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은 19세기 이후 여러 차례 충돌한 적대국이었다. 대표적으로 1870년의 보불전쟁은 양국 간 적…

프랑스와 독일은 19세기 이후 여러 차례 충돌한 적대국이었다. 대표적으로 1870년의 보불전쟁은 양국 간 적대감과 민족주의를 심화시킨 상징적 충돌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두 나라는 유럽 통합의 쌍두마차다. 두 나라가 과거를 극복하고 우호를 심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가 공동 역사교과서 프로젝트였다. 2006년부터 일부 고등학교에서 자율적으로 채택해 사용한 이 통합 교과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대사까지를 다루며 대표적 상징 사례로 꼽힌다. 양국의 고등학생들이 같은 책으로 과거를 배우게 한 이 작업은 단순한 교육 정책이 아니라, 갈등의 기억을 공유된 교훈으로 바꾸는 외교적 기술이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도 그런 접근이 가능하다. 두 나라의 가장 크고 사실상 유일한 외교 갈등은 ‘과거사’다. 이 하나만 풀면, 양국은 협력의 레버리지를 폭발적으로 높일 수 있다. 반도체 공급망, AI, 탄소중립 산업, 해양안보 등에서 공통 이익은 이미 넘쳐난다. 일본은 소재·장비 분야에서, 한국은 메모리와 파운드리에서 세계 최상위권이다. 기술·공급망 협력만으로도 세계 시장 절반을 주도할 수 있다. 과거사가 그걸 막고 있을 뿐이다. 한국이 원하는 건 명확하다. 독일 수준의 반복적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그리고 야스쿠니에서 전범 분사다. 하지만 일본 국내 정치 구조는 과거사 수용보다는 회피 쪽으로 굳어져 있다. 일본 정계는 그동안 선거 때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북핵, 혐한, '사과를 몇번 하라는 거냐' 등 논리를 너무 오래 밀어왔기 때문에 자민당이 그 정도 사과를 하고도 당장 정치적으로 살아남긴 어렵다. 그렇다고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수는 없다. 단번에 그 결과로 도달하기가 어렵다면, 미래 세대가 도달할 수 있는 다리를 놓는 일부터 시작하자. 우선, ‘기억의 공유’부터 함께하자. 프랑스-독일처럼, 공동 역사연구 위원회를 상설화하고, 박물관·교과서·청소년 교류 프로그램을 세우자. 서로의 과거 인식을 끝장 토론해 합의가 아니라 공존 가능한 차이의 인정부터 설계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일본은 강제동원을 '모집'이라 표현하고, 한국은 이를 '강제노역'이라 본다. 이 차이를 교과서 내 병기하면 된다. 학생들이 두 인식을 모두 접하고, 실제 임금이 지불되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며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구조다. 전쟁은 있었고, 피해도 있었으며,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그 기억은 양쪽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사실부터 확인하면 된다. 과거사 사죄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한국은 이미 많은 걸 양보할 준비가 돼 있다. 솔직히 우리가 배상금 바라고 지금까지 항의한 게 아니지 않나. 일본이 정치적 용기를 내면 된다. 당장 전범 분사나 고개 숙인 사과가 어렵다면, 대신 공동의 미래를 여는 구조를 만들자. 그 구조는 지금 우리가 만들 수 있다.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