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베스 이전의 베네수엘라는 석유 부국이었지만 부는 위로 고여 있었다. 중산층과 엘리트는 기업과 노조, 연금으로 소득을 방어했고 빈민 다수는 교육과 의료에서 배제됐다. 차베스는 석유 수익을 국가가 통제하고 이를 교육과 의료, 식량으로 재분배하겠다고 했다.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고 동시에 기존 질서의 이해관계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1999년 국민의 45-50%가 빈곤층이었고 그중 절반인 인구의 20-25%가 극빈층이었다. 2013년 차베스 사망 당시 이 비율은 빈곤층 25-30%, 극빈층 7-9%로 떨어졌다. 극빈국가에서 멋진 집과 차를 소유하고 미국에 투자를 하는 부유한 삶을 살던 도시 상층 중산층과 엘리트 일부가 극렬히 반발했다. 이 도시 엘리트/정유업계 종사자들이 현 야당의 핵심 지지층이 됐다. 상당수가 이미 미국 정유회사와의 관계로 왕래하던 미국으로 이동했다.

2002년 갈등은 정책이 아니라 프레이밍에서 폭발했다. 야당의 민영 방송들은 차베스를 독재자로 규정했고 거리의 시위대 야구노 다리충돌을 총격 학살로 만들어 방영했다. 총을 쏘는 장면만 남고 총알이 향했던 빈 거리는 사라졌다. 교차편집으로 친 차베스 시위대가 반 차베스 시위대를 무차별 살해했다는 뉴스를 만들어냈다. 쿠데타를 반긴 미국 정부와 국제사회는 바로 그 발표를 받아들였고 야당의 과도정부를 공식 정부로 인정했다. 그 직후 군 수뇌부의 차베스 지지 철회와 차베스 대통령 사임 발표가 이어졌다. 하지만 실제 사임서는 없었다.
쿠데타 당일 밤, 차베스는 대통령궁에서 군에 의해 연행됐다. 반란군은 그에게 사임서 서명을 요구하며 거부하면 궁을 폭격하겠다고 압박했다. 차베스는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구금에는 응했지만 끝까지 사임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헬리콥터와 군 수송을 거쳐 여러 군 시설로 옮겨졌고 최종적으로 외딴 라 오르칠라 섬의 해군 기지에 사실상 납치 상태로 감금됐다. 쿠데타 군은 그가 이미 사임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조작이었다.
권력을 잡은 야당의 과도정부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국회와 대법원, 선관위를 해산했다.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명분은 스스로 무너졌다. 동시에 국영 방송은 봉쇄되고 민영 방송은 저항을 지웠다. 화면 속 베네수엘라는 평온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빈민가에서 수십만이 헌법 소책자를 들고 내려왔고 대통령 경호부대가 합류했다. 카라카스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은 바로 되찾아졌다.
대통령 경호부대와 중견 장교들이 차베스가 사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헌법 수호를 선언했다. 동시에 카라카스와 전국 각지에서 민중이 봉기하자 하급 장교들과 젊은 병사들 사이에서 명령 거부가 확산됐다. 차베스를 납치하고 감시하던 군인들은 그를 해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결국 친 차베스 세력이 지휘권을 회복하며 차베스의 위치를 파악했고 헬리콥터를 보내 그를 구출했다. 차베스를 데리고 있던 군인들도 호응했다.
새벽녘, 미라플로레스 궁 옥상에 헬기가 착륙하자 차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납치와 구출은 단순한 신변 사건이 아니라 군 내부의 균열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드러낸 장면이었다. 상층 일부는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현장 전투부대와 중견 장교, 그리고 명령을 거부한 젊은 병사들이 헌법을 선택했다. 이 순간이 48시간 쿠데타의 종지부였다.
엘리트와 미디어, 육군 총사령관과 장성 등 군부가 결합해도 헌법을 지키려는 민중이 이를 되돌릴 수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다.
“저는 단 하나의 증오의 티끌도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의 잘못을 인정합시다. 저는 제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쪽만의 노력으로는 안 됩니다.
침착해지기를 호소합니다. 영적인 평온과, 시민으로서의 평정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오늘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차베스는 복수를 택하지 않았다. 화난 군중이 쿠데타 세력을 척결하고 싶어했지만 차베스는 복수가 반복되면 나라가 흔들림을 알았고 방금 전까지 자신이 죽을 뻔한 상황이었지만 내전을 막는데 모든 힘을 다 했다.
이후의 베네수엘라는 성과와 취약성을 함께 안고 갔다. 교육과 의료 접근은 확대됐지만 미국의 베네수엘라 경제제재, 석유 수입 의존과 가격 통제의 왜곡, 행정 역량의 한계가 누적됐다. 야당의 파업 등 공격은 이미 취약해진 경제에 집중됐다. 체제는 개인 리더십에 과의존했고 차베스 사망 이후 그 공백은 그대로 드러났다.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의혹은 남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제도의 취약성이었다.
혁명은 TV로 중계되지 않는다. 중계되는 것은 악의에서건 선의에서건 편집된 화면뿐이다. 역사는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2002년 4월 카라카스에서나 2024년 12월 서울에서나 역사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상당수 군인들과 거리로 나와 군과 대치한 시민들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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