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유럽에까지 알려졌고, 그것도 그냥 알려진 게 아니라 가톨릭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통해 로마 교황청까…
임진왜란은 유럽에까지 알려졌고, 그것도 그냥 알려진 게 아니라 가톨릭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통해 로마 교황청까지 정식 전달되었다. 그 당시에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각자 일본, 조선, 중국에 흩어져 있었고, 이 전쟁을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보며 기록을 남겼다. 그 보고가 교황청으로 향했고, 전혀 다른 세계였던 유럽에까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전쟁 소식이 전파됐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루이스 프로이스다.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에서 30년 넘게 살았고, 조선 침략을 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는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걸 “오만하고 분별없는 짓”이라고 평가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조선에서 온 통신사와 일본 측 사이의 어긋난 분위기, 전쟁 발발 후 조선인들이 포로가 되면서도 끝까지 항거하거나 자식을 지키기 위해 변장을 했다는 이야기들, 모두 그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는 직접 조선 땅은 밟지 않았지만, 일본 내 기리시탄들과 현지 일본인 신자, 다른 선교사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이 내용을 상세히 교황청에 보고했다. 그런데 실제로 조선 땅을 밟은 유럽인도 있었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라는 예수회 신부인데, 스페인 출신이고, 일본군을 따라 1593년 겨울에 부산에 상륙했다. 목적은 일본군 안의 가톨릭 신자들—대표적으로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장수—을 위해 종군 사제로서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약 1년 반 정도 머물렀고, 그 사이 여러 편지들을 유럽에 보냈다. 조선의 자연환경이나 전쟁 중의 삶, 포로가 된 사람들 중 몇몇에게 세례를 준 일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고, 이 편지들 중 일부는 실제로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인쇄되어 읽혔다. 그가 데리고 간 조선 소년 ‘비센테 가온 Vincent Caoun’은 후일 조선 선교를 위한 인물로 훈련시키려 했던 계획의 일부였다. 전쟁이 끝나면 조선도 선교 대상으로 삼겠다는 계획이 이미 세워지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가 있었다. 그는 명나라 안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였고,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는 난징과 북경 근처에서 전쟁의 여파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조선은 중국의 속국인데 일본이 침략했고, 명나라가 조선을 도우러 8만 명을 파병해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유럽에 보고했다. 물론 숫자는 부풀려졌겠지만, 전쟁으로 명나라 사회 전체가 패닉 상태였다는 건 분명했다. 사람들은 일본군 첩자가 도시에 숨어 있다고 믿었고, 외국인에 대한 경계도 극도로 심해졌다. 그 영향으로 리치는 한동안 북경 입성이 막히기도 했다. 이 모든 내용이 그의 편지와 보고서에 담겨 로마 예수회 본부와 교황청으로 전달됐다. 이 세 선교사들의 보고 덕분에 교황청은 전쟁의 경과와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 그리고 전쟁이 동아시아 전체에 미친 파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교황청은 바로 개입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박해받는 가톨릭 신자들의 상황과 전쟁으로 생긴 선교 기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실제로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시기 일본 순교자들을 시성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었고, 세스페데스의 보고 이후 조선을 새로운 선교지로 삼는 가능성도 적극 검토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예수회는 조선에 관심이 많았다. 1570년대부터 이미 “조선을 선교하자”는 계획이 올라왔고, “일본 상인을 통하면 접근 가능하다”는 분석도 있었다. 당시 조선을 잘 몰랐던 유럽인들 눈엔 심지어 “조선을 넘으면 흰 피부 사람들이 사는 독일 같은 땅이 나온다”는 식의 상상까지 섞여 있었다. 조선을 중국과 유럽을 잇는 통로로 보는 발상이 실제 보고서에 담겨 교황청에 전달됐다. 정리하자면, 임진왜란은 유럽에서 단순한 극동의 전쟁이 아니라 선교사의 눈을 통해 본 극동의 실시간 첩보로 읽혔다. 프로이스는 일본 내부에서 전쟁의 시작과 파장을 설명했고, 세스페데스는 실제 조선 땅에서의 경험을 기록했으며, 리치는 중국의 반응과 파장을 정리해 전달했다. 이 세 가지 시각이 모여 로마 교황청은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 전쟁의 파장을, 현장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건 단순한 보고 그 이상으로 향후 선교 전략을 조정하는 데 영향을 준 생생한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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