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September 2025

세계 인구의 54.4%, 43억명이 언젠가 예수가 재림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 약 28.8%, 23억명…

세계 인구의 54.4%, 43억명이 언젠가 예수가 재림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 약 28.8%, 23억명이다. 그리고 무슬림이 25.6%, 20억명이다. 기독교인들이야 예수의 재림이 핵심 교리인 걸 다들 알지만, 이슬람에서도 마지막 선지자 마흐디가 나타날 때 이사(예수)도 돌아와 거짓 메시아를 물리치고 정의와 평화를 세운다고 믿는다. 의외일 수도 있지만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의 무슬림들도 이 믿음을 공유한다.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 이슬람에서 메카의 카바,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가 예루살렘의 알아끄사 모스크다. 이슬람에서도 중요한 선지자들인 다윗과 솔로몬 등의 활동 무대였기 때문이고,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날아갔다가 승천해서 알라와 만났다는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 무하마드를 비롯해 초기 무슬림들은 메카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왜 우리 걸 자꾸 훔쳐 쓰냐" 싶을 수 있겠지만 유태인들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먼저 다윗과 솔로몬을 훔쳐갔다. 사실 예수의 본명은 예슈아인데 기독교가 번성한 후 랍비 문헌에서는 예슈라고 폄하해서 적기 시작하고, 예슈아라는 당시까지 매우 흔했던 이름을 유태인 공동체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ימח שמו וזכרו” (Yimakh Shemo veZikhro)라는 구절의 머리글자로 약어를 만들면 예슈가 되기에 예슈를 그 의미로 사용한 유태인들도 많았다. 저 구절의 의미는 "그의 이름과 기억이 지워지기를." 유태인들도 기독교 하면 꽤 치를 떠는 모양이다. 11-15세기 레콩키스타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던 시절에 종교적 헌신의 의미에서 예수를 사람들이 이름으로 쓰기 시작해서 지금도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헤수스 Jesús라는 이름이 흔하다. 인도에서는 아이 이름으로 신이나 유명한 성자 이름을 많이 선택하기 때문에 예슈라는 이름도 꽤 자주 쓴다. —- 모스크 하면 떠오르는 돔 건축 양식은 하기아 소피아를 보면 알 수 있듯 사실 비잔틴/동로마 제국 건축 양식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7세기에 갑자기 팽창하며 로마 제국 땅을 대부분 흡수한 아랍제국은 비잔틴 성당 건축 기술자와 장인들을 써서 건축을 했고 자동적으로 당시 최고 건축기술이자 하늘을 상징하는 돔은 이슬람에서도 신성한 공간의 상징이 됐다. 이 돔 건축 양식으로 처음 지은 이슬람 사원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바위의 돔이다. 러시아 정교회나 크레믈린도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일 때 건축 양식이 그대로 전래됐으나, 러시아 특유의 양파 돔으로 발전했다. 뾰족하게 만들어 눈이 와도 흘러내리게 개량했다.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이 유명하다.

지금이야 컴퓨터들이 마법같은 일들을 해주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1950년대에 소련과 핵전쟁을 준비하던…

지금이야 컴퓨터들이 마법같은 일들을 해주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1950년대에 소련과 핵전쟁을 준비하던 미국 정부 입장에서 사람의 눈에 의지하다가 나라 전체가 날아가는 건 악몽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설치된 레이다 기지에서 들어오는 데이타를 분석하고 보고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사람보다 빠르게 반응해 늦기 전에 보복공격하는 능력을 갖춰야 했다. SAGE 컴퓨터가 탄생했다. 소련의 폭격기 침입을 실시간으로 추적/대응하는 방공 지휘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보스턴,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주요 대도시에 SAGE 센터가 들어섰다. 한 대가 250톤이었고 진공관이 6만 개 이상 들어갔다. 대 당 약 3천만 달러가 들었고 지금 가치로 약 4700억원이다. 총 56대가 건설됐다. 1층이 연산/논리 장치역할을 했다. 수만개의 진공관과 다이오드로 이뤄진 연산 장치, 제어 회로가 설치됐다. CPU에 해당한다. 2층이 메모리 장치였다. 자기 코어 모듈과 보조 기억 장치로 채워졌다. 256kb의 막대한 용량을 가졌다. 3층이 입출력과 디스플레이였다. 레이다 데이터 입력, 전화선/모뎀, 콘솔, 대형 CRT 디스플레이 등이 있었다. 다른 구역이나 다른 층에 냉각/전원 구역을 뒀다. 수천 kW의 전력과 대형 에어컨 시스템이 돌아갔다. 별도 냉각탑을 둘 정도였다. 미국은 이 SAGE 시스템으로 1958년부터 전국을 포괄하는 자동화 실시간 온라인 방공 네트워크를 갖췄다. 소련은 1991년 해체될 때까지도 지역 자동화 네트워크와 사람 중심 관제로 대응했고 전국 자동화 방공 네트워크는 갖추지 못했다. 기술력의 차이였다. —- 저런 대형 컴퓨터에서 개인용 컴퓨터로의 혁명을 일으킨 건 SAGE 컴퓨터로부터 18년 뒤 1976년에 워즈니악이 발명한 애플 I였다. 혼자서 운반 가능할 정도로 작았고 SAGE보다 6배 빨랐다. 이제 6만원짜리 라즈베리 파이 5 한 대가 저 5000억원짜리 4층 SAGE 컴퓨터보다 12만배 이상 더 빠르다. 저때까지는 컴퓨터는 미리 원하는 연산 내용을 준비하고 하드웨어를 준비하고 연산을 위해 케이블을 연결하거나 해야했다. 전기톱처럼 큰 작업의 일부에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기계였다. 워즈니악의 컴퓨터는 전원을 켜면 그냥 BASIC이 사용자의 입력을 기다렸다. 사용자가 키보드로 입력하기를 기다리는 컴퓨터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이었다. 컴퓨터를 먼저 켠 뒤에 뭘 하고 놀지 고민해도 됐다. 아니, 키보드와 모니터를 직접 눈앞에 두고 대화하듯 사용할 수 있는 싼 개인용 컴퓨터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진 메인프레임에 키보드와 모니터만 따로 모아두는 경우는 있었지만 개인용 컴퓨터들은 스위치와 전구로 인풋 아웃풋을 해결했다. 워즈니악이 발상해낸 키보드, 본체, 모니터라는 구성이 개인용 컴퓨터 혁명을 일으켰고 이 구성은 스마트폰이 나올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애플 I으로부터 32년 뒤인 2008년에 아이폰으로 스마트폰을 유행 시키고 컴퓨팅 방식을 다시 한 번 바꾼 것도 역시 애플이었다.

중국과 러시아도 트럼프 & 이재명 조합에 북한이 흔들릴 수 있음을 알아서 이번엔 미리 움직였다. 지난번 싱가…

중국과 러시아도 트럼프 & 이재명 조합에 북한이 흔들릴 수 있음을 알아서 이번엔 미리 움직였다. 지난번 싱가폴 회담등 할 때 중국이 얼마나 불편해했는지 생각하면 북한은 이번에 트럼프가 성실하게 임하건 말건 러시아와 중국에게서 얻어낼 거 다 얻어낼 걸로 보인다. 회담 일정 잡기도 전에 미리 이기고 시작하는 북한이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잘 보호되고 있는 중국 동해안으로 상륙하는 건 불가능이지만 북한이 길을 빌려주면 미국도 북경까지 육상 진격이 가능하다. 어차피 핵보유국끼리 그럴 일은 안 생기는 게 맞지만 중국이 붕괴에 가깝게 무너지는 경우 그런 빈틈이 중요해진다. 혹시라도 북한이 미국과 밀약이라도 맺으면 중국은 난리난다. 밀약을 맺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만 생겨도 한국-북한-중국-미국의 균형이 흐트러진다. 한반도는 지금 중국의 우크라이나다. 중국 입장에서는 벌써 3000년 넘게 겪고 있는 한반도 리스크다. 게다가 평지에 국력 약한 우크라이나와 달리 북동부 끄트머리 험준한 지형에 성질도 거지같은 민족이 무시 못할 인구수로 자리잡고 있어서 없애버리지도 못하고 정복도 못하고 계속 중원으로 들어오는 통로로 작동하니 골머리 아프다. 북은 이제 핵까지 가졌다. 그래도 원-명 시절처럼 지금은 북한이라도 끌어안는 수 밖에 없다. 해서 중러북 삼각 구도가 탄생했다.

중국 원나라가 고려를 몽골제국 체제 속으로 본격 편입하려 하기 전까지, 중국 왕조들이 한반도를 보는 시각은…

중국 원나라가 고려를 몽골제국 체제 속으로 본격 편입하려 하기 전까지, 중국 왕조들이 한반도를 보는 시각은 일정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라, 하지만 굳이 병합할 필요는 없는 존재였다. 자원 면에서도 서북 변경의 초원이나 서남 방면의 곡창처럼 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적당히 관리하면서 조공을 받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완충지대로 두는 전략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당·송 같은 제국들은 주변 민족들을 다루기 위해 회동관(會同館) 같은 기구를 만들어 언어를 연구하고 통역관을 길렀다. 거란어, 여진어, 위구르어 같은 언어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구려어, 신라어, 고려어는 이 체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반도의 나라들이 모두 한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외교에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보장하는 ‘필담’이 통했으니,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실무가 돌아갔다. 고려를 친족으로 봤던 걸로 보이는 몽골 제국이 가고 들어선 명나라에서 상황이 달라졌다. 명은 조공 체제를 제국 외교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주변국을 질서 속에 묶어두려면 언어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겼다. 이때부터 명나라 조정이 본격적으로 조선어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문서를 처리하고, 조공로를 관리할 수 있는 전문 통역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전 왕조들과 달리, 명은 조선을 ‘주요 파트너’로 간주했고, 그래서 조선어는 제국 통역 교육 과정에 편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청나라 시기다. 청은 만주족 왕조였고, 조선과의 관계는 미묘했다. 명의 후계자로서 천명(天命)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선은 본래 명에 충성을 바쳤던 나라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긴장관계가 이어졌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군신관계를 인정하면서, 청은 조선어를 더 이상 단순한 외교 도구가 아니라 황실 질서 유지의 상징적 언어로 관리했다. 청 황궁에는 통역 담당 관청이 있었고, 몽골어·만주어와 함께 조선어도 실무 교육 대상이었다. 다만 청 후기에는 만주어가 점점 약화되면서, 조선어 교육도 형식화되었다. 실제 외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한문이 중심이었고, 조선어는 보조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한편 일본이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배경은 전혀 달랐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기부터 대마도를 통해 조선과 무역과 외교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통역사인 야사(野司)가 등장한다. 하지만 체계적 교육은 에도 막부 이후에야 확립된다. 1727년 쓰시마 번이 한국어 통역 교육기관인 韓語司(칸고츠카사)를 설치해 번역과 통역을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이곳에서는 교재로 조선어 회화집이 쓰였는데, 일종의 ‘조선어 회화 교본’이었다. 이 기록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발음을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런 교재는 오늘날 한국어 학습서의 원형과도 닮아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을 대상으로 직접 침투를 시도한다. 통역의 필요는 더 커졌고, 일본 육군과 외무성이 직접 조선어 전문가를 양성했다. 특히 도쿄와 교토의 대학에 한국어 과목이 개설되었고, 일본군 장교들은 조선 파견 전 속성 한국어 교육을 받았다. 20세기 초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는 교육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통역과 외교’가 아니라 ‘지배와 통치’를 위한 언어 교육이었다. 총독부는 일본 관리와 경찰을 위해 한국어 학습 교재를 만들었고, 동시에 조선인들에게는 일본어 교육을 강제로 확대했다. 즉, 조선어를 배우는 체계와 가르치는 체계가 동시에 존재했지만, 권력 관계 속에서 정반대의 목표를 추구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서구권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어 연구를 제도화한 나라였다. 배경에는 연해주 지역의 확장과 그곳에 정착한 고려인 공동체가 있었다. 국경 관리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해 한국어 통역과 자료가 필요해지자, 러시아 학계는 이를 ‘동양학’의 한 갈래로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할 인물이 레프 콘체비치(Lev Kontsevich)다. 그는 소련 시기 한국어 연구의 토대를 놓은 학자이자, 한국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는 콘체비치 표기법을 고안했다. 이 표기법은 지금도 구소련권에서 한국어를 전사할 때 표준처럼 쓰인다. 단순히 연구 차원이 아니라, 러시아 학계와 언론이 한국어 자료를 다루는 데 실질적인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미국이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미국은 일본어뿐 아니라 중국어, 태국어, 한국어 같은 동아시아 언어 전문가가 필요했다. 1942년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 설립된 육군언어학교에서 한국어 과정이 개설되었고, 특히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의 재미 한인 이민자와 망명 지식인들이 초기 교재 제작과 강사로 참여했다. 이 시기 한국어 교육은 철저히 군사와 정보 활용 목적에 맞추어져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어는 미국 정부가 지정한 전략 언어로 자리잡았다. 국방언어원(DLI)과 국무부 산하 외교관 훈련기관(FSI)에서 한국어 교육이 대폭 확대되었고, 한국인 강사들이 직접 참여했다. 동시에 하버드, 버클리, 하와이 대학 등 주요 대학들이 1950년대 말부터 한국어와 한국학 과정을 개설했고, 하와이 대학은 한인 공동체의 기반 위에서 1960년대 초 미주 최초의 한국학 연구소를 세웠다. 군사와 외교를 넘어 학문적 체계 속에서 한국어가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난 그 어떤 흉악범도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래야 제대로된 단죄도 가능하다고 본다. 나쁜 놈이라…

난 그 어떤 흉악범도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래야 제대로된 단죄도 가능하다고 본다. 나쁜 놈이라도 정확하게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밝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나머지 형벌도 제대로 된 주인을 찾을 수 있다. 흉악범이라고 무조건 세게, 무조건 모든 혐의를 씌우면 진실이 가려지고 오히려 다른 범인들이 도망갈 틈새가 생긴다. 따라서 통일교가 변호인들을 선임했다고 그 변호인들을 욕하는 건 반대한다. 누군가는 정의구현을 위해 그 일을 해야 한다.

단 세상의 시선이 있어서 변호인들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상징적 인물들을 동원한 인맥과 재력은 놀랍다.

옛날 짐 정리하다 귀한 게 나오심.. 요즘 필름 구하기 힘들다는데. 찾아보니 필름 생산이 이뤄지고는 있는…

옛날 짐 정리하다 귀한 게 나오심.. 요즘 필름 구하기 힘들다는데. 찾아보니 필름 생산이 이뤄지고는 있는데 한번 망한 보급망같은 게 제대로 복구도 안되고 한국은 수요가 충분하지 않아서 필름 공장 유지할 규모가 안돼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공급부족이 생긴다 함. 사실 후지필름도 코닥에 필름 생산을 위탁해왔는데 이번에 코닥이 부도위기에 있어서 어찌될지 모름. 후지는 기술력과 자금이 있지만 후지 전체 사업에서 필름은 1%도 안되기 때문에 화학약품으로 환경 비용이 확 커질 수 있는 필름생산에 굳이 투자를 할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왕 찰스. 왕세자 윌리엄. 해리. 스페인: 레오노르 공주. 노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왕 찰스. 왕세자 윌리엄. 해리. 스페인: 레오노르 공주. 노르웨이: 잉그리드 알렉산드라 공주. 스웨덴: 빅토리아 공주. 벨기에: 엘리자베스 공주. 덴마크: 크리스챤 왕자. 네덜란드: 카타리나 아말리아 공주. 일본: 히사히토 친왕(일본은 2차대전 이래 황족은 군대에 가지 않음.) 태국: 국왕 라마 10세 —- 한국은 왕실이 없으니까 아무도 대표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안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