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2월, 비엣남-중국 국경 근처 산촌에 이른 아침 안개가 깔렸다. 밤새 내린 빗방울이 참호 벽에 얼…
1979년 2월, 비엣남-중국 국경 근처 산촌에 이른 아침 안개가 깔렸다. 밤새 내린 빗방울이 참호 벽에 얼어붙어 있었고, 차가운 공기는 숨소리조차 하얗게 만들었다. 흙벽으로 쌓은 방어진지 옆에는 헌 교복을 입은 소년소녀들이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논두렁에서 개구리를 잡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에는 어린 티가 사라져 있었고, 일부 총을 쥔 손은 작지만 단단히 굳어 있었다. 어제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포성의 메아리가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쿵, 하는 소리가 땅을 진동시킬 때마다 참호 안의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다. 여인들은 나무로 엮은 참호 뒤편에서 밥을 짓고 부상자를 위한 붕대를 감는 손길이 바쁘게 오갔고, 일부는 총을 메고 소년들과 함께 참호에 섰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상대는 인구도 군사력도 비교할 수 없는 대국 중국이었다. 그것도 바로 몇 년 전까지 공산주의 혈맹이었는데 갑자기 명분 없이 쳐들어온 적이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몇 년 전, 이들 대부분은 아이였지만 바로 이 땅에서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미국을 밀어낸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전투기와 폭격기, 네이팜탄과 항모를 가진 제국도 결국 이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는 기억은 두려움을 자부심으로 바꾸고 있었다. 바람은 차고 총열도 차가웠지만, 그들의 눈빛은 오히려 뜨거웠다. 두려움과 결심이 섞인 눈빛 속에는 "이번에도 지키겠다"는 조용한 맹세가 있었다. 그날의 참호에는 기묘한 공기가 흘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폭격에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잔잔히 깔린 자부심. 다시 한 번 역사가 시험을 던졌고, 사람들은 그 시험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디엔비엔푸에서 비엣남은 전세계에 식민지를 가진 제국 프랑스의 주력부대를 포위하고 격파하며 식민지배를 끝냈다. 1954년 5월의 그 1차 비엣남 전쟁 승리는 '식민지 종식'의 상징이 됐다. 이후 세계 최강국 미국이 침입한 2차 비엣남전에서도 비엣남군은 장기전을 통해 미군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파리협정으로 미군은 철수했고, 하노이는 무조건 철수와 정권 교체를 요구하며 협상을 끌고 갔다. 이 두 전쟁은 "인민전·장기전" 교리의 실증이 됐고, 비엣남 사회 전체 동원 체계를 굳혔다. 1979년 중-비엣남 전쟁은 비엣남이 20세기 들어 세번째로 대국과 맞붙은 국경전이었다. 중국은 비엣남의 캄보디아 침공 & 크메르 루주 정권 축출(1978년 12월)에 대해 '교훈을 주겠다'며 20만 병력으로 북부 2개 축선을 공격했다. 하지만 비엣남은 북부 상비군과 민병, 자위조직을 대량 동원해 방어선을 유지했다. 이때 비엣남 주력군 상당수는 남부의 캄보디아 전선에 묶여 있었다. 중국의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 루주 구원 및 비엣남의 캄보디아 개입 저지였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중국은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철수했으나 비엣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1989년까지 지속됐고 크메르 루주 정권과 폴 폿은 돌아오지 못했다. 캄보디아는 중국의 자본력이 들어오며 모든 게 달라진 수년 전까지 비엣남에 문화적/군사적/경제적으로 종속돼 있었다. 비엣남의 방어력은 "인민전" 조직 원리에서 나왔다. 보응우옌잡의 교리에 따르면 "장비가 열세여도 정당성과 전략, 조직 동원을 결합하면 현대 제국주의 군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부 지방의 민병과 청년단, 여성조직은 참호 구축, 보급과 후송, 근접 방어에서 전선을 받쳤고 주력군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중국군의 심층 돌파를 억제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비엣남군의 주력 무기 상당수가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남비엣남에게서 인수받은 미제 장비였다는 점이다. M16 소총, M60 기관총, M48 전차, 105mm 곡사포 등 미국이 남기고 간 첨단 무기들이 이제 또 다른 대국의 침공을 막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군에게는 "미국이 수십만 병력으로도 무릎 꿇었던 상대가 그 미국 무기로 자신들을 상대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컸다. —- 중국 측에서는 이 전쟁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치욕적인 기억이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덩샤오핑은 "단기 징벌전"이라는 애매한 목표를 설정했다. 완전 점령도, 체제 전복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의 작전은 일관성을 갖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으로 10년간 숙청과 마비를 겪은 인민해방군은 사실상 "혁명정치조직"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숙련 장교층이 대거 사라졌고 지휘와 통신, 정보 체계가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1950년대 소련제 장비를 개조한 구형 무기, 낮은 기계화율, 부족한 장갑차와 자주포는 산악과 도시 전투에서 비엣남군의 지연전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중국군은 빠른 진격을 기대했지만 상대는 수십 년간 게릴라전 경험을 가진 군대였다. 비엣남군의 '한 치씩 버티는' 방식 앞에서 전력 우위를 살리지 못했다. 철수하며 "징벌 목적 달성"했다고 홍보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덩샤오핑까지 정치적 책임을 질 뻔 했다. 덩샤오핑은 대대적 군 개혁에 나섬으로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역사를 길게 보면 1979년은 "천년 악연"의 현대적 변주였다. 한무제의 남월 병합(기원전 111)로 시작된 중국의 지배, 응오꾸옌의 박당강 승리(939)로 자주 회복, 1407-1428년 명의 재점령과 레러이의 독립 회복까지, 비엣남은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정치적 독립을 지켜온 경험을 집단기억으로 축적했다. 하지만 중국의 철수가 관계 정상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 국경 교전이 지속됐고 1991년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2014년 석유시추 갈등 등으로 구조적 불신은 해소되지 못했다. 이 전쟁이 비엣남에 남긴 유산은 명확하다. "대국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대국 중국이 침략해왔는데 우리는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나서서 물리쳤다"는 자신감이다. 최근 참전용사 네트워크와 지역 기념사업이 이 기억을 복원하며 비엣남 국가 정체성의 핵심 테마인 주권, 영토, 자주를 현재형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반면 중국에게는 뼈아픈 교훈이었다. 이 작전 실패의 충격 이후 중국은 1984년 대규모 군사개혁을 단행했지만 여전히 이런 규모의 해외 군사작전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전쟁의 목표가 비엣남의 군사적 팽창을 눌러주겠다는 거였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혼이 나고 주늑들어버렸다. 경제력으로는 세계 1위에 근접했지만, 수치상으로는 지역 최강이지만 1979년의 그 기억은 여전히 중국이 스스로 '과연 실제로 군사 작전을 나갔을 때 생각대로 될 것인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이게 다 비엣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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