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의 초입에서 의류 산업이 자주 선택되는 건 이유가 있다. 거창한 기술도 거대한 자본도 필요 없고, 노동…

산업화의 초입에서 의류 산업이 자주 선택되는 건 이유가 있다. 거창한 기술도 거대한 자본도 필요 없고, 노동집약적이라 농촌 인구를 도시 제조업 노동자로 빠르게 흡수할 수 있으며, 세계 시장에서 안정적인 수요를 확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의류 가공업은 산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체험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입문 코스다. 그래서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들 대부분이 재봉틀 소리에서 출발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18~19세기 영국도 면직물과 방적공업으로 산업화를 열었고, 이후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도 똑같이 섬유·봉제 산업에서 출발했다. 20세기 들어 일본이 그 길을 밟았고, 한국·대만·중국·베트남까지 모두 이 단계를 거쳐 산업 기반을 세웠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도 있다. 방글라데시,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그리고 중미의 여러 나라들이 수십 년째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뚜렷하다. 첫째, 생산 구조가 하청 OEM에 고착돼 기술이 축적되지 않는다. 둘째, 원단·기계·디자인을 외국에 의존해 부가가치가 낮다. 셋째, 정부가 산업 다변화 전략을 세우지 못해 봉제 외의 산업 생태계가 자라지 않는다. 넷째, 인프라와 교육 투자가 부족해 숙련 인력과 공정관리 역량이 축적되지 않는다. 결국 값싼 노동만이 경쟁력인 구조에 갇히고, 조금만 임금이 올라가도 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의류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방글라데시는 현재 세계 2위 의류 수출국이지만, 그 속에는 ‘임금 상승의 역설’이 숨어 있다. 최소임금은 월 12,500 타카(약 113달러) 수준인데, 생활임금으로 추정되는 약 460달러에 훨씬 못 미친다. 이 임금 격차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향상이나 기술 고도화 없이 임금만 오르면 공장주는 비용 압박을 느낀다. 국제 브랜드와 바이어들은 원가 절감 압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며, 방글라데시 공장들은 주문 단가를 낮춰야만 경쟁에 살아남는다. 이로 인해 공장들은 노동 강도를 높이고, 설비 투자나 R&D보다 단가 확보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방글라데시의 노동 구조는 여성 노동자 중심이었지만 자동화와 기술 변화가 진행되면서 여성 비중이 줄어드는 현상이 목격된다. 예컨대 자카드 자동 직조 장비 도입은 남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재남성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단기 고용 수 증가라는 지표 뒤에 숨은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준다. 또한 코로나19 기간에 수출 주문이 대량 취소되자, 2020년 9월까지 약 3.8십억 달러어치 주문이 연기 또는 취소되었고 약 2.2백만 명의 노동자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충격은 단일 산업체 중심 구조가 얼마나 리스크에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다른 문제는 산업정책의 일관성 부족이다. 방글라데시는 의류산업 성공에 지나치게 안주하며 정부 차원의 전략적 투자를 소홀히 해왔다. 기계·화학·전자 같은 후속 산업으로의 다변화 계획이 없고, 직업훈련이나 기술인력 양성도 민간에 맡겨둔 상태다. 국가가 미래 산업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니 민간 자본도 단기 수익이 높은 봉제업에만 몰리고, 외국인 투자 역시 값싼 노동을 활용한 하청 생산에 머문다. 이렇게 되면 ‘의류산업 → 자본 축적 → 기계·화학 확장 → 고부가 산업 전환’이라는 경로가 끊겨버리고, 임금 상승이 오히려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결국 방글라데시의 의류 산업은 저임금 경쟁력, 바이어 중심 공급망 압박, 노동 취약성, 정치적 억압, 외부 충격 노출 등 복합적인 제약 속에 갇혀 있는 상태다. 한국은 이 구조적 한계를 뚫기 위해 훨씬 계획적이고 공격적인 전략을 택했다. 1960~70년대 봉제와 섬유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기계 설비, 전력 인프라, 중화학 공장 건설에 재투자했다. 정부는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을 통해 자금을 장기 저리로 공급했고, 기업은 생산설비를 수입·국산화하며 기술 내재화를 추진했다. 동시에 정부는 섬유업계가 스스로 기계화나 자동화를 추진하도록 규제와 세제 혜택을 설계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계공업·화학·전자산업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직업훈련과 공정관리 인력 양성에 국가가 직접 나선 것도 결정적이었다. 폴리텍학교, 공업고등학교, 기술대학 등을 통해 숙련공과 엔지니어를 대규모로 양성하고, 기업과 연계해 교육과 현장 실습을 결합했다. 동시에 산업단지 조성과 물류·항만 인프라를 통해 부품, 소재, 기계, 완제품이 연결되는 수직계열화를 국가 차원에서 설계했다. 이런 종합 전략이 있었기에 임금이 오르더라도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산업 구조가 더 정교하고 복잡하게 진화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단지 산업 구조만이 아니었다. 한국은 평화시장 전태일 사건으로 대표되는 노동 착취와 열악한 작업 환경 문제를 직접 겪었고, 이를 통해 산업 성장과 노동 인권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적어도 어떻게 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다.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의 압력, 그리고 제도 개혁을 통해 근로기준법과 안전 기준, 노동조합 제도가 정착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직 진행중이지만 사회적 합의와 산업 경쟁력의 공존이라는 절충점을 찾아냈다. 이 경험은 지금도 의류·봉제 단계에 머무는 국가들이 마주한 과제와 매우 흡사하며, 한국이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사회 구조적 조언까지 제공할 수 있는 이유다. 우리가 겪었던 불필요한 학대와 착취를 최대한 줄여줄 수 있다. 이런 전략은 단순한 ‘내부 발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도 이제 우호 국가를 늘리고 미·중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제3의 생산망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공장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협력국의 산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과정 자체가 한국의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핵심 기술·설계·품질관리를 제공하고, 현지 기업이 조립·생산·물류를 맡는 분업 체계가 구축된다면, 그것은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토대가 된다. 한국의 경험과 더불어 주목할 모델이 대만의 신남방정책이다. 대만은 1990년대 후반부터 반도체와 전자제품 생산 기지를 동남아시아로 확장하면서, 단순한 공장 이전이 아닌 '생태계 이식' 전략을 구사했다. 말레이시아에는 페낭을 중심으로 반도체 후공정 클러스터를 구축했고, 싱가포르에는 설계·연구개발 허브를 조성했다. 베트남과 태국에는 조립·검사 기지를 만들면서도 현지 인력 양성과 협력업체 육성을 병행했다. 대만의 성공 요인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술 이전과 현지화의 균형이다. 핵심 기술은 대만이 보유하되, 생산 공정과 품질관리 노하우는 적극적으로 현지에 이전했다. 둘째, 민간 기업과 정부의 협력 시스템이다. TSMC, ASE그룹 같은 대기업이 해외 진출을 주도하되, 대만 정부는 투자 보증, 인력 교류, 현지 정부와의 협상을 뒷받침했다. 셋째, 장기적 파트너십 구축이다. 단기 비용 절감보다는 현지 정부 및 기업과의 지속 가능한 관계를 우선시했고, 이를 통해 정치적 리스크를 최소화했다. 특히 대만은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동남아시아를 '제3의 생산 기지'로 육성해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2020년 이후 미국의 대중 기술 제재가 강화되자, 대만 기업들은 동남아시아 생산 기지를 통해 미국과 중국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지금 세계에는 여전히 초입 단계에서 발이 묶인 나라들이 많다. 이들을 위한 ‘다음 단계’ 컨설팅과 지원은 사실상 방치돼 있다. 미국이나 유럽은 자국 공급망 확보 외엔 큰 관심이 없고, 중국의 접근은 종종 정치적 영향력 확장 수단으로 오해받는다. 이 공백을 20세기 이후 진짜 폐허에서 선진국까지 도달해본 유일한 국가 한국이 메울 수 있다. 아세안과 공동으로 ‘산업고도화 연합’을 구축하고, 한국이 직접 산업단지 설계·공정 자동화·직업훈련·브랜드 전략까지 패키지로 지원하는 모델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험은 서구의 거대 자본이나 중국식 권력 영향력과 다르게, 실제로 “가난한 나라가 중진국으로 넘어가는 현실적인 경로”를 제공할 수 있다. 더불어 지역 공동 시장을 마련해 미중 양극 대결로 복잡해지는 세계 속에서 자체 내수로 경쟁력과 안정을 추구할 수 있다. 이건 단순한 개발협력이 아니다. 점점 심화되는 국제적 리더십 부재 상황에 한국이 경제적 리더십을 확장하고, 세계 공급망에서 기술·산업 전략의 중심 국가로 자리 잡는 길이다. 한때 재봉틀 소리에서 시작해 첨단 반도체까지 올라온 나라가 이제는 다른 이들의 재봉틀을 미래 산업으로 바꿔줄 수 있다면, 동시에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다면, 그건 과거의 성공을 단순히 자랑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증명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