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왜 권성동이 수천억 한국 예산을 필리핀으로 옮겨가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

필리핀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왜 권성동이 수천억 한국 예산을 필리핀으로 옮겨가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지 알 수 있다. '정상적인 부패국가'라면 예산이 집행될 때 일부가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그래도 남은 돈으로 사업은 돌아간다. 최소한 도로는 깔리고, 댐은 세워진다. 그런데 필리핀은 다르다. 여긴 예산이 통째로 사라지는 나라다. 국민의 삶을 지키기 위한 홍수 방지 기금이 증발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집을 잃는 주민들은 늘어나는데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 필리핀 거리는 이 현실에 분노한 사람들로 들끓고 있다. 필리핀 국가예산 6조 페소 중 1조 페소, 한국돈으로 25조 원이 사라졌다 해서 ‘트릴리언 페소 행진’이라 불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수도 마닐라를 뒤덮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도둑질 멈춰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일부 지역에선 충돌과 체포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건 단순한 폭발이 아니라 누적된 절망이 표출된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 봉봉 마르코스가 이 부패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의 정권 자체가 원래부터 다양한 권력 파벌의 타협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가문 지지 세력부터 두테르테 진영, 지방 유력 가문들까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이번 조사에서 이들을 정면으로 건드리면 정권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은 ‘부패 척결’을 약속하면서도 실질적인 처벌에는 손을 대지 못한 채 시간을 끌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필리핀 정치의 구조다. 이 나라는 아직도 중앙 권력이 지방 군벌과 재벌 가문에 기대어 유지되는 반(半)봉건 체제에 가깝다. 대통령이 법을 집행한다 해도 지역 권력자들이 경찰과 검찰, 의회까지 움켜쥐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돈줄을 끊지 못하면 개혁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지금의 스캔들도 그렇게 흐지부지될 위험이 크다. 그리고 이 나라는 이미 폭력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두테르테 정권 당시, 남부 민다나오의 이슬람 반군이 정부군과 수개월 간 전면전을 벌였고, 마라위 시 전체가 잿더미가 된 끝에야 진압이 끝났다. 이 경험은 필리핀이 ‘폭력이 선택지로 떠오르면 실제로 도시 하나쯤은 사라질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지금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서 폭력을 동반한 저항으로 기울고 있다는 건,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이제 이후 전개될 수 있는 현실적 시나리오는 두 가지 축으로 갈린다. 첫째, 마르코스 정권이 부패 척결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다 내부 파벌 동맹이 붕괴하는 시나리오다. 두테르테 진영과 지방 정치 엘리트들이 반발하고 연정이 갈라지면 의회와 사법부, 지방 행정조직의 협조가 멈추고 정권은 마비된다. 안 그래도 집권 뒤 부통령 사라 두테르테와 권력 싸움하느라 지금까지 나라가 시끄러웠다. 충성파 관료들이 이탈하거나 야권과 손잡으면서 조기 탄핵론이 떠오를 수 있고, 일부 군 장성들이 “국가 안정을 위한 지도력 교체”를 요구하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마르코스는 개혁에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정치 기반을 잃고 레임덕 상태에 빠지거나 조기 퇴진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 부패를 끊으려면 지방 파벌들의 권력을 유지해주는 법체계를 건드려야하는데 마르코스 대통령 집안도 그 법 덕에 일로코스 지방의 맹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성난 시민들이 거리에서 정권 자체를 무너뜨리는 시나리오다. 정부가 부패세력을 비호하거나 미적거리는 사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일부 지역에선 반정부 조직이 실질적인 치안·행정을 장악할 수도 있다. 폭력 충돌이 격화돼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군과 경찰 내부도 분열될 수 있으며, 결국 대통령이 퇴진하고 과도정부나 조기 대선으로 이어지는 ‘피플파워형 정권 교체’가 현실이 된다. 이 경우 필리핀의 정치 질서는 완전히 재편되고, 과거와는 다른 권력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무엇이 현실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부패와 봉건 질서를 그대로 둔 채 이 사태를 피해 가는 길은 없다는 점이다. 이미 한 번 열린 민심의 뚜껑은 닫히지 않는다. 피플파워는 이 나라에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언제든 다시 현실이 될 수 있는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