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년 백강 전투는 단순한 백제와 신라 간의 충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된, 사실상 제1차 동…

663년 백강 전투는 단순한 백제와 신라 간의 충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된, 사실상 제1차 동북아 대전이었다. 당나라, 신라, 백제, 일본 네 나라가 각자의 정치적 이해와 외교적 명분, 군사적 생존을 안고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 전투는 이후 수백 년간 한반도, 일본 열도, 중국 동북부의 역학 구도를 뒤바꿨다. 당시 일본은 자국 역사상 보기 드문 규모의 군대를 대륙에 보냈다. 이미 백제가 멸망한 이후였음에도, 백제 왕자와 유민 세력을 끝까지 지원하기 위해 인구 500만인 일본이 수백 척의 함대와 5만의 병력을 동원했고, 대국 당나라와의 충돌을 감수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동맹이 아니라 형제국에 대한 정서적 책임이었다. 당시 일본 사람 100명 중 한 명이 백강에서 죽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전투는 무리하게 국력을 동원했던 일본의 마지막 대륙 군사 개입이 되었다. 이후 일본은 900년 넘게 대륙으로의 진출을 멈추고 열도 안에서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봉쇄했다. 다시 일본이 대륙에 군사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1592년 임진왜란, 즉 제2차 동북아 대전이었다. 백강 전투는 일본 내부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백제 인구 70만 호 중 약 3분의 1이 이 전투 후 유민이 돼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설은 단순한 망명이나 난민 유입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구성 자체가 재편된 사건이었다는 걸 시사한다. 기술자, 승려, 귀족, 학자 계층이 대거 일본 조정에 합류했고, 이는 고대 일본 국가 체제의 정비와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패배한 전투였지만, 이로 인해 일본 문명의 뼈대가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이 역사적 서사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든다면, 전통적인 전쟁물이 아니라 형제국의 붕괴를 지켜보는 한 나라의 비통함, 그 유산을 이어가려는 문화적 재편의 이야기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이런 소재는 섬세한 연출이 필요하다. 일본 내 일부 역사 인식은 당시 백제를 왜의 속국으로 보고 백강 전투를 종주국의 개입 정도로 해석하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해석과 정면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공동 감정대를 확장할 수 있는 구조가 요구된다. 결국 핵심은 전쟁의 승패나 명분이 아니라, 백제가 일본에 남긴 문화적 감정과 유산,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시도의 무게다. 그 시절, 우리는 이미 서로의 내부에 깊이 들어가 있었고, 함께 움직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복원하는 이야기. 그것은 과거의 미화가 아니라, 미래의 동북아가 함께 쌓아야 할 기억의 기반이 될 수 있다. 무엇을 잇고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 이야기. 그런 작품 하나가 존재한다면,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