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September 2025

왜 자꾸 LCS그룹이라는 필리핀 회사가 한국에 투자 계약을 하고 한국 정치인들은 LCS의 필리핀 사업에 한국…

왜 자꾸 LCS그룹이라는 필리핀 회사가 한국에 투자 계약을 하고 한국 정치인들은 LCS의 필리핀 사업에 한국 정부 예산을 보내주려 노력하는 걸까. 허허허. LCS 그룹은 현 필리핀 대통령 봉봉 마르코스의 권력기반인 일로코스 지역 지자체장 하던 사람인 샤빗 싱손 회장이 설립했다. 이런 저런 지역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2013년 경 갑자기 사업을 등록하고 마구 확장. 전세기 사업, 미인대회 사업 이런 것도 하고, 특히 광산사업, 인프라사업 등 정부 예산, ODA, PPP를 끌어오기 좋은 업종으로 2016년 쯤 부터 확 진출하기 시작한다. 필리핀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소형버스 전기화 사업에 진출한다. 바로… 마르코스 집안이 본격적으로 정치 중앙무대로 복귀하는 시점이다. 내가 보기엔 LCS그룹은 마르코스 복귀 준비용 경제 기지다. 2013-14년 : 지역 정치인 싱손이 자기 개인 사업을 중앙정부 예산과 연결될 수 있는 사업으로 재편한다. 2014-16년 : 마르코스가 대권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LCS가 인프라 광업 통신업 등을 등록한다. 2017-22년 : 마르코스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정부 ODA, 외국 자본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LCS가 중국, 한국 기업과 협력 창구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2025년 현재는 싱손 회장이 마르코스 대통령과 대립하며 관계가 깨졌다고 한다. 그냥 회사만 마구 등록하고 있는 회사가 재계 10-13위가 됐다고 한다. LCS가 필리핀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사업들, 과연 존재할까. 에효. 나머지는 언론과 정부 분들이 알아서 찾아보세요.

필리핀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왜 권성동이 수천억 한국 예산을 필리핀으로 옮겨가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

필리핀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왜 권성동이 수천억 한국 예산을 필리핀으로 옮겨가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지 알 수 있다. '정상적인 부패국가'라면 예산이 집행될 때 일부가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그래도 남은 돈으로 사업은 돌아간다. 최소한 도로는 깔리고, 댐은 세워진다. 그런데 필리핀은 다르다. 여긴 예산이 통째로 사라지는 나라다. 국민의 삶을 지키기 위한 홍수 방지 기금이 증발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집을 잃는 주민들은 늘어나는데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 필리핀 거리는 이 현실에 분노한 사람들로 들끓고 있다. 필리핀 국가예산 6조 페소 중 1조 페소, 한국돈으로 25조 원이 사라졌다 해서 ‘트릴리언 페소 행진’이라 불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수도 마닐라를 뒤덮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도둑질 멈춰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일부 지역에선 충돌과 체포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건 단순한 폭발이 아니라 누적된 절망이 표출된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 봉봉 마르코스가 이 부패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의 정권 자체가 원래부터 다양한 권력 파벌의 타협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가문 지지 세력부터 두테르테 진영, 지방 유력 가문들까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이번 조사에서 이들을 정면으로 건드리면 정권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은 ‘부패 척결’을 약속하면서도 실질적인 처벌에는 손을 대지 못한 채 시간을 끌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필리핀 정치의 구조다. 이 나라는 아직도 중앙 권력이 지방 군벌과 재벌 가문에 기대어 유지되는 반(半)봉건 체제에 가깝다. 대통령이 법을 집행한다 해도 지역 권력자들이 경찰과 검찰, 의회까지 움켜쥐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돈줄을 끊지 못하면 개혁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지금의 스캔들도 그렇게 흐지부지될 위험이 크다. 그리고 이 나라는 이미 폭력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두테르테 정권 당시, 남부 민다나오의 이슬람 반군이 정부군과 수개월 간 전면전을 벌였고, 마라위 시 전체가 잿더미가 된 끝에야 진압이 끝났다. 이 경험은 필리핀이 ‘폭력이 선택지로 떠오르면 실제로 도시 하나쯤은 사라질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지금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서 폭력을 동반한 저항으로 기울고 있다는 건,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이제 이후 전개될 수 있는 현실적 시나리오는 두 가지 축으로 갈린다. 첫째, 마르코스 정권이 부패 척결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다 내부 파벌 동맹이 붕괴하는 시나리오다. 두테르테 진영과 지방 정치 엘리트들이 반발하고 연정이 갈라지면 의회와 사법부, 지방 행정조직의 협조가 멈추고 정권은 마비된다. 안 그래도 집권 뒤 부통령 사라 두테르테와 권력 싸움하느라 지금까지 나라가 시끄러웠다. 충성파 관료들이 이탈하거나 야권과 손잡으면서 조기 탄핵론이 떠오를 수 있고, 일부 군 장성들이 “국가 안정을 위한 지도력 교체”를 요구하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마르코스는 개혁에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정치 기반을 잃고 레임덕 상태에 빠지거나 조기 퇴진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 부패를 끊으려면 지방 파벌들의 권력을 유지해주는 법체계를 건드려야하는데 마르코스 대통령 집안도 그 법 덕에 일로코스 지방의 맹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성난 시민들이 거리에서 정권 자체를 무너뜨리는 시나리오다. 정부가 부패세력을 비호하거나 미적거리는 사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일부 지역에선 반정부 조직이 실질적인 치안·행정을 장악할 수도 있다. 폭력 충돌이 격화돼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군과 경찰 내부도 분열될 수 있으며, 결국 대통령이 퇴진하고 과도정부나 조기 대선으로 이어지는 ‘피플파워형 정권 교체’가 현실이 된다. 이 경우 필리핀의 정치 질서는 완전히 재편되고, 과거와는 다른 권력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무엇이 현실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부패와 봉건 질서를 그대로 둔 채 이 사태를 피해 가는 길은 없다는 점이다. 이미 한 번 열린 민심의 뚜껑은 닫히지 않는다. 피플파워는 이 나라에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언제든 다시 현실이 될 수 있는 변수다.

1979년 2월, 비엣남-중국 국경 근처 산촌에 이른 아침 안개가 깔렸다. 밤새 내린 빗방울이 참호 벽에 얼…

1979년 2월, 비엣남-중국 국경 근처 산촌에 이른 아침 안개가 깔렸다. 밤새 내린 빗방울이 참호 벽에 얼어붙어 있었고, 차가운 공기는 숨소리조차 하얗게 만들었다. 흙벽으로 쌓은 방어진지 옆에는 헌 교복을 입은 소년소녀들이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논두렁에서 개구리를 잡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에는 어린 티가 사라져 있었고, 일부 총을 쥔 손은 작지만 단단히 굳어 있었다. 어제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포성의 메아리가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쿵, 하는 소리가 땅을 진동시킬 때마다 참호 안의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다. 여인들은 나무로 엮은 참호 뒤편에서 밥을 짓고 부상자를 위한 붕대를 감는 손길이 바쁘게 오갔고, 일부는 총을 메고 소년들과 함께 참호에 섰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상대는 인구도 군사력도 비교할 수 없는 대국 중국이었다. 그것도 바로 몇 년 전까지 공산주의 혈맹이었는데 갑자기 명분 없이 쳐들어온 적이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몇 년 전, 이들 대부분은 아이였지만 바로 이 땅에서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미국을 밀어낸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전투기와 폭격기, 네이팜탄과 항모를 가진 제국도 결국 이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는 기억은 두려움을 자부심으로 바꾸고 있었다. 바람은 차고 총열도 차가웠지만, 그들의 눈빛은 오히려 뜨거웠다. 두려움과 결심이 섞인 눈빛 속에는 "이번에도 지키겠다"는 조용한 맹세가 있었다. 그날의 참호에는 기묘한 공기가 흘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폭격에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잔잔히 깔린 자부심. 다시 한 번 역사가 시험을 던졌고, 사람들은 그 시험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디엔비엔푸에서 비엣남은 전세계에 식민지를 가진 제국 프랑스의 주력부대를 포위하고 격파하며 식민지배를 끝냈다. 1954년 5월의 그 1차 비엣남 전쟁 승리는 '식민지 종식'의 상징이 됐다. 이후 세계 최강국 미국이 침입한 2차 비엣남전에서도 비엣남군은 장기전을 통해 미군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파리협정으로 미군은 철수했고, 하노이는 무조건 철수와 정권 교체를 요구하며 협상을 끌고 갔다. 이 두 전쟁은 "인민전·장기전" 교리의 실증이 됐고, 비엣남 사회 전체 동원 체계를 굳혔다. 1979년 중-비엣남 전쟁은 비엣남이 20세기 들어 세번째로 대국과 맞붙은 국경전이었다. 중국은 비엣남의 캄보디아 침공 & 크메르 루주 정권 축출(1978년 12월)에 대해 '교훈을 주겠다'며 20만 병력으로 북부 2개 축선을 공격했다. 하지만 비엣남은 북부 상비군과 민병, 자위조직을 대량 동원해 방어선을 유지했다. 이때 비엣남 주력군 상당수는 남부의 캄보디아 전선에 묶여 있었다. 중국의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 루주 구원 및 비엣남의 캄보디아 개입 저지였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중국은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철수했으나 비엣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1989년까지 지속됐고 크메르 루주 정권과 폴 폿은 돌아오지 못했다. 캄보디아는 중국의 자본력이 들어오며 모든 게 달라진 수년 전까지 비엣남에 문화적/군사적/경제적으로 종속돼 있었다. 비엣남의 방어력은 "인민전" 조직 원리에서 나왔다. 보응우옌잡의 교리에 따르면 "장비가 열세여도 정당성과 전략, 조직 동원을 결합하면 현대 제국주의 군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부 지방의 민병과 청년단, 여성조직은 참호 구축, 보급과 후송, 근접 방어에서 전선을 받쳤고 주력군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중국군의 심층 돌파를 억제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비엣남군의 주력 무기 상당수가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남비엣남에게서 인수받은 미제 장비였다는 점이다. M16 소총, M60 기관총, M48 전차, 105mm 곡사포 등 미국이 남기고 간 첨단 무기들이 이제 또 다른 대국의 침공을 막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군에게는 "미국이 수십만 병력으로도 무릎 꿇었던 상대가 그 미국 무기로 자신들을 상대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컸다. —- 중국 측에서는 이 전쟁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치욕적인 기억이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덩샤오핑은 "단기 징벌전"이라는 애매한 목표를 설정했다. 완전 점령도, 체제 전복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의 작전은 일관성을 갖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으로 10년간 숙청과 마비를 겪은 인민해방군은 사실상 "혁명정치조직"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숙련 장교층이 대거 사라졌고 지휘와 통신, 정보 체계가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1950년대 소련제 장비를 개조한 구형 무기, 낮은 기계화율, 부족한 장갑차와 자주포는 산악과 도시 전투에서 비엣남군의 지연전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중국군은 빠른 진격을 기대했지만 상대는 수십 년간 게릴라전 경험을 가진 군대였다. 비엣남군의 '한 치씩 버티는' 방식 앞에서 전력 우위를 살리지 못했다. 철수하며 "징벌 목적 달성"했다고 홍보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덩샤오핑까지 정치적 책임을 질 뻔 했다. 덩샤오핑은 대대적 군 개혁에 나섬으로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역사를 길게 보면 1979년은 "천년 악연"의 현대적 변주였다. 한무제의 남월 병합(기원전 111)로 시작된 중국의 지배, 응오꾸옌의 박당강 승리(939)로 자주 회복, 1407-1428년 명의 재점령과 레러이의 독립 회복까지, 비엣남은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정치적 독립을 지켜온 경험을 집단기억으로 축적했다. 하지만 중국의 철수가 관계 정상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 국경 교전이 지속됐고 1991년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2014년 석유시추 갈등 등으로 구조적 불신은 해소되지 못했다. 이 전쟁이 비엣남에 남긴 유산은 명확하다. "대국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대국 중국이 침략해왔는데 우리는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나서서 물리쳤다"는 자신감이다. 최근 참전용사 네트워크와 지역 기념사업이 이 기억을 복원하며 비엣남 국가 정체성의 핵심 테마인 주권, 영토, 자주를 현재형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반면 중국에게는 뼈아픈 교훈이었다. 이 작전 실패의 충격 이후 중국은 1984년 대규모 군사개혁을 단행했지만 여전히 이런 규모의 해외 군사작전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전쟁의 목표가 비엣남의 군사적 팽창을 눌러주겠다는 거였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혼이 나고 주늑들어버렸다. 경제력으로는 세계 1위에 근접했지만, 수치상으로는 지역 최강이지만 1979년의 그 기억은 여전히 중국이 스스로 '과연 실제로 군사 작전을 나갔을 때 생각대로 될 것인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이게 다 비엣남 때문이다.

우피 골드버그의 본명은 캐린 일레인 존슨 Caryn Elaine Johnson. “우피”는 방귀 소리를 내는…

우피 골드버그의 본명은 캐린 일레인 존슨 Caryn Elaine Johnson. “우피”는 방귀 소리를 내는 장난용 풍선 ‘우피 쿠션(whoopee cushion)’에서 따온 별명이고, “골드버그”는 흑인인데 전형적 유태인 성씨를 써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도록 붙인 이름이다. 이름부터가 그녀의 무대였고, 세상에 자신을 새기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녀의 삶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난독증으로 학교에서 소외됐고, 청소년기에는 마약과 가난 속에서 방황했다. 열일곱 살에 엄마가 되었고, 딸이 열일곱에 아이를 낳아 우피는 서른네 살에 할머니가 됐다. 청소부, 시체 화장 담당자, 벽돌공, 벽화 화가 같은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런 경험들이 결국 그녀를 무너지지 않는 사람으로 단련시켰다. 특히 벽돌공으로서는 기능공으로서 실력을 인정받아서 벽돌공 노조에 초청받고 샌디에고 동물원 벽 건설에 참여했었다. 연기를 시작한 건 단순한 직업 선택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각”을 찾기 위해서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극장에서 시작한 모놀로그 공연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목소리를 혼자서 표현하며 입소문을 탔고, 이 공연을 본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녀를 [컬러 퍼플]에 캐스팅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후 [고스트]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수상 당시에도 마약에 취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해티 맥대니얼 이후 무려 51년 만에 연기 부문에서 오스카를 받은 첫 흑인 여성 배우였다. 그리고 [시스터 액트]는 우피 골드버그를 단순한 연기상 수상자에서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올려놓은 작품이었다. 코미디와 음악, 신앙과 유머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 영화에서 우피는 범죄를 피해 수녀원에 숨어든 재즈 가수로 등장해,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존재가 된다. 이 작품은 흑인 여성 배우가 할리우드 주류 상업 영화의 절대적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그가 가진 에너지와 유머, 인간적인 매력을 전 세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단지 성공한 작품이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 그대로” 사랑받은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의 업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피는 에미상, 그래미상, 오스카상, 토니상을 모두 받은 극소수의 예술인, 이른바 EGOT 수상자다. 연기, 음악, 텔레비전, 연극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모두 석권한 인물은 지금까지 21명 뿐이다. 사적인 삶도 남달랐다. 제임스 본드 배우 티모시 달튼,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가장 남성적인 매력을 가진 배우로 꼽히던 테드 댄슨과 연인관계였다. 우피 골드버그는 할리우드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다. 외모나 전통적인 스타성, 출신 배경으로 승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에,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자리를 쟁취해야 했다. 이름부터 경력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관객들도, 제임스 본드도, 그의 매력에 모두 푹 빠졌다. 웃음과 상처, 좌절과 도전이 뒤섞인 이 여정이 결국 한계를 부수는 하나의 서사가 되었고, 그래서 우피 골드버그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길이 없던 곳에 길을 만든 개척자의 이름으로 남았다.

[대부]와 중세 봉건 질서를 극화한 [왕좌의 게임]은 장르도, 배경도, 형식도 다르지만 근본 구조는 놀라울…

[대부]와 중세 봉건 질서를 극화한 [왕좌의 게임]은 장르도, 배경도, 형식도 다르지만 근본 구조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두 작품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윤리극을 넘어, 권력과 폭력의 구조 속에서 원칙, 타협, 오만이 어떻게 인간과 가족, 그리고 세대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치밀하게 해부한다. [대부]는 표면적으로는 마피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 것 같지만, 실제로는 3대에 걸친 원칙과 타협,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업보를 정밀하게 그린 서사다. [왕좌의 게임] 역시 처음에는 주요 인물들이 예측 불가능하게 무작위로 죽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을 고수하는 자는 체제에 의해 도태되고, 권력을 쥔 자는 타협의 대가를 자손에게 떠넘기며, 그 후손들은 결국 선대의 선택이 만든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시대와 장르를 다루지만, 인간이 권력과 도덕 사이에서 어떤 순환을 반복하는지를 놀라울 만큼 비슷한 궤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정의로운 자의 몰락’이 반복되는 구조다. [왕좌의 게임]의 네드 스타크는 진실과 정의를 믿고 끝까지 도덕적 원칙을 지키려 하지만, 정치의 룰을 거부한 대가로 단두대에 오른다. [대부]의 안토니오 안돌리니(비토 코를레오네의 아버지) 역시 폭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다 가족을 몰살당한다. 두 인물의 선택은 각각 개인의 존엄을 수호한 행위였지만, 체제는 그런 선택을 철저히 응징한다. ‘올바름’은 도덕적으로 숭고하지만, 부패한 세계에서 그것은 생존 전략이 되지 못한다는 냉혹한 진실이 드러난다. 왕좌의 게임에서 말하는 “이기거나 죽는다”는 말은 곧 이상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구조적 선언이다. 이에 반해 타협과 계산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서사는 그 자체로 비극이다. 비토 코를레오네와 타이윈 라니스터는 폭력과 음모를 수단화하며 권력을 세습 가능한 유산으로 만든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가족은 결국 권력 구조가 만든 부패를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범죄를 대신 속죄하고, 딸은 불안정한 가문을 지탱하기 위해 인간성을 포기한다. 그들이 구축한 ‘제국’은 겉으로는 번영을 누리지만, 내면은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다. 왕좌의 게임의 냉혹한 룰은 여기서도 변하지 않는다. 이들은 살아남지만, 권력의 대가를 고스란히 지불하며 이들이 최고 가치로 여겼던 가족이 파괴되고 업보는 후대로 넘어간다. 세 번째 부류는 이 두 길을 모두 걷고자 했던 이들이다. 마이클 코를레오네와 롭 스타크는 원칙을 완전히 버리지도,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애초에 체제 자체가 타락을 전제로 작동하는 만큼, “절반의 타협”은 양쪽의 파멸만 불러온다. 마이클은 가문의 죄업을 청산하겠다며 폭력의 수렁을 더 깊게 파고들고 눈 앞에서 사랑하는 딸과 가족을 잃으며 외로운 최후를 맞이한다. 롭은 사랑과 명예를 동시에 지키려다 정치적 신뢰를 잃고 무참히 살해된다. “두 세계의 균형”이라는 이상은 결국 양쪽에서 모두 배척당하는 환상일 뿐임을 두 작품은 보여준다. 더불어 롭 스타크의 선택에 대한 대가는 다시 한번 후세, 아내의 뱃속의 아이까지 함께 치른다. 왕좌의 게임의 규칙은 변하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쥐려는 자는 결국 가장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구조는 단지 픽션 속 비극이 아니다. 폭력과 불평등을 토대로 작동하는 체제 속에서는 선택 자체가 곧 타락이다. 원칙을 지키면 제거되고, 타협하면 부패하고, 둘을 아우르려 하면 체제에 삼켜진다. [대부]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영혼을 거래 가능한 화폐로 만들고, [왕좌의 게임]에서 봉건 질서는 명예마저 정치의 도구로 삼는다. 결국 인간이 체제 속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길은 파멸이라는 공통된 목적지로 수렴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파멸이 개인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윤리는 체제의 논리 앞에서 무력해지고, 심지어 도덕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식으로 변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진실과 자유를 지키려 하지만 전체주의 체제는 그의 사상을 끝내 굴복시킨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요제프 K는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체제의 기계 속에서 파멸한다. 이처럼 선한 개인이 구조를 이기지 못한다는 비극적 패턴은 20세기 문학의 핵심 구조이자, [대부]와 [왕좌의 게임]을 관통하는 서사적 운명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개인의 도덕성이나 의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즉 “선한 개인도 악한 구조 안에서는 패배한다”는 인식이야말로 20세기 후반 이후 대중서사의 핵심 메시지가 되었고, [대부]와 [왕좌의 게임]은 그 메시지를 각자의 시대에 맞게 구현한 작품들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정의로워도 죽고, 타협해도 망하고, 오만해도 무너진다. 남는 것은 구조 그 자체, 그리고 그 구조가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비극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윤리가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그 취약함을 먹고 자라는 체제가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주는 냉정한 문화적 자화상이다.

스페인어에 이중 L, LL의 발음이 지역마다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쌀을 이용한 요리 paella라는…

스페인어에 이중 L, LL의 발음이 지역마다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쌀을 이용한 요리 paella라는 단어는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는 빠에야로 발음된다. ll 가 y 처럼 발음된다. 이걸보고 yeísmo, 예이스모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는 ll가 sh 처럼 발음된다. paella가 빠에샤가 된다. 이걸 sheísmo 셰이스모라고 한다. 근데 필리핀에서는 ll가 들어간 단어나 이름에서 ll를 ly로 발음한다. paella를 빠엘랴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중세 스페인어에서는 모두 이렇게 발음했다. 이걸 lleísmo 례이스모라고 한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화 한 1565년 경 스페인에서는 례이스모에서 예이스모로의 변화가 진행중이었는데, 필리핀에 이주한 그룹은 례이스모가 강한 카스티야 북부와 레온 등에서 갔고, 멕시코와 중남미는 안달루시아와 카스티야 남부 이민자들이 주로 갔다.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기득권 개혁에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리고 칼을 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기득권 개혁에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리고 칼을 휘두르는 ‘직접 개입형’이고, 다른 하나는 토론과 조율 과정을 다양한 세력과 대중에게 맡기며 변화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분산·숙의형’이다. 전자는 속도가 빠르고 성과와 책임이 분명하지만 에너지를 급속히 소진한다. 후자는 느리지만 성공할 경우 합의 기반이 단단하고 제도화 가능성이 높다. 보수 정권은 거의 예외없이 직접 개입형이었다. 4대강, 일제 과거사 불가역적 합의, 역사교과서 등 대표적 정책들은 대부분 정부가 명령하고 국가가 동원되는 방식이었다. 보수 지지층은 강한 리더십을 원하고 빠른 개혁을 선호한다. 국가가 방향을 정하고 민간이 따르는 구도에 익숙하다. 민주진영 지지자들도 사실 이 성향이 강하지만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은 기본적으로 골수까지 민주주의자들이라 제왕적 리더십을 원하던 지지자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김영삼 역시 전형적인 직접 개입형이었다.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전두환·노태우 구속 같은 개혁을 대통령 자신이 칼을 휘둘러 처리했다. 아직 검찰이 머리를 들기 전이고 조중동이 협조적인 평온한 환경이었다. 국민의 열광을 얻고 지지율 92%를 기록했으며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를 빠르게 제거했다. 다행히 한번 개혁으로 제도화가 가능했던 이슈들이었지만, 결국 개혁 동력은 2-3 년 안에 고갈됐다. 아들의 비선조직, 후반기 외환위기 대응에서 나타난 혼란은, ‘대통령 개인의 힘’만으로는 장기전이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김대중은 적대적 언론환경에도 그 한계를 절묘하게 극복했다. 외환위기 수습과 구조조정 초기에는 결단을 내리면서도, 이후에는 반대 진영의 인사까지 정책 설계와 논의에 참여시키며 숙의 과정을 설계했다.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 노동계·재계·정부가 합의안을 만들게 했고, 금융 재벌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빅딜 등으로 개혁 당사자들의 의견도 존중했다. 햇볕정책에서도 보수적 군인 출신 임동원 등을 기용해 보수 안보 엘리트의 심기를 살폈다. 심지어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던 전문가들까지 개혁위원회에 포함시켜 논쟁을 제도화했다. 이러한 참여 구조 덕분에 개혁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노무현은 숙의형의 이상을 가장 멀리 내다본 인물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정치적 자원이 부족했고 구조적 저항을 돌파하지 못했다. 공론화, 국민참여, 토론 중심의 국정 운영을 시도했으나 성과보다 갈등이 더 부각되며 “주체 없는 개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은 반대로 숙의형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례다. 공수처 설치나 탈원전, 부동산 대책처럼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정책 방향을 수정하고 사회적 논의를 거쳤다. 속도는 느리고 체감은 약했지만, 정책의 책임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지 않고 사회 전체로 분산되는 효과를 노렸다. 윤석열의 난, 검찰개혁처럼 직접적 수술이 필요한 이슈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했으나, 공수처 제도화, 수사 기소 일부 분리 등 구조적 개혁을 성공시켜 훗날 윤석열 내란 진압에 토대를 마련했다. 이재명은 성남·경기 시절을 보면 직접 개입형 성향이 강했다. 행정·예산·정책을 본인이 진두지휘하며 결단력 있게 추진했다. 하지만 정권 초반 4개월 동안은 외교·외부 변수 탓인지 거의 전형적인 분산형 경로를 걷고 있다. 정책 추진도 조율과 토론 중심으로 진행되며, 전면 충돌을 피하는 모습이다. 인사와 정책토론에 속도전을 원하는 그룹과 급진적 개혁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룹이 동시에 들어가 실제로 갈등을 겪으며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아직 제대로 된 정책 스타일이 나오기에는 이르지만 직접적 수술이 필요한 개혁 대상이 많아서 결국 직접 칼을 들어야할 곳에는 직접 나서며 혼합형으로 갈 것으로 본다. 조국이 만약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개혁 스타일은 문재인과 노무현의 숙의형을 기본으로 하되, 김대중처럼 전략적으로 결단을 결합하는 혼합형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그는 학자 출신답게 정책 토론과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고, 검찰개혁 논쟁에서도 공론장과 제도 설계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시에 본인과 가족이 겪은 정치·사법적 갈등을 통해 기득권 구조의 뿌리 깊은 저항을 체감했고 정치 입문 결정 때의 결단력을 봤을 때, 필요할 경우 정면돌파형 결단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합의와 토론을 전제로 하되, 넘지 못하는 벽 앞에서는 직접 칼을 드는’ 전략적 숙의형 개혁이 조국의 스타일이 될 가능성이 크고 그게 맞다. 이는 김대중의 방식을 한층 현대적으로 변형한 형태이자, 이재명이 나아갈 방향과도 일부 겹치는 지점이다. 진보 개혁이건 보수 개혁이건 개혁의 길은 한 가지가 아니다. 빠르게 칼을 휘두르는 것도, 느리지만 단단히 토론을 거치는 것도 각각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장기적 성과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김대중 모델이 여전히 가장 참고할 만하다. 결단으로 판을 열고, 숙의로 제도를 굳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구조적 변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배워야 할 전략이다. —- 1980년대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전형적인 직접 개입형 리더십을 구현했다. 취임 직후 공공부문 구조조정, 광산노조와의 정면충돌, 공기업 민영화, 금융시장 규제 해제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칼에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사회 갈등과 파업이 벌어졌지만, 정치적 책임과 성과가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면서 “철의 여인”이라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확립됐다. 이 직접형 모델은 개혁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라는 부작용도 컸다. 신자유주의를 향한 돌진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영국 경제 구조가 이후 20~30년간 완전히 재편된 점에서 어쨌건 ‘결단주의 개혁’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직접 개입형 스타일로 우정공사 민영화,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밀어붙이며 정치판 전체를 재편했다. ‘반개혁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국민투표에 가까운 총선 전략을 통해 개혁을 관철시킨 것은 카리스마 리더십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저항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제도화 과정에서 후속 정부가 이를 지속하지 못한 한계도 뚜렷했다. 이는 직접형 개혁의 단점 ― 성과가 리더십의 지속성과 직결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정부는 인종차별 철폐라는 거대한 사회 개혁 과제를 앞두고 직접 명령 대신 숙의와 참여를 택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붕괴 이후 보복이 아닌 화해를 선택하고,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진실을 밝히도록 한 정책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개혁 과정의 주체로 끌어들였다. 이 전략은 속도는 느렸지만 제도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극단적인 보복 정치나 내전을 피하면서 국가 통합을 이뤄냈다. 만델라의 사례는 숙의형 개혁이 사회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다는 대표적 예다.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개혁 모델은 장기적 분산형의 교과서다. 스웨덴, 덴마크 등은 1990년대 재정위기 이후 정치권, 노조, 기업, 시민단체를 모두 포함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연금, 노동시장, 조세제도를 재설계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정책은 국민적 합의 위에서 추진됐고, 이후 정권이 바뀌어도 개혁 방향이 유지되며 장기적 제도로 자리잡았다. 이는 숙의형 개혁의 지속성, 제도화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1978년부터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한 채 개혁을 추진했지만, 모든 걸 덩의 명령으로 해결한 건 아니었다. 초기에는 농업 생산책임제와 외자 유치 특구 설립 등에서 결단을 통해 돌파구를 열었지만, 이후 정책의 구체적 설계와 실행은 지방정부·학계·기업가 집단에 상당 부분 위임했다. 예컨대 각 지방이 서로 다른 모델을 실험하고 중앙이 이를 평가·확산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분산·숙의형 요소였다. 이 절충 전략 덕분에 21세기 들어 체제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사에서 가장 빠른 경제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

[미키 17]을 봤다. [설국열차] 느낌인데 풍자를 더 늘렸다. [기생충]이나 [살인의 추억]에 비하면…

[미키 17]을 봤다. [설국열차] 느낌인데 풍자를 더 늘렸다. [기생충]이나 [살인의 추억]에 비하면 사회비판은 뭔가 형식적이 된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던 계급 설정은 일반인과 소모품과 지도자의 갈등 구도로 단순화되고 형식만 남았다. 하던거라 하긴하는데 사회비판에 성의는 없는 영화. 복제인간과 정체성 문제에서는 2009년 영화 [Moon]의 문제의식이나 갈등구조를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 뭔가 다른 점이나 깊게 들어가는 부분이 있을까 기대하고 봤지만 풍자 코미디가 시작되며 앞에 던졌던 질문의 무게마저 흐려진다. 패티슨은 독특한 캐릭터 연기를 하고 있고 러팔로는 과장된 풍자극을 하고 스티븐 연은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전혀 버무려지지 않고 겉돈다. 셋이 안 친한가 보다. 연기에 대한 대화가 더 필요했을 것 같다. 봉준호 영화하면 특히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보여준, 쿠로사와나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고전적이면서 능동적이고 지능적인 앙상블 연출이 남이 따라하기 힘든 특색이다. 한 장면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들이 관계와 감정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도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건 그냥 다른 흔한 감독이 했어도 나올 보통 수준 영화다.

꼭 잘했다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많은 분들이 AI의 효용성, 성공 가능성 등을 예견할 때 발언 시점 당시의…

꼭 잘했다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많은 분들이 AI의 효용성, 성공 가능성 등을 예견할 때 발언 시점 당시의 AI 능력을 고정시킨 후 "이런 걸로는 절대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 같은 결론을 내는 게 너무 이상했다. 매달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AI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왜 예측에서는 AI가 발전을 멈출거라고 전제한 걸까.

그냥 두려움 때문에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