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정치 지형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당시 운동의 주축이던 학생 지도자들은…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정치 지형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당시 운동의 주축이던 학생 지도자들은 두 갈래로 흩어졌다. 일부는 해외로 망명해 서구 사회에서 인권 운동가나 학자가 되었고, 또 다른 다수는 내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치와 사회운동을 포기하고 사업가나 전문가의 길을 택했다. Li Lu(李录)는 대표적인 사례다. 천안문 당시 학생 지도자였던 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금융계에 진출해 찰리 멍거의 수제자로 불렸고 한 때 워런 버핏의 후계자로 거론될 만큼 성공했다. 지금은 히말라야 캐피털을 운영하고 있고 중국 BYD에 2010년부터 투자를 시작해 큰 성과를 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중국 내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 남는 길이 사실상 차단됐음을 보여준다. 체제는 강경 진압 이후 지속적으로 감시와 억압을 강화했고, 반체제 활동은 곧 인생의 파멸을 의미하게 됐다. 따라서 다수의 젊은 엘리트들은 정치 이상을 버리고 현실적 생존과 성공을 택했다. 이 흐름은 중국 정치에 깊은 공백을 남겼다. 1990년대 이후 중국 내부에서는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적 정치 세력이 사라졌다. 반대 목소리가 있더라도 흩어진 개인 단위로만 존재했고,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산당은 강력한 반대파의 압력을 받지 않은 채 경제 개혁과 권력 집중을 동시에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 공백은 1990년대 내내 이어졌다. 특히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여파로 중국도 수출 둔화와 국유기업 개혁에 따른 실업 급증을 겪었다. 당시 1인당 GDP는 고작 800달러 수준이었고, 청년층 불만이 격화될 경우 천안문 2.0이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도부에 팽배했다. 그러나 8년 전 학생운동 지도부가 해산된 덕에 조직적 반대 세력이 부재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불만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장기적으로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하나는 중국 사회의 안정과 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정치적 저항이 약화되면서 당국은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며 경제발전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체제 내 개혁의 동력이 줄어들어 권력 견제와 정치적 다양성이 극도로 빈약해졌다는 점이다. 엘리트층이 체제 바깥에서 목소리를 내기보다 경제적 기회 추구에 몰두하면서, 권력과 자본은 더 긴밀히 결합했다. 결국 천안문 이후의 선택은 중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학생 지도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경로는 중국 사회를 정치적 균열 없는 고속 성장 체제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지금까지도 대안 정치세력이 부재한 사회 구조를 굳혀놓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체제 개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목소리가 드문 것도 바로 그 역사적 결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