아, 이란이 상류를 장악하고 있으며, 댐과 수로 개발을 통해 이라크 하류의 수량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유프라테스 수위가 줄어들면 농업, 전력, 식수는 물론 정치적 안정성까지 위협받는다. 국토 내에 강이 있어도 그 통제권을 외부에 넘겨준 상태에서, 이라크는 물 주권이 없는 나라나 다름없다. 또한 바다에 면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실질적으로 내륙국가(landlocked)처럼 설계되어 있다. 이라크의 해양 관문은 단 하나, 남쪽 끝의 좁은 항구 도시 움 카스르(Umm Qasr)뿐이다. 쿠웨이트와 이란 사이에 끼어있는 그 좁은 출구는 전략적으로 취약하고 확장성도 없다. 한때 바그다드가 바다를 향해 직접 소통하던 문명의 중심이었던 것에 비하면, 현재의 이라크는 스스로의 수출입 경로조차 확보하지 못한 구조다. 유럽 식민 전략은 이라크를 물길과 바닷길 모두에서 고립시켜, 제국이 다시 태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 이런 식의 전략은 이라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은 중동과 아시아 전역에서 잠재적 대국이 될 수 있는 지역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봉쇄해왔다. 튀르키예는 오스만의 후예로서 유럽의 동방 국경을 위협했던 존재였고, 지금도 나토 내부에서 불편한 변수로 취급된다. 이란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로서 지정학적 허브 역할을 해왔기에, 항상 경제 제재와 국제 고립의 대상이 된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유라시아를 연결하려 하지만, 서방은 홍콩, 위구르, 대만 등을 지렛대 삼아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초대국이었기에, 냉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고 있다. 이 모든 지역의 공통점은, 과거 제국의 심장이었고 지금도 그 잔재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다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묻지마 전폭지원하는 이유도 중동 견제 목적이 매우 크다. 이라크는 이 제국 봉쇄 전략 중 가장 성공적이고 최악에 해당된다. 바그다드는 인류 문명의 원점이자 이슬람 세계의 중추였기에, 다시는 그 중심이 되지 못하도록 세계질서 속에서 가장 철저하게 분열되고 고립된 구조로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라크의 혼란은 실패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정교하게 실패하도록 설계된 국가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라크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 더 고생하게 되어있다. (사진은 8세기 바그다드 모습)

페르시아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진정한 제국’이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을 하나의 중앙집권 아래 통…

페르시아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진정한 제국'이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을 하나의 중앙집권 아래 통치하고, 도로를 깔고, 공용어를 정하고, 조공과 병역 체계를 운영하며,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통합된 질서' 아래 공존시킨 최초의 국가였다. 그 전까지의 지배는 정복이었고, 약탈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통치였다. 정복 후에 남은 것은 폐허가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이후 등장하는 거의 모든 제국—로마, 이슬람, 몽골, 오스만, 심지어 대영제국까지—페르시아의 흔적을 피할 수 없었다. 행정, 군사, 법, 문화의 틀을 생각할 때, 페르시아는 '제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원형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건, 이들이 거의 항상 그 지역의 맹주였다는 사실이다. 산맥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이란 고원은 방어가 쉽고 점령이 어려운 지정학적 요새였고, 이 지형은 수천 년 동안 페르시아가 반복적으로 제국의 형태로 부활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페르시아가 약해졌을 때는 예외 없이 '지정학적 대전환'이 발생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내부에서 붕괴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다리우스 3세가 강력한 통치자였고 지방 총독들의 충성도가 유지되고 있었다면, 알렉산더는 아나톨리아에서 멈췄을 것이다. 이슬람의 급속한 확산 또한 사산조 페르시아가 비잔틴과의 수십 년 전쟁으로 고갈되고, 황제가 수차례 바뀌며 내전으로 와해된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성했던 페르시아였다면,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몽골 또한 마찬가지다. 호라즘 제국이 안정적이고 통합된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징기스칸은 몽골 부족의 통합조차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열과 오만은 몽골 세계 제국의 급부상을 가능케했다. 결국 페르시아가 약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많은 '대전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약화는 곧 다른 무엇의 부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런 시점에 와 있다. 이란은 지정학적으로 여전히 난공불락의 고원 위에 있지만, 내부는 심각하게 불안정하다. 경제는 제재와 부패로 무너졌고, 사회는 오랜 독재, 젠더와 세대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다. 체제는 종교적 권위에 기반하지만, 젊은 층은 탈종교와 서구화를 향해 걷고 있다. 이란이 계속해서 약화된다면, 역사적 패턴은 반복될 것이다. 오스만의 후예를 자처하며 군사력을 키우고 있는 튀르키예가 다시 동쪽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과 연합하며 지역 맹주를 넘어 제국 재건에 나설 수 있다. 러시아는 카스피 해를 넘어 남하하려 할 것이고, 중국은 '일대일로'의 안정적 교두보 그리고 미국의 중국 봉쇄 우회로로 이란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미국은 이란 붕괴를 틈타 새로운 중동질서의 재편을 시도할 것이다. 역사적 교훈을 기억하는 열강과 신흥 세력들은 이 기회를 통해 패권을 노리게 된다. 그러나 만약 (어쩌면 패전 후) 이란이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개방'을 선택한다면? 이란은 다시 한 번 '페르시아'로 부활할 수 있다. 서구화와 개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민족 정체성, 풍부한 자원, 고대 제국으로서의 문화적 자부심, 시아파 이슬람의 맹주 지위, 지정학적 중심지로서의 위치, 그리고 고원이라는 천연 요새는 이란을 다시금 경제적·군사적·문화적 패자로 만들 수 있다. 페르시아는 수천 년 동안 망하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했고, 때로는 가면을 썼지만, 사라진 적은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란은 또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 전환이 내부로부터의 부활이 될지, 아니면 또다시 외부로부터의 침투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캄브리아기 이전의 생명은 단조로웠다. 눈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내장도 없고, 혈관도 없고, 뼈도 없었다….

캄브리아기 이전의 생명은 단조로웠다. 눈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내장도 없고, 혈관도 없고, 뼈도 없었다. 생명이라기보다는 젤리 같거나, 해파리 비슷하거나, 바닥에 붙어 있는 납작한 조각들에 가까웠다. 움직임은 거의 없었고, 보는 것도 먹는 것도 느끼는 것도 전부 수동적이었다. 이 고요한 세계를 뒤흔든 것이 약 5억 4천만 년 전 시작된 ‘캄브리아기 대폭발(Cambrian Explosion)’이다. 짧게는 2천만 년, 길게 잡아도 3천만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지구에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생명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눈을 가진 생물이 등장했고, 팔다리를 휘둘러 헤엄치고 기어다녔으며, 입과 항문을 통해 먹고 배설하고, 소화기관이 생기고, 혈관과 심장이 생기며 산소를 온몸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외골격과 내골격이 발달하면서 몸을 보호하고 구조화하는 기능도 처음 등장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생명은 처음으로 본격적인 감각기관, 이동수단, 소화 및 순환기관 등 생명체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갖추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눈을 갖는다는 건 처음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고, 팔다리가 생겼다는 건 처음으로 스스로 길을 만들고 방향을 선택한다는 것이며, 내장과 순환계가 생겼다는 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시스템’을 생명이 갖추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캄브리아기 이후, 진화는 본격적으로 방향을 잡는다. 삼엽충이 바닥을 기어다니고, 아노말로카리스가 최초의 포식자로 군림하며, 오파비니아는 다섯 개의 눈을 달고 세상을 관찰했고, 할루시게니아는 다리가 위인지 아래인지조차 알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생존을 시도했다. 생명이 단순한 구조물에서 벗어나 복잡한 기계이자 주체로 변모한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단지 생명체가 복잡해졌다는 것을 넘어서, 생명이 비로소 세상을 감각하고, 그 감각을 바탕으로 반응하고, 그 반응을 통해 생존 전략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캄브리아기 이전의 생명은 단순했다. 그 단순함이 평화로웠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 이후의 혼란과 경쟁, 그리고 다채로움 위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의 뇌 역시 그 짧은 폭발 속에서 처음으로 설계도가 그려졌는지도 모른다. 진화는 언제나 점진적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방향을 꺾고, 속도를 높이고, 폭발하듯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캄브리아기 이후 지구를 통해 우주는 스스로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