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전쟁, 특히 단순한 자원 확보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생사를 건 전쟁 이후에는 ‘후속 처리’가 매우 중요…

큰 전쟁, 특히 단순한 자원 확보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생사를 건 전쟁 이후에는 ‘후속 처리’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제국을 예전처럼 14개의 국가로 분할해 힘을 약화시키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그것을 추진할 동력은 부족했다. 그 결과, 독일은 다시 부활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2차대전 후 독일을 어떻게 ‘거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는 수십 가지 방안이 나왔다. 프랑스나 폴란드가 독일 영토를 분할 점유하는 제안도 많았지만, 과거 나폴레옹 시절처럼 프랑스에 힘이 집중되는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결국 현실에서는 독일을 4개 구역으로 나누는 안이 채택되었다. 서북부는 영국, 서남부는 프랑스, 동북부는 소련, 동남부는 미국이 각각 관리했다. 이후 소련이 점령군 철수를 거부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의 관할 구역이 미국 쪽에 합쳐지고,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일본도 비슷한 구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홋카이도와 도호쿠는 소련, 혼슈는 미국, 주고쿠와 규슈는 영국, 시코쿠는 중국, 오사카는 영국과 중국의 공동 관리, 도쿄는 국제공동구역으로 설정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미국이 전 지역을 군정하에 두고, 아시아의 핵심 군사기지로 삼았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군사적으로 중성화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소련과 경제체제 경쟁 때문에 경제적으로 두 나라가 미국에 도전이 가능할 수준까지 성장하는 것을 방치했다. 1차대전 이후 독일은 분할을 피했지만,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은 그러지 못했다. 대부분의 제국들은 강력한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국가적 정체성과 회복력을 유지했지만, 이미 다민족 제국으로 구성되어 있던 오스만 제국은 달랐다. 패전 후 군사력과 정치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열강에게 분할되기 쉬운 ‘사냥감’이 되었다. 19세기 내내 유럽 열강에게 조금씩 영토를 잃어왔던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 직후 완전히 해체되었고, 현재 튀르키예의 땅 역시 앙카라 주변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영국 등이 분할 점령했다.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저항과 개혁으로 현재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이나 협상을 통한 영토 변경은 흔한 일이었고, 보통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협상이 이뤄졌다. 하루아침에 독일인이 러시아인이 되는 일도 가능했고, 몇 세대에 걸쳐 자신이 어느 나라 국민인지 모르는 시골 주민도 많았다. 그러나 유엔이 창설되고 핵무기가 등장하면서, 노골적인 영토 전쟁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UN 헌장 제2조 4항은 무력에 의한 영토 획득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물론 줄어들었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식민 열강과 소련의 해체 외에도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 전쟁, 중국의 티베트 병합,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의 전쟁 등이 있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중심의 양극 체제가 형성되면서, 핵무기 억지력으로 인해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한국전, 베트남전처럼 ‘대리전’이 많았고, 그만큼 영토 변경은 상대적으로 드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