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August 2025

사실 동양식 “성 + 이름”이나 서구식 “이름 성” 이름 체계가 생각보다 보편적이지 않다. 인도네시아, 버…

사실 동양식 "성 + 이름"이나 서구식 "이름 성" 이름 체계가 생각보다 보편적이지 않다. 인도네시아, 버마, 티베트는 아직 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태국은 성씨가 생긴지 약 110년 밖에 안됐다. 1913년 처음으로 의무화 됐고, 그 전까지는 이름 + 별명으로 구분했다. 라마 6세가 서구식 국가 체제를 도입하면서 식별 수단으로 성씨 제도를 법제화했다. 각 가문이 서로 다른 성씨를 사용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에 수만개의 굉장히 많은 성씨가 생겨났다. 구성은 "민호 김" 이런 식인데, 별명 문화가 있다. 태어날 때 짧고 기억하기 쉬운 별명을 부여받는다. 콜라, 아이스같은 짧은 영어 단어 이름도 많이 쓴다. 본명은 너무 길어서 일상에서 잘 안 쓴다. 개명이 법적으로 쉽고 흔하다. 운세에 안맞는다는 견해를 들으면 개명한다. 이름을 바꾸는 게 액막이 의미가 있고, 평균 평생 2-3번 바꾼다고 한다. 본명은 가족만 알고 남들에게는 별명만 알려주는 경우가 많아서 개명해도 모른다. 몽골 이름은 "철수의 아들 민호" 이런 식이라 가문의 고정된 성씨가 대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이슬란드도 "민호 철수son" 혹은 딸이면 "민희 철수dottir" 하는 식으로 성으로는 아버지 이름만 알 수 있다. 남인도는 "김 민호" 북인도는 "민호 김"으로 쓴다. 러시아는 "민호 철수vich 김" 이런 식으로 자신 이름, 아버지 이름 표기, 다음에 성씨를 붙인다. 고정된 성씨가 이어진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는 "민호 김(아버지 성) 정(어머니 성)" 패턴을 따른다. 포르투갈, 브라질, 필리핀은 "민호 정 김" 패턴을 따른다. 필리핀은 포르투갈 방식을 따르려고 따른 건 아니고 이름 중간이름 성씨 패턴을 자유롭게 쓰다가 미국령이 되면서 표준화하는 과정에 중간이름으로 어머니 성을 넣는 풍습이 생겼다. —- 한반도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난다. 4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때부터 귀족 집단이 성을 가졌다고 기록된다. 고려때 중국식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 점점 확대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전국민이 성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일제시대 때 호적 제도가 도입되면서 성이 없는 사람은 새로 만들거나 주변인 성씨를 받아 등록했다. 일본도 5세기 무렵 야마토 왕권 때 씨족(氏族)과 관위(官位) 제도를 정비하면서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때는 아직 성이라기 보다 귀족 지위를 나타내는 칭호였다. 11세기 헤이안 시대에 무사집단이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 에도 막부가 끝날 때까지 인구의 90%였던 평민은 성씨 사용이 금지됐다. 대부분 농민은 이름 + 촌락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1870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성씨 사용이 의무화 됐고 제한없이 각자 작명해서 신고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명, 직업, 자연물 등을 따서 성씨로 삼았다. 같은 동네에서도 다른 집안끼리 서로 다른 성씨를 쓰려는 경향이 있어서 30만종의 성씨가 생겼다. 지금도 20만종의 성씨가 남아있다. 중국은 전설시대부터 춘추전국 시대까지 성은 모계 혈통을, 씨는 후대에 가문에서 분파된 집단을 나타내는 표기로 사용됐었다. 한나라 시절에 지금같은 성씨 개념이 생겼지만 아직 사용이 보편화 되지는 않았다. 대부분 이름만 있었고 성은 없었다. 수당 시절에 다수가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0-12세기 송원시대에 사실상 전국민이 성씨를 사용했다. —- 한국은 본관(本貫), 파(派), 돌림자(行列字) 등으로 더 세분화된 가문 구분을 하는데, 사실 중국에서 온 풍습이다. 돌림자도 송대에 생긴 전통이었다. 족보(族譜)를 편찬하는 풍습도 마찬가지로 송대에 생겨났다. 문화대혁명때 족보 등이 없어졌다가 1980년 개혁개방 이후 다시 쓰기 시작한 집안들도 있다. 한국에서 돌림자 사용 방식도 위치를 고정해 매번 앞자가 같거나 매번 뒷자가 같은 경우가 있고, 세대마다 돌림자의 위치를 바꿔 쓰는 방식이 있다. 돌림자 한자의 부수(部首)를 음양오행에 맞춰 항렬자로 돌려 쓰는 방식이 가장 널리 쓰인다. 일부 가문에서는 시나 문구를 미리 정해놓고 각 글자를 세대별 항렬자로 쓴다. 중국은 돌림자를 쓰는 경우 가훈(家訓)이나 가시(家詩)를 세대마다 한 글자 씩 돌려 쓴다. 대부분 앞자에 쓰고 뒷자를 자유롭게 붙인다. 덕목이나 자연요소를 사용해서 德, 孝, 忠, 義, 山, 江, 松, 海, 같은 돌림자가 많다. 한국도 비슷하다. 중국은 부수를 활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역시 한국보다 돌림자를 지키는 집안 비율은 매우 낮다. 일본은 사실 본적, 파, 돌림자 풍습이 없다. 족보를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의 몇대째 후손인지 확인할 길은 거의 없다. 단지 각 지역의 사찰이나 신사가 신도 명부에 기록해놓는 경우가 있어서 수백년 전 조상의 장례 기록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명문가는 족보를 관리하는 경우가 있다. 도쿠가와(德川), 아시카가(足利) 가문 후손들은 아직도 족보를 관리한다. 옛날에도 상급 무사 계급은 족보를 기록했지만 하위 무사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다. 베트남도 본적, 파, 돌림자, 족보가 있었으나 프랑스 식민지,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며 전통이 거의 다 단절됐다. 사실 유럽 대부분은 로마시절에 이미 "민호 김(씨족) 김해(분파)" 체계가 보편화됐지만 서로마 제국 멸망 뒤 게르만 족 세계가 되면서 성씨가 사라졌었다. 다시 중세 10-12세기에 봉건사회가 생겨나면서 성씨가 다시 필요해졌고 18세기 전까지 점차 보편화됐다. 귀족은 족보를 기록했고 일반인은 교회에 세례부 기록을 마을 족보처럼 기록으로 활용했다.

내 zune 어디갔지. 한때 잘 썼었는데. 그때 iPod에 비해 화면도 크고 해서 좋았는데. 한글 지원이 안…

내 zune 어디갔지. 한때 잘 썼었는데. 그때 iPod에 비해 화면도 크고 해서 좋았는데. 한글 지원이 안돼서 어떻게 어떻게 펌웨어 수정해서 되게 만들었던 기억이… 그렇게 한 번 내부를 건들고나면 버리기가 아까워짐. 어디갔지. 시간나면 다시 iPod 만들기나 해야지.

남아공 GDP의 약 10%는 중국 내수 서비스 시장 매출에서 나온다. 수출이 아니라 내수. 내스퍼스(Nas…

남아공 GDP의 약 10%는 중국 내수 서비스 시장 매출에서 나온다. 수출이 아니라 내수. 내스퍼스(Naspers)의 출발은 종이였다. 1915년 스텔렌보스에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언론을 표방한 ‘디 나시오날레 퍼스(De Nasionale Pers)’로 신문·잡지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20세기 동안 출판과 서적, 잡지로 뿌리를 내렸고, 1986년에는 남아공 최초의 유료 TV ‘M-Net’을 출범시키며 방송으로 몸집을 키웠다. 1994년 요하네스버그 증시에 상장했고, 1998년 사명을 내스퍼스로 바꾸며 디지털로 방향타를 꺾었다. 이 무렵 멀티초이스·M-Web로 유료방송·인터넷을 아우르며 남부아프리카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전환점은 이때부터였다. 해외 신생 인터넷 기업에 투자를 뿌리기 시작했고, 2001년 중국의 텐센트에 불과 3천만 달러대 자금으로 46.5%를 사들였다. 세기의 한 건이었다. 이후 2019년 국제 인터넷 자산을 묶어 암스테르담에 프로서스(Prosus)를 상장했고, 오늘 내스퍼스는 프로서스의 약 41%를 보유, 프로서스는 텐센트의 약 23~24%를 쥔 구조가 되었다. “한 번의 베팅이 기업 운명을 바꿨다”는 교과서적 사례였다. 텐센트는 위챗 등으로 거대 IT 기업이 됐고 이제 세계 게임시장도 장악하고 있다. 결국 내스퍼스의 시총가치 대부분이 텐센트 주식에서 나왔다. 3천만달러 투자해서 1000억달러가 됐다. 3200배 성장했다. 지금의 스케일을 보자. 내스퍼스 시가총액은 약 529억 달러 수준이고, JSE 전체 시총은 약 21.7조 랜드(≈1.23조 달러)다. JSE 톱40에서 내스퍼스의 비중은 대략 12~13%에 달한다. 과거엔 지수 편중이 25%까지 심해져 JSE가 상한선 ‘캡’ 규칙을 도입할 정도였다. 내스퍼스가 남아공의 삼성/TSMC인 셈이다. 이 말은 곧 남아공 최대 기업의 주가와 지수 흐름이 중국 빅테크(텐센트)의 실적과 맞물려 움직인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텐센트 주가가 오르면 프로서스·내스퍼스가 동조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남아공 대표주의 수익과 배당의 큰 몫이 중국 내수 인터넷 생태계에서 나온다는, 흥미로운 연결고리였다. 게다가 내스퍼스가 가진 텐센트 주식 가치보다 내스퍼스의 시총이 항상 낮았다. 텐센트에 투자하고 싶은 사람은 내스퍼스에 투자해야한는데 남아공 증시 접근이 불편해 가치가 디스카운트 됐던 거다. 이런 저런 부작용이 있어서 프로서스의 유럽 상장을 통해 내스퍼스/남아공 증시의 텐센트 의존도를 줄여놓은 상황이다.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다. 내스퍼스·프로서스는 2022년부터 텐센트 지분을 오픈엔드 방식으로 조금씩 매도해 자사주를 사들이며 ‘지주사 디스카운트’ 해소에 나섰고, 2023년엔 복잡한 크로스홀딩을 해소해 구조를 단순화했다. 그 사이 프로서스는 음식배달·핀테크·교육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혔고, 스택 오버플로우·유데미·코드카데미 등에도 손을 뻗었다. 2025년에는 저스트잇 테이크어웨이 인수로 유럽 테크 챔피언을 노린다고 밝혔다. 남아공 출판사였던 내스퍼스가 중국 내수의 파도를 타고, 유럽·인도·라틴으로 뻗는 거대한 인터넷 지주로 변신한 여정이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20세기엔 신문을 찍던 기업이었다. 21세기엔 한 건의 대담한 투자로 남아공 증시를 좌우하는 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거인의 현금창출원 상당 부분이 중국의 이용자·게임·핀테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글로벌화의 오늘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레드불의 이야기는 태국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태국의 Chaleo Yoovidhya가 크라팅 댕(Kra…

레드불의 이야기는 태국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태국의 Chaleo Yoovidhya가 크라팅 댕(Krating Daeng)을 만들었다. 노동자와 기사들이 피로를 풀려고 마시는 로컬 에너지 드링크였다. 두 마리 붉은 황소가 부딪히는 로고도 그때 생겼다. 1980년대, 오스트리아의 Dietrich Mateschitz가 태국을 여행하다 크라팅 댕을 마셨다. 그는 시차 피로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직감했다. “이건 세계에서도 통한다.” 그는 곧 Chaleo와 손을 잡았고, 음료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꿔 Red Bull을 만들었다. 1984년 두 사람은 회사를 세웠다. 지분은 마테시츠 49%, Chaleo 49%, 나머지 2%는 그의 아들 Chalerm에게 돌아갔다. 운영은 전적으로 오스트리아 측이 맡았다. extreme sports, F1, 축구 구단 인수 같은 공격적 글로벌 마케팅은 모두 마테시츠의 손에서 나왔다. 유위디야 가문은 운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지분 덕분에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리고 외부투자 없이 사업 이윤 재투자로 성장했기에 초기 지분이 희석된 적이 없다. 지금도 유위디야 가문은 레드불의 51% 지분을 보유하며 태국 최대 재벌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태국 내에서도 여전히 T.C. Pharmaceuticals를 통해 크라팅 댕을 비롯한 음료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규모는 글로벌 레드불에 비하면 훨씬 작지만, 태국 로컬 시장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존재감을 유지한다. 마치 일본 롯데에서 투자해서 시작했고 여전히 소유중이지만 한국 롯데가 규모는 열 배 이상 큰 상황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지분 구조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마테시츠는 원창업자인 Chaleo의 기여를 존중했고, 지분 절반을 그대로 인정했다. 글로벌 확장에서 흔히 원저작권자가 배제되곤 하는 상황과 달리, 그는 파트너십을 존중하는 선택을 했다. 레드불은 단순한 에너지 드링크가 아니었다. 태국의 로컬 음료와 오스트리아식 글로벌 경영이 결합해 만든 아이콘이었다. 운영은 유럽에서, 부의 절반은 태국으로, 그리고 태국에서는 여전히 크라팅 댕이 살아 있다. 존중과 분업이 만들어낸 독특한 성공 모델이었다. 비슷한 스타일의 에너지 드링크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먼저 1960년대부터 리포비탄D 같은 작은 갈색 병 에너지 드링크가 널리 퍼졌고, 한국에서도 곧바로 박카스 같은 유사 제품이 등장했다. 모두 노동자와 학생층을 겨냥해 피로회복과 활력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았다. 레드불은 이 아시아식 에너지 드링크 문화를 서구식 브랜드 전략으로 세계화한 사례였던 것이다.

코카콜라는 처음에 애틀랜타 약국의 소다 파운틴에서 컵으로 따라 팔리던 음료였다. 한 잔에 5센트였다. 레시피…

코카콜라는 처음에 애틀랜타 약국의 소다 파운틴에서 컵으로 따라 팔리던 음료였다. 한 잔에 5센트였다. 레시피는 약사 펨버턴이 만든 특별한 조합이었고, 지금도 금고 속에 잠겨 보안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곧 병입(bottling)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등장했다. 병입이란, 본사가 만든 시럽을 지역 병입업체들이 받아 병에 담아 팔고 유통하는 구조였다. 코카콜라는 이 시장에 무심했고, 창업자 아사 캔들러는 미국 전역 병입권을 두 변호사에게 단돈 1달러에 넘겨버렸다. 게다가 영구 계약이었다. 곧 음료 시장은 병 음료 시장으로 정리됐고 이 때문에 코카콜라 본사는 병 가격을 올려도 이득을 볼 수 없었고, 가격 조정의 주도권도 잃었다. 코카콜라가 택한 길은 5센트 고정 전략이었다. “언제나 5센트”라는 광고가 전국에 퍼졌다. 소비자 머릿속에는 코카콜라=5센트라는 믿음이 굳어졌다. 병입업자들이 다양하게 만들어 팔던 병 디자인도 통일 시켜 가격 수정을 막았다. 코카콜라 하면 상징적인 비키니 "콜라병" 디자인이 탄생했다. 자동판매기도 5센트 니켈 하나만 받도록 설계돼 가격 인상이 사실상 막혔다. 본사는 나중에 자동판매기를 교체하기 힘들자 정부에 7.5센트짜리 동전 발행까지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쨌건 이 전략은 홍보효과 면에서 대성공이었다. '언제나 5센트' 코카콜라는 대중적 음료가 되었고, 세대를 건너 사랑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병입업체들은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병 하나 5센트에 묶여 수익성이 계속 낮아졌다. 본사는 이 상황을 활용했다. 수익 압박에 시달리던 병입업체들과 하나하나 재협상에 성공했고, 결국 병입망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되찾았다. 5센트 고정 전략이 병입업체를 압박하면서 본사가 다시 주도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오늘날 아리조나 아이스티의 99¢ 전략도 이와 닮아 있다. 캔에 아예 가격을 박아 넣어 유통업체가 손댈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소비자에게는 “언제나 99¢”라는 믿음을 주며, 브랜드 정체성을 가격 자체와 결합시켰다.

16-17세기는 “이슬람 세계의 군사적 최전성기”라고 불린다. 오토만·사파비·무갈 제국이 동시에 존속하면서…

16-17세기는 "이슬람 세계의 군사적 최전성기"라고 불린다. 오토만·사파비·무갈 제국이 동시에 존속하면서 서아시아남아시아 전체를 장악했고, 유럽과 맞먹거나 압도하는 화력을 갖추었다. 저 때 십자군전쟁처럼 기독교-이슬람 구도로 갔으면 유럽 기독교 문명이 지워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1. 오토만 제국 (1299–1922) 영토 규모: 16세기 말 전성기 기준 약 500만 km². 발칸, 아나톨리아, 중동, 북아프리카 전역을 포괄. 인구: 약 2,000만~3,000만 (16세기 기준). 군사력: 예니체리(신식 보병) 제도 → 화기(火器) 사용 전문 보병. 대형 화포, 성벽 파괴용 포병은 세계적 선두. (1453년 콘스탄티노플 대포가 상징적) 16세기에는 유럽 세력과 대등하거나 앞선 수준의 군사 현대화를 달성. 지중해·홍해·인도양까지 해군력 전개. 특징: 유럽과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한 제국. 빈 포위전, 레판토 해전이 상징. 2. 사파비 제국 (1501–1736) 영토 규모: 약 2~3백만 km² (현 이란 전역 + 코카서스 + 메소포타미아 일부). 인구: 약 1,000만~1,500만. 군사력: 초기에 튀르크계 기병(쿠즐바시)에 의존 → 기동성 뛰어났지만 화기 대응 약함. 오토만과 전쟁을 거듭하면서 점차 화기·보병 전술 도입. 그러나 예니체리만큼 조직화·현대화는 못했음. 특징: 시아파 국가 정체성을 군사·정치적으로 확립. 오토만과의 대립이 상시적이었고, 중앙아시아 유목세력과도 전투 지속. 3. 무갈 제국 (1526–1857) 영토 규모: 17세기 아우랑제브 전성기 때 약 4~5백만 km² (인도 대부분). 인구: 약 1억~1억5천만 (당시 세계 최대 규모 국가 중 하나). 군사력: 바부르가 파니파트 전투(1526)에서 화포와 조총을 적극 활용해 승리. 기병 중심이었지만 대규모 포병 운용도 병행. 방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군대 동원 가능. 그러나 분권적 봉건 구조 때문에 군사 조직의 통일성과 현대화는 오토만에 비해 뒤처짐. 특징: 대규모 전쟁보다는 행정·경제 규모에서 압도적. 그러나 18세기 들어 유럽의 신식 화기에 밀리기 시작.

서구 사회에서 오토만 제국은 흔히 단순한 “타자”, 즉 유럽을 위협했던 미지의 이슬람 세력으로만 기억된다….

서구 사회에서 오토만 제국은 흔히 단순한 "타자", 즉 유럽을 위협했던 미지의 이슬람 세력으로만 기억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안겼고, 빈 포위전은 "기독교 유럽이 함락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서술은 주로 감정적이고 피상적인 측면에 머물렀다. 서구의 역사 교과서 속 오토만은 ‘끝내 몰락한 제국’, ‘퇴폐와 정체의 집합체’로 그려지곤 한다. 그 속에서 유럽 중심 서사는 "우리가 결국 승리했다"는 자기확인에 집중했다. 하지만 서구의 위정자들은 달랐다. 오토만 제국의 군사적 힘, 행정적 정밀성, 전략적 위치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토만을 해체할 때, 그들은 단순히 패전국 하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다. "다시는 재건될 수 없도록" 민족, 종교, 언어, 영토를 세밀히 갈라놓았다. 아랍은 프랑스와 영국의 위임통치로 쪼개지고, 아나톨리아는 터키 공화국으로 축소됐다. 발칸은 이미 19세기 내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이 해체 과정은 우연이 아니라 정밀한 전략이었다. 서구 지도자들은 오토만이 다시 부활한다면 유럽의 세력 균형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제국은 단순히 무슬림 집단의 제국이 아니었다. 동로마제국을 흡수한 16-17세기 전성기 오토만은 약 2천만-3천만 명을 포괄했는데, 그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동방정교회 신자였다. 발칸반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남부, 그리고 옛 비잔틴의 심장부까지 광범위하게 편입되면서, 오토만 영토 안에는 천만 명 이상의 그리스 정교회, 슬라브 정교회 신자들이 살았다. 즉, 오토만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둘 다 품은 다종교 제국이었고, 단순한 “이슬람 제국”이 아니라 동방정교회와 이슬람을 동시에 지배하는 거대한 정치적 실체였다. 밀레트 제도 아래 정교회 총대주교가 제국 안에서 자치적 권한을 행사했고, 교회조직은 그대로 존속하며 오히려 오토만 통치 덕에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 통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유럽 내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유럽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이 벌어졌지만, 오토만 안의 동방정교회인들은 세금 부담과 제약은 있었어도 공동체를 유지하며 수백 년을 살아갔다. 그래서 발칸과 동지중해의 종교·문화적 지도가 지금까지 오토만의 흔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는 이 제국을 역사적으로 정직하게 다루지 않으려 했다. 교과서와 대중적 역사 속에서 오토만은 몇 번의 전투와 몇몇 위협 장면으로만 등장하고, 그 실제 위상은 의도적으로 축소된다. 오토만이 단순한 적이나 미지의 타자가 아니라, 유럽사의 구조를 형성했던 거대한 축이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은 불편했기 때문이다. 오토만이 기독교 세계 절반을 지배하고, 비잔틴과 로마의 행정 전통을 이어받아 다민족 제국을 운영한 사례라는 사실은 쉽게 지워졌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다루고, 잊히기를 바라는 태도가 서구 역사 서술에 깊이 배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토만은 마지막까지 존속한 최강의 이슬람 제국, 동시에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해 지중해와 중동을 아우른 튀르크 제국 전통의 정점이었다. 더 나아가 비잔틴의 행정과 로마의 법, 그리고 이슬람의 보편적 세계관을 융합한, 인류사에서 가장 독특한 제국의 하나였다. 서구가 두려워하면서도 기록 속에 축소해버린 바로 그 존재가, 사실은 오늘날까지 유럽과 중동의 정치·종교 지형을 만든 실질적 주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