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나라가 고려를 몽골제국 체제 속으로 본격 편입하려 하기 전까지, 중국 왕조들이 한반도를 보는 시각은…

중국 원나라가 고려를 몽골제국 체제 속으로 본격 편입하려 하기 전까지, 중국 왕조들이 한반도를 보는 시각은 일정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라, 하지만 굳이 병합할 필요는 없는 존재였다. 자원 면에서도 서북 변경의 초원이나 서남 방면의 곡창처럼 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적당히 관리하면서 조공을 받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완충지대로 두는 전략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당·송 같은 제국들은 주변 민족들을 다루기 위해 회동관(會同館) 같은 기구를 만들어 언어를 연구하고 통역관을 길렀다. 거란어, 여진어, 위구르어 같은 언어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구려어, 신라어, 고려어는 이 체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반도의 나라들이 모두 한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외교에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보장하는 ‘필담’이 통했으니,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실무가 돌아갔다. 고려를 친족으로 봤던 걸로 보이는 몽골 제국이 가고 들어선 명나라에서 상황이 달라졌다. 명은 조공 체제를 제국 외교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주변국을 질서 속에 묶어두려면 언어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겼다. 이때부터 명나라 조정이 본격적으로 조선어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문서를 처리하고, 조공로를 관리할 수 있는 전문 통역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전 왕조들과 달리, 명은 조선을 ‘주요 파트너’로 간주했고, 그래서 조선어는 제국 통역 교육 과정에 편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청나라 시기다. 청은 만주족 왕조였고, 조선과의 관계는 미묘했다. 명의 후계자로서 천명(天命)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선은 본래 명에 충성을 바쳤던 나라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긴장관계가 이어졌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군신관계를 인정하면서, 청은 조선어를 더 이상 단순한 외교 도구가 아니라 황실 질서 유지의 상징적 언어로 관리했다. 청 황궁에는 통역 담당 관청이 있었고, 몽골어·만주어와 함께 조선어도 실무 교육 대상이었다. 다만 청 후기에는 만주어가 점점 약화되면서, 조선어 교육도 형식화되었다. 실제 외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한문이 중심이었고, 조선어는 보조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한편 일본이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배경은 전혀 달랐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기부터 대마도를 통해 조선과 무역과 외교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통역사인 야사(野司)가 등장한다. 하지만 체계적 교육은 에도 막부 이후에야 확립된다. 1727년 쓰시마 번이 한국어 통역 교육기관인 韓語司(칸고츠카사)를 설치해 번역과 통역을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이곳에서는 교재로 조선어 회화집이 쓰였는데, 일종의 ‘조선어 회화 교본’이었다. 이 기록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발음을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런 교재는 오늘날 한국어 학습서의 원형과도 닮아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을 대상으로 직접 침투를 시도한다. 통역의 필요는 더 커졌고, 일본 육군과 외무성이 직접 조선어 전문가를 양성했다. 특히 도쿄와 교토의 대학에 한국어 과목이 개설되었고, 일본군 장교들은 조선 파견 전 속성 한국어 교육을 받았다. 20세기 초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는 교육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통역과 외교’가 아니라 ‘지배와 통치’를 위한 언어 교육이었다. 총독부는 일본 관리와 경찰을 위해 한국어 학습 교재를 만들었고, 동시에 조선인들에게는 일본어 교육을 강제로 확대했다. 즉, 조선어를 배우는 체계와 가르치는 체계가 동시에 존재했지만, 권력 관계 속에서 정반대의 목표를 추구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서구권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어 연구를 제도화한 나라였다. 배경에는 연해주 지역의 확장과 그곳에 정착한 고려인 공동체가 있었다. 국경 관리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해 한국어 통역과 자료가 필요해지자, 러시아 학계는 이를 ‘동양학’의 한 갈래로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할 인물이 레프 콘체비치(Lev Kontsevich)다. 그는 소련 시기 한국어 연구의 토대를 놓은 학자이자, 한국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는 콘체비치 표기법을 고안했다. 이 표기법은 지금도 구소련권에서 한국어를 전사할 때 표준처럼 쓰인다. 단순히 연구 차원이 아니라, 러시아 학계와 언론이 한국어 자료를 다루는 데 실질적인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미국이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미국은 일본어뿐 아니라 중국어, 태국어, 한국어 같은 동아시아 언어 전문가가 필요했다. 1942년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 설립된 육군언어학교에서 한국어 과정이 개설되었고, 특히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의 재미 한인 이민자와 망명 지식인들이 초기 교재 제작과 강사로 참여했다. 이 시기 한국어 교육은 철저히 군사와 정보 활용 목적에 맞추어져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어는 미국 정부가 지정한 전략 언어로 자리잡았다. 국방언어원(DLI)과 국무부 산하 외교관 훈련기관(FSI)에서 한국어 교육이 대폭 확대되었고, 한국인 강사들이 직접 참여했다. 동시에 하버드, 버클리, 하와이 대학 등 주요 대학들이 1950년대 말부터 한국어와 한국학 과정을 개설했고, 하와이 대학은 한인 공동체의 기반 위에서 1960년대 초 미주 최초의 한국학 연구소를 세웠다. 군사와 외교를 넘어 학문적 체계 속에서 한국어가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