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반도체의 역사는 같은 면적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고, 기능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이 흐름을 거스르며 세상을 바꾼 칩이 있다. 1975년에 등장한 MOS 6502다.

1977년 Apple이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으로 히트시키며 흐름을 바꿨지만, 애플이 모든 부품을 직접 만든 건 아니었다. Apple II는 시중의 범용 부품을 조합해 만든, 저렴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기였다. 그 혁신의 중심에 6502가 있었다.
당시 컴퓨터용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던 건 Motorola 같은 대기업이었다. 철학은 명확했다. ‘가능한 한 많은 기능을 칩 하나에 넣고, 가능한 한 다양한 용도로 쓰게 하자.’ 그 결과물이 1974년에 나온 6800 계열이다. 정교했고, MITS의 Altair 680, 각종 핀볼 머신, GM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까지 6800가 들어갔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6800은 당시 360달러, 현재 가치로 약 330만 원 수준이었다.

6800을 설계한 모토롤라 내부 엔지니어들이 먼저 문제를 지적했다. “이건 너무 비싸서 시장이 제한된다. 25달러짜리(지금 가치 21만원) 보급형 칩을 만들자.” 회사는 거절했다. 엔지니어들은 회사를 나와 MOS Technology로 갔고, 거기서 6502를 만들었다.
6502의 설계 철학은 ‘덜어냄의 미학’이었다. 모토롤라가 기능을 더할 때, 그들은 구조를 단순화하고 파이프라인을 효율화했다. 16비트 연산 같은 고급 기능은 과감히 버리고, 대신 자주 쓰는 첫 256바이트 메모리(Zero Page) 접근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덕분에 1MHz 클럭으로도 경쟁사의 2~4MHz급 체감 성능을 냈다.
이 단순화의 논리는 나중에 RISC 디자인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진다. 복잡한 마이크로코드 중심의 CISC에서 벗어나, 단순한 명령을 빠르게 반복하는 방식. 6800에서 6502로 이동한 사고방식이 그대로 RISC로 확장된 셈이다.
25달러짜리 이 칩이 등장하자 판이 바뀌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MOS 6502로 Apple I과 Apple II를 만들었다. Commodore는 PET, VIC-20, C64를 쏟아냈다. 닌텐도의 대히트작 NES 패미컴도 6502 계열이다.

팝컬처까지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영화 [터미네이터] 1편에서 T-101의 시점 화면에 등장하는 명령어들은 실제 MOS 6502 어셈블리다. 25달러짜리 칩으로 인공지능을 묘사한 셈이다. 이 농담은 [퓨처라마]에서 벤더의 머리 속이 6502로 설정되며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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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0에 대한 반발로 6502가 등장하듯 인텔 8080를 만들던 엔지니어들은 76년에 Zilog라는 회사를 차리고 8080의 기능을 대폭 확장하면서도, 시스템 구성은 훨씬 간편하게 만든 Z80을 내놓았다. 완전 호환이 됐는데 훨씬 싸고 전원 공급이 간단해서 대박이 났다. MSX 컴퓨터, 오락실 기판, 닌텐도 게임보이(8080과 혼종), 대우 재믹스, 겜보이, 알라딘보이, 네오지오 등이 모두 Z80를 썼다.


6502과 Z80 의 도전에 모토롤라와 인텔은 16비트 선점으로 대응했다. 모토롤라는 6502와 Z80 가 이미 장악해버린 저가형 8비트 시장을 되찾을 방법은 없다고 판단하고 1979년에 16비트 68000라는 칩을 만들었다. 경쟁자들이 싼 가격으로 복제할 수 없는 더 강력한 성능으로 승부했다. 애플 매킨토시, 세가 메가 드라이브, 스트리트 파이터 2 등이 사용하는 캡콤 CPS 기판 등이 68000를 썼다.

인텔 역시 Z80에 이미 패배한 뒤 1978년 x86 의 시초가 되는 8086을 개발한다. 역시 압도적 16비트 연산 능력 위주의 칩이었다. 1979년의 후속작 8088이 가성비까지 잡으면서 IBM 호환 PC의 표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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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애플은 68000를 사용해 매킨토시를 내놓지만, IBM 호환 PC의 성공으로 1990년대 초 세상은 인텔이 점령해가고 있었다.
애플은 매킨토시를 계속 개발하자면 68000 후속작이 필요했지만 (아직) 인텔 칩을 쓰긴 싫었고, 원래 강자였던 IBM은 자기네 기술로 PC 시장을 만들어냈지만 이상하게 그 과실은 인텔이 가져가고 있는 게 싫었다. 애플, IBM, 모토롤라가 1991년에 합심해서 PowerPC (Performance Optimization With Enhanced RISC – PC)를 개발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만 RISC 기반이다. 6800 에서 6502로 갔던 단순화 논리를 그대로 사용했다. 68000와 인텔 x86는 복잡한 CISC 구조고, 파워피씨는 명령어를 단순하게 줄이고 미친듯이 빠르게 실행하는 RISC 구조다.
94년에 애플은 PowerPC를 탑재한 매킨토시들을 출시했고 대성공이었다. 인텔 펜티엄보다 훨씬 빨랐다. 스티브 잡스가 복귀해 만든 아이맥 등도 PowerPC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후 결국 PowerPC는 인텔의 아성을 깨지 못하고 무너졌다. 주로 발열과 전력 소모 문제가 너무 컸다. 스티브 잡스는 노트북을 만들고 싶었는데 파워피씨 칩을 넣었다가는 허벅지가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인텔이 모바일에 특화된 코어 2 듀오 등을 발표하며 애플이 2005년 PowerPC를 버리고 인텔 칩으로 갔고 PowerPC는 끝났다.
신기하게 앞의 칩들과 마찬가지로 PowerPC 는 닌텐도 게임큐브, 위, 마이크로소프트 Xbox 360, 소니 PS3 등에서 천하통일을 이뤘다.

그러나 인텔이 모바일 혁명에 뒤쳐지며 역사는 다시 한 번 뒤집어져 애플은 애플 실리콘으로 ARM/RISC 기반 칩으로 돌아온다. 단순한 명령어와 공격적 실행이 고성능으로 이어진다는 교훈과 시스템 전체를 아키텍쳐로 보는 시각, 타사 ISA 로드맵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PowerPC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들도 RISC 기반으로 6502와 PowerPC 철학을 잇기에 이제 세상은 RISC 주도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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