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July 2025

신토(神道)는 일본 전국에서 고르게 퍼져 있으며 지역별 편차가 거의 없다. 사이비라고도 불리는 신흥 종교들은…

신토(神道)는 일본 전국에서 고르게 퍼져 있으며 지역별 편차가 거의 없다. 사이비라고도 불리는 신흥 종교들은 조직적으로는 활발하지만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다. 일본에서 지역별로 분포가 뚜렷하게 나뉘는 것은 불교 종파들이다. 일본에서 가장 세력이 큰 불교 종파는 단연 정토진종(浄土真宗, じょうどしんしゅう)이다. 신란(親鸞)이 1224년에 (가마쿠라 중기) 창시한 이 종파는 전국에 약 4,800만 명의 자칭 신도를 보유하며, 불교계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특히 홋카이도(北海道), 호쿠리쿠(北陸), 긴키(近畿) 지역에 강세를 보이고, 오타니파(大谷派)와 혼간지파(本願寺派)로 양분되어 있다. 신란은 정토종(浄土宗, じょうどしゅう) 승려 호넨(法然)의 제자였고, 스스로 환속하여 결혼한 재가 불자로서 살아가며 염불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설파했다. 이 재가 중심의 불교는 일본의 장례문화와 결합해 강력한 대중 기반을 형성했다. 한국 불교에는 없는 절대 타력 의존적 신앙이며, 결혼한 승려가 일반화된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정토진종의 모체인 정토종은 호넨이 1175년에 (헤이안 말기) 창시했다. 신도 수는 약 600만 명이며 전국적으로 퍼져 있으나 정토진종만큼 지역적 집중도는 크지 않다. 호넨은 천태종(天台宗, てんだいしゅう) 출신으로,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송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는 기존 수행 중심 불교에 대한 파격적 대안이었다. 정토진종과 달리 출가한 승려는 결혼하지 않는다. 한국 불교는 염불을 수행 일부로 보지만, 정토계열처럼 그것만으로 구원을 단정하지 않는다. 니치렌계(日蓮系)는 신도 수만 보면 약 1,000만 명 이상으로 정토종보다 많다. 1253년에 (가마쿠라 중기) 일련종을 창시한 니치렌(日蓮, にちれん)은 평민 출신으로, 천태종에서 출가해 법화경(法華経) 이외 모든 경전을 배척하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経)’만을 염송하도록 했다. 주요 기반은 도쿄(東京)와 가나가와(神奈川)를 포함한 간토(関東) 지역에 있으며, 신도 수는 많지만 정통 불교 교단 체계 내에서의 교세나 사찰 수로 보면 정토계보다 약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계열에서 현대에 들어 창가학회(創価学会, そうかがっかい) 같은 신흥 세력이 출현했고, 전후 일본 정치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자민당 정권의 공동정부 파트너 공명당(公明党)이 창가학회의 정당이다. 특히 창가학회는 오키나와(沖縄)에서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교리적으로는 가장 배타적이며, 정치성과 대중 동원력이 강하다. 한국 불교와 달리 강한 교조성과 선민의식을 갖는 점이 뚜렷하게 이질적이다. 조동종(曹洞宗, そうとうしゅう)은 도겐(道元)이 1227년 (가마쿠라 초기) 중국 조동선에서 배워온 좌선 중심의 선종이다. 신도 수는 약 530만 명이지만, 사찰 수는 일본에서 가장 많다. 도호쿠(東北) 지방과 지방 소도시에 널리 분포한다. 특징은 오직 좌선만을 수행으로 삼는 ‘지관타좌(只管打坐)’ 전통이며, 공안이나 언어적 개입 없이 조용한 참선을 중시한다. 한국 조계종과는 선 수행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한국은 임제종 기반이라 공안이 핵심인 반면 조동종은 수행 방식이 훨씬 단순하고 묵묵하다. 임제종(臨済宗, りんざいしゅう)은 에이사이(栄西)가 1191년에 (가마쿠라 초기) 중국에서 들여온 선종으로, 조동종보다 언어적 방편과 공안 수행에 무게를 둔다. 신도 수는 약 450만 명으로 조동종과 유사하며, 전국적으로 퍼져 있으나 수도권보다는 간사이(関西) 이남에서 흔하다. 좌선과 선문답이 균형을 이루며, 선 수행과 무도, 다도 문화와의 연결이 깊다. 한국 조계종과 가장 유사한 계열이지만, 일본에서는 정토계열에 밀려 대중성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진언종(真言宗, しんごんしゅう)은 밀교 계통으로, 구카이(空海)가 816년 (헤이안 초기) 당나라에서 밀교를 배워 돌아와 일본식 밀교로 정착시켰다. 신도 수는 약 550만 명이며, 고야산(高野山)을 중심으로 긴키와 시코쿠(四国) 지역에서 강세다. 주술과 진언, 만다라, 불화, 불상, 호마(火供) 등의 화려한 의식 중심 전통은 한국 불교에선 거의 사라진 요소들이다. 특히 국가 제사와 결합한 경향이 강하며, 실용적인 치병과 복을 비는 목적도 뚜렷하다. 천태종은 사이초(最澄)가 806년에 (헤이안 초기) 창시했으며, 신도 수는 약 280만 명으로 비교적 적지만 교리적 기반은 깊다. 후쿠시마(福島)나 이바라키(茨城) 등 간토 북부와 도호쿠 일부 지역에 영향력이 있다. 원융불교를 지향하며, 선·염불·계율·밀교를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정토종과 니치렌종의 창시자 모두 천태종 출신일 정도로 많은 종파의 원류가 된다. 한국 천태종과 교리적으로 유사하지만, 일본에서는 전통 지식 중심 종단에 가까우며 대중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한국 불교에 비하면 수행보다 염불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정토진종 외에는 모두 출가 승려의 독신을 강조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 정책에 의해 모든 승려의 결혼이 가능해졌고 실제로 승려 가문에 의해 사찰이 대를 이어 자녀들을 통해 교육/승계/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신불분리 정책은 불교의 종교로서의 위엄을 줄이고 신토로 그 중심을 옮기려는 시도였다. 원래 천태종과 진언종이 아마테라스를 비로자나불(大日如来)로 간주하며 교리에 포함시키고 신불습합을 추구했다. 나머지 교파들은 거의 거부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 불교와 신토가 많이 융합돼 신사에 불상이 있고 특히 천태종/진언종 사찰에 아마테라스가 있는 경우가 흔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토를 천황 중심의 국가 종교로 밀며 거의 완전히 분리됐다.

아이누는 일본 열도 북부, 특히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 사할린 일대에 오랜 세월 살아온 토착민이다. 언어적으…

아이누는 일본 열도 북부, 특히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 사할린 일대에 오랜 세월 살아온 토착민이다. 언어적으로도 일본어와 계통이 완전히 다르며, 유전적으로도 혼합 전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런 이유로 일본 주류 사회는 오랫동안 아이누의 존재를 회피하거나 집요하게 지우려 했다. 동화 정책과 제도적 차별, 문화 말살은 정체성 붕괴로 이어졌고, 지금은 아이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다. 홋카이도는 1869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홋카이도'라 이름 붙여지며 일본 영토로 편입돼 식민화됐고, 그 이전에는 아이누 인구 8만명의 에조(蝦夷)라 불리던 자치적 문화권이었다. 이 지역이 일본의 오래된 본토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이누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토착민이라는 점과 함께, 일본이 북방 영토에 대해 주장하는 역사적 정통성 논리와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꺼려지는 불편한 진실이다. 아이누가 현대 일본인과 공존해서는 곤란하고 옛 조상 중 하나 쯤으로 남아있어줘야 했다.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말살된 아이누 인구는 18세기 8만명에서 19세기 1.5만명으로 줄었다. 아이누어도 1869년부터 계속 금지됐다. 1997년에야 아이누어 금지 정책이 종료됐고 이 때는 이미 화자 수가 100명 이하로 떨어진 뒤였다. 뒤늦게 부흥운동, 진흥정책 등이 이야기 됐지만 지금은 아이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예 없다. 구직, 혼인을 위해서 아이누 출신임을 숨기는 사람이 많다. 여기에 러시아가 비슷한 시기에 북방에 진출해 사할린과 쿠릴을 두고 일본과 충돌했기에, 일본 입장에서 아이누가 여전히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홋카이도가 정통 일본 땅이 아니라는, 즉 일본 열도 본토를 구성하는 규슈·시코쿠·혼슈·오키나와·쓰시마·이키·사도가 포함된 전통적인 '오기칠도(五畿七道)' 체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약점으로 연결된다. 결국 아이누 정체성과 북방 영토의 짧은 일본역사는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일본은 이 둘을 동시에 부정하거나 은폐하는 쪽을 택해 왔다.

난 반대로 해석한다. “자기애도 한국에서 교육 안 시킨 사람이 교육부 장관할 자격 되나”는 솔직히 “한 번…

난 반대로 해석한다.

“자기애도 한국에서 교육 안 시킨 사람이 교육부 장관할 자격 되나”는 솔직히 “한 번이라도 해외 투자 해본 사람은 기재부 장관 자격없다”랑 비슷한 얘기고, 사실 “애 없는 사람은 선생님 자격없다”처럼 한심한 얘기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비판 포인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부분이 난 제일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도 본인들도 유학파인 분들이. 그럼 뭐 쇄국 정치해야되나. 유학을 안보내면 해외문물은 어떻게 배울 거고 해외에서 우리 이해관계 대표는 누가하는데.

뭐.. 국익을 위해 유학은 보내야하는데 그래도 유학보낸 사람에게 불이익은 줘야겠고 그런거임? 이 무슨 정신분열적인 사고.

솔직히 지적하자면 이거 그냥 사람들이 얼핏 들었을 때 그럴듯한 명제를 별 생각없이 비판없이 받아들여서 생기는 모순이다. 우리 좀 더 깊게 생각하며 살자.

수렵채집 생활을 마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생산성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먹을 것을 스스로…

수렵채집 생활을 마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생산성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먹을 것을 스스로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힘은 시간과 에너지의 여유를 낳았고, 이 여유는 철학, 과학, 문자, 음악, 종교 같은 문명의 기초들을 가능하게 했다. 문화를 뜻하는 영어 단어 culture가 ‘경작하다’를 뜻하는 cultivate에서 유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명의 성장은 항상 먹을 것의 안정성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번영기를 맞은 것도 에게해 무역과 곡물 확보가 가능해진 덕분이고, 당나라의 전성기 역시 화북과 강남 지역의 이중 수확 체계와 대운하로 대표되는 물류 혁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삼국 말기나 고려 말기처럼 정치 혼란과 전란, 기근이 반복되던 시기에는 학문과 예술이 뿌리내릴 여유 자체가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보릿고개가 일상화되고, 기후 악화와 전란, 인구 폭증이 겹치면서 조선 전기와 같은 창조력은 더 이상 재현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도 국가나 왕조가 안정된 곡물 생산과 식량 자급 속에서 스스로 무너진 사례는 매우 드물다. 고려 말기나 조선 말기, 혹은 프랑스 구체제 말기, 명나라 말기처럼 우리가 ‘○○ 말기’라 부르는 시기는 대부분 내부적으로 이미 먹고 살기 어려워졌을 때다. 기후 악화와 전란, 세금 부담, 수탈, 행정 무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복되는 흉작이 민심을 무너뜨리고 반란과 개혁의 동력이 되었다. 국가 체제가 스스로를 유지할 만큼의 최소한의 생존 기반을 잃었을 때, 권위도 함께 붕괴되는 것이다. 반대로 평화와 식량, 기술과 제도가 조화를 이룰 경우 체제는 안정되고 문명은 꽃핀다. 창조는 배가 부른 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배가 부르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조건이다. 한국사에서도 그런 문명적 여유와 창조성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가 있다. 바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세종의 통치기다. 이 시기는 중세 조선의 황금기이자, 현재 대한민국 영토의 기틀이 확립된 시기다. 북방의 4군 6진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이 조선의 영역으로 정리되었고, 왜구와 여진의 위협도 상당 부분 제어되었다. 무엇보다 명나라와의 사대 우호 관계가 안정되면서 국방 문제의 상당 부분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국경이 안정되자 전쟁은 사라졌고, 평화는 곧 풍요로 이어졌다. 세종 시대는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풍요의 시대였다. 당시 조선은 전례 없이 넓은 경작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노동력이 집중되면서 쌀 생산량도 정점을 찍었다. 효율 높은 논농사가 이미 확산된 상태에서 경작지의 극대화가 이루어졌고, 밭농사 위주였던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유례없이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세종 말기까지 국가가 집계한 경작지는 조선 최대였으며, 이후 임진왜란으로 그 3분의 2를 잃고는 끝내 최대치를 회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시절 인구는 조선 말기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인구는 적고, 먹을 건 넘쳤다. 국가적 차원에서 시간과 에너지가 남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학문과 기술, 예술로 흘러들었다. 축적된 민중의 여가는 곧 당대 문명의 찬란함으로 드러난다. 굶주리는 백성들 속에서는 철학자, 예술가와 발명가들이 넘쳐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바로 세종 본인이고, 그가 만든 훈민정음이다. 당시 집현전은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싱크탱크였고, 이들이 세종과 함께 전례 없는 연구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한 합작이 아니었다. 집현전 학자들 다수가 강하게 반대했으며, 세종은 그들과 논쟁을 벌였고, 일부는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한글은 세종 개인의 주도와 고집, 그리고 비범한 천재성에서 탄생한 발명품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세종이라는 인물이 단지 위대한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창의력과 실력을 갖춘 천재였다는 점이다. 그런 인물이 역사에 등장했고, 그가 끝없는 전쟁이나 권력투쟁에 시간 허비할 필요없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풍요와 평화, 인재와 지식이 모두 준비된 시대였다는 점이 조선 전기의 진짜 위대함이다. 문자라는 것은 단지 말의 기록 수단이 아니라, 사고 체계 전체를 바꾸는 도구다. 백성 전체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조선 사회 전체의 지적 구조를 재편하는 혁명이었다. 네덜란드는 무역 열강 시기에 축적한 부를 지금까지 도시의 구조, 방대한 간척지, 치수 설비, 건축 양식 등으로 남겨두었기에 오늘날 방문객들도 그 영화를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은 세종 시대의 풍요와 창조력을 다른 방식으로 남겼다.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이라는,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만을 위해 발명된 문자다. 세종은 군주로서 권위나 업적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사고 방식을 바꾸는 도구를 만들었고, 그 덕에 한민족은 단순한 통치의 틀을 넘어서 문명적 구조 자체를 새롭게 획득하게 되었다. 그 어떤 물리적 유산보다도 깊고 넓은 자산이었다. 한민족은 세종 덕에 이때 업그레이드 됐다.

플로리다 주지사가 ‘불법이민자 수용소’라며 건물 주변에 해자를 파고 악어를 풀어놓은 수용소 시설을 매우 자랑…

플로리다 주지사가 '불법이민자 수용소'라며 건물 주변에 해자를 파고 악어를 풀어놓은 수용소 시설을 매우 자랑스럽게 신나하며 공개해서 논란이 됐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이것도 그냥 예산 빼돌리용이었음이 발각. 건축과정에서, 또 운영에서 업자에게 엄청난 폭리. 아무걸로나 시간당 15만원씩 받아간 사람들이 수두룩.

하여튼 한국이나 미국이나 토건족들은 똑같음. 미국도 이재명이 필요.

수퍼맨의 탄생은 슬픈 현실에서 비롯됐다. 1932년, 제리 시걸의 아버지는 강도가 침입한 자신의 옷가게에서…

수퍼맨의 탄생은 슬픈 현실에서 비롯됐다. 1932년, 제리 시걸의 아버지는 강도가 침입한 자신의 옷가게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총에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포와 충격 속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은 열네 살 아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시걸은 이듬해 친구 조 슈스터와 함께, 총알도 뚫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존재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무고한 사람을 지키는 절대적 존재, 수퍼맨의 원형이었다. 1938년, 두 사람은 수퍼맨의 판권을 내셔널 퍼블리케이션즈(현 DC 코믹스)에 단돈 130달러에 넘겼다. 수퍼맨은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떠올랐고, 만화와 전쟁 선전물, 영화, 장난감 등 다양한 형태로 전 세계에 퍼졌다. 하지만 정작 그를 만든 시걸과 슈스터는 저작권 없이 외면당했고, 평생 가난하게 살며 수십 년 동안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1970년대 수퍼맨 실사 영화 제작이 본격화되면서 창작자들의 이름이 다시 주목받았다. 여론이 들끓자 DC는 1975년 두 사람에게 평생 연금과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모든 수퍼맨 콘텐츠에 “Created by Jerry Siegel and Joe Shuster”라는 문구를 넣기로 약속했다. 창작 40년 만의 뒤늦은 인정이었다. 이런 일은 마블의 대표 작가 스탠 리에게도 반복됐다.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 수많은 마블 캐릭터 설정과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는 오랜 시간 편집자이자 작가, 홍보인으로 활동했지만 저작권은 갖지 못했다. 당시엔 창작자에게 저작권이 돌아가지 않는 계약 구조가 당연했기 때문이다. 마블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금전적 보상은 없었다. 스탠 리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가진 재산 대부분은 마블에 소송을 걸어 강제로 받아낸 돈이었다. 스탠 리 사후, 그의 유족은 2021년 디즈니를 상대로 저작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수십 년간 창작된 캐릭터들이 단순 고용 계약으로 탄생한 것인지, 아니면 원저작자에게 권리가 있는지를 두고 법적 판단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수퍼맨과 마블 캐릭터는 오늘날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이 됐지만, 그 뒤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창작자들의 그림자가 있다. 제리 시걸, 조 슈스터, 스탠 리의 사례는 한 사람의 상상력과 상처가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이디어의 진짜 가치를 누가 가져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반면, 잭 커비와 스티브 디트코의 경우는 조금 더 나은 결과로 이어졌다. 커비는 캡틴 아메리카, 판타스틱 4, 토르, 엑스맨, 블랙 팬서 등 마블의 핵심 캐릭터들을 공동 창작했고, 디트코는 스파이더맨과 닥터 스트레인지를 사실상 만들어낸 인물이다. 두 사람 역시 당시엔 고용 작가였기에 저작권은 없었고, 마블이 디즈니에 인수되며 더욱 소외됐다. 그러나 유족들은 미국 저작권법의 ‘권리 회복 청구권(termination rights)’을 근거로 저작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고, 각각 2014년과 2023년에 디즈니와 비공개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완전한 권리를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이후 마블 콘텐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명시되었고, 유족에게도 일정한 보상이 돌아갔다. 디즈니도 법정 논란보다 조용한 합의를 택하며, 창작자 예우 이미지를 지키는 전략을 선택한 셈이다. 스탠 리 유족의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커비와 디트코의 사례는 앞으로의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했던 초기에는 물론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기존 기득권층의 매국을 통해 군사적 침략 없이 쉽게…

일제가 조선을 침략했던 초기에는 물론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기존 기득권층의 매국을 통해 군사적 침략 없이 쉽게 나라를 접수했다. 2025년 대한민국이 북한이나 일본을 적대적 합병하는데 전쟁 없이 외교와 첩보 작전, 그리고 현 지배층을 매수해서 해결했다고 상상해보자. 엄청난 위업이다. 우리가 피해자 입장이어서 그렇지 남의 일이었으면 연구하고 배워야 할 일이다. 아니, 어차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우리도 언제 누구와 분쟁이 있을지 모르고, 그때가 되면 비용과 생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무혈 승리를 추구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기존 지배계급을 매수해 조선을 접수하긴 했는데,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통치하려고 보니 그 지배계급은 이미 매국노로 찍혀서 통치에 문제가 너무 많은 거다. 일제는 다른 통치 방법, 새로운 현지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제는 충성도 높은 식민 협력자를 길러내기 위한 다양한 이벤트와 제도를 설계했다. 그 핵심은 세 가지 방향으로 압축된다: 상훈과 포상, 교육과 인재 등용, 제도화된 기회 제공이다. 첫째, 총독부 표창과 훈장 제도다. 항일운동을 탄압하거나 징세·징용에 적극 협력한 이들에게는 ‘훈장’과 ‘표창장’을 내리며 지역 유지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명확한 보상 체계였고, 조선인 사회에 "협조하면 출세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둘째, 보통학교와 사범학교, 일본 유학 제도를 활용한 친일 엘리트 육성이다. 초기에는 조선인에게 일본어 교육을 시키고, 일부에게는 사범학교나 도쿄 유학 기회를 주며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 중 충성도 높은 자는 교사나 면서기, 후에는 판사, 검사 등으로 등용되었다. 일종의 조선판 '정치 고시' 루트다. 셋째, 면장·이장 임명과 동리 구조 해체를 통한 기회 부여다. 면 체제를 통해 지역마다 면장을 임명하는데, 이 직은 일본이 직접 또는 지방 경찰 추천으로 선발했다. 과거 향약의 주도자였던 양반층 대신, 일제에 협조적인 인물들이 새로운 유지가 되었다. 특히 지주나 중소상인 중 일부가 면장을 맡으며 지역 권력을 장악했다. 이 밖에도 친일 단체 결성도 있었다. 1920년대에는 자작단, 1930년대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대화숙 등의 조직을 통해 친일 인사를 공개적으로 포섭하고, 강연이나 상을 주며 권위와 명분을 부여했다. 이 중에 특히 저 면 체제가 꽤 악랄하다. 기존 조선의 지방 체제는 동과 리로 나눠 향약 등을 통해 지역의 유지 등을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외세의 침입이 있어 의병이 일어날 때에도 바로 이 체계가 지도자부터 말단까지 그대로 의병조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시대가 시작될 때도 이런 조직을 통해 전국적인 항일 감정이 일었다. 일제 입장에서 이걸 해결해 준 게 바로 면 제도였다. 일제는 1914년부터 시작해 1917년에 본격적으로 일본의 면 제도를 가져다 동과 리 위에다 입혔다. 멀쩡하게 동으로 구성돼 있던 지역 사회를 면으로 새로 합치거나 갈라서 분열시키고, 새로 육성되는 친일파를 면장으로 임명해 지역 사회를 장악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총독이 지정하는 지정면/직할면으로 해서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는 일반면으로 나눠 충성하는 지역 유지들에게 다시 나눠주는 방법으로 일본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장악해나갔다. 저 때 면장에 임명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일본어를 배웠고, 일제에 협조적이고, 지역 내 항일 세력과 친분이 적은 사람들이었다. 전부 친일파였다고 볼 수는 없더라도 항일 인사가 아님을 인증받은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친일파를 키워내기 위한 일제의 세 가지 노력이 결집되며 태어난 새로운 부역자 계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