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원하던 대학교에 가지 못하면 재수, 삼수도 흔하지만, 미국에서는 대부분 그냥 다른 학교를 다니거나 다니다가 성적을 내고 그걸로 원래 가려던 학교로 편입을 신청한다. 대부분 편입생을 위한 정원이 따로 있고 명문대일 경우 온갖 스펙을 만들어 도전하는 전세계 수재 고등학생들과 경쟁하는 것보다 다른 편입생들과 경쟁하는 게 쉬울 때가 많다. 그래서 내가 입시준비하던 시절에도 하버드같은 학교도 이런 샛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고, 지금도 아마 그럴 거다. 정치에서도 비슷한 경로가 있는데, 한번 대결에 실패한 정치인이 잠시 세간의 주목을 피해 쉬고 있다가 일정 시간이 된 뒤에 다시 도전하는 경우다. 김영삼과 김종필은 주로 이런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다. 김대중은 미국과 영국. 손학규는 만덕산. 오세훈도 서울시장하기 전에 총선불출마 선언으로 정치은퇴식 비슷한 걸 했었고. 이번에 이낙연의 미국행도 원리는 같다. 여권에서는 김무성, 유승민 등이 대표적으로 잠시 쉬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게 그냥 그 순간에 보면 패자가 쓸쓸하게 어디론가 휴식처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자신의 진영에서 의원계파/대의원을 확실히 확보하고 있는 경우다. 대중적 인지도나 인기는 빠르게 내려가지만 당내 인맥과 대의원 장악력은 훨씬 느리게 퇴화된다는 점이 이 경로를 가능하게 만들고, 특히 대권주자 급들에게 매력포인트가 된다. 정치적 자산의 대부분을 유지하면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정적이 비틀거릴 때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돌아온 김대중은 단칼에 민주당을 도살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정권을 잡았다. —- 비슷하지만 다른 구도가 있는데, 전직대통령들이다. 당내 지배력이 고스란히 있는 상태에서 퇴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레임덕을 거치며 차기주자들이 다 나눠가진 후에 퇴임하게 된다. 가끔은 대중적 인기가 살아있거나 되살아나서, 앞에 말한 쉬고있는 패자들과는 정반대가 되는 경우도 생긴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그렇다. 이게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이면 상관없는데, 실패한 경우 굉장히 위험해진다. 이명박과 윤이 보기에 저 둘은 스스로를 보호할 정치적 힘은 0이 됐는데 자신에 대적하는 야권에 구심점이 될만큼 대중적 인기가 있다면 이명박이 노무현에게 했던 것처럼 정치적/생물학적으로 살해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노무현의 경우 민주당이 창당과 분당을 거듭하던 상황이기도 했지만, 상당수 민주당 정치인들은 노무현을 방어해 정권의 표적이 되기 보다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게다가 노무현이 떠나고나서 밀려온 전국적 추모 분위기에 정치적으로 큰 덕을 보기까지 했다. 그 정치인들이 지금도 민주당에 상당수 남아있다. 다른 마땅한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 유일한 대중적 인기를 가진 이재명을 비토하는 의원들이 자신들을 친문이라고 표현하는 걸보면 섬뜩하다. 문재인을 희생양으로 내주고 거기에서 불어오는 역풍을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그들의 이런 태도를 노무현 때 한번 보고 끝난게 아니라 조국/윤미향/손혜원 등을 가장 앞서서 손절하며 반복해서 보여줬기 때문에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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