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사실과 자신이 원하는 바를 확실히 구분하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사람은 동기화된 추론(Mot…
객관적인 사실과 자신이 원하는 바를 확실히 구분하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사람은 동기화된 추론(Motivated reasoning)이라는 방식에 따라 움직인다. 원하는 결론을 먼저 세우고, 그 뒤에 근거를 끼워 맞춘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논리와 명분은 실제로는 ‘이유’라기보다 ‘변명’에 가깝다. 심지어 자기 객관화를 잘 하는 사람들조차 이 과정을 거친 뒤 찾은 명분이 적당하지 않으면 결론을 폐기하는 방식으로 자기 점검을 한다. 정의당에서 여성주의 지상주의자로 살다가 갑자기 이준석과 신당을 한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보니, 혹은 상황이 바뀌며 다른 선택이 더 이득으로 보이면 또 다양한 모순되는 명분을 들며 정당화한다. 그러다 보니 하는 말을 그대로 믿자면 정신분열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몇 가지 틀을 제시했다. 먼저 직관적이고 빠른 시스템 1이 결론을 내리고, 그 뒤에 느리고 논리적인 시스템 2가 ‘합리화 담당자’처럼 이유를 꾸며낸다는 구조다. 또한 그는 WYSIA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라는 개념으로, 눈앞에 보이는 단편적 정보만으로 전체를 판단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무의식적으로 메워버린다고 했다. 결국 욕망과 두려움이 먼저 작동하고, 논리는 나중에 뒤따른다는 것이다. 경제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테슬라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들은 오랫동안 ‘혁신’과 ‘머스크의 천재성’을 근거로 믿음을 강화했지만, 사실 그 믿음은 이미 “테슬라는 계속 오른다”라는 욕망에서 출발했다. 결론이 먼저였고, 명분은 뒤늦게 끼워 맞춘 것이다. 특히 근거과 관계없이 대중이 결집하기만 하면 현실이 되면 주식에서 이런 일은 흔하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동기화된 추론은 드러난다. 인공지능 규제 논쟁을 보면, 기술 낙관론자는 먼저 “AI는 인류를 구원한다”는 결론을 세우고, 의료 혁신이나 생산성 향상 사례만 강조한다. 반대로 비관론자는 “AI는 위험하다”는 결론에서 출발해, 편향된 사례나 일자리 감소 전망만 반복한다. 서로 내세우는 논거는 다르지만, 사실 출발점은 욕망과 두려움이지 객관적 분석이 아니다. 정치에서 이런 모습은 늘 반복된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층이 대표적이다. 2020년 대선 이후 “선거가 도둑맞았다”는 주장은 법적·사실적 근거가 부실했다. 그러나 지지층은 이미 “트럼프가 이겼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이후의 모든 뉴스와 루머는 그 결론을 강화하는 재료가 되었다. 결론이 먼저였고, 논리는 사후 합리화였다. 조국 혐오자들도 계속 허구로 밝혀지는 혐의들에도 불구하고 ‘조국은 유죄’라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다. 친낙파의 이재명 혐오도, 정청래 혐오자들도, 타진요도 계속되는 해명에도 계속 다음 의혹을 제기하며 신념을 유지했다. 이렇듯 동기화된 추론은 정치, 경제, 과학, 가정까지 모든 영역을 관통한다. 카너먼이 지적했듯, 사람은 스스로 논리적이라고 믿지만 실은 시스템 1의 직관적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스템 2를 동원하는 존재다. 그래서 사회적 논쟁은 늘 ‘명분 싸움’이 되고, 그 명분은 얄팍하기 일쑤다. 따라서 중요한 건 자기 점검이고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결론이라도 사실이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내가 내세우는 이유가 정말 사실에서 출발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내린 결론을 지키려는 방패인지. 이 질문을 피해간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형편없는 명분’을 붙잡고 스스로를 속이며 타인을 설득하려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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