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사회에서 오토만 제국은 흔히 단순한 “타자”, 즉 유럽을 위협했던 미지의 이슬람 세력으로만 기억된다….
서구 사회에서 오토만 제국은 흔히 단순한 "타자", 즉 유럽을 위협했던 미지의 이슬람 세력으로만 기억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안겼고, 빈 포위전은 "기독교 유럽이 함락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서술은 주로 감정적이고 피상적인 측면에 머물렀다. 서구의 역사 교과서 속 오토만은 ‘끝내 몰락한 제국’, ‘퇴폐와 정체의 집합체’로 그려지곤 한다. 그 속에서 유럽 중심 서사는 "우리가 결국 승리했다"는 자기확인에 집중했다. 하지만 서구의 위정자들은 달랐다. 오토만 제국의 군사적 힘, 행정적 정밀성, 전략적 위치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토만을 해체할 때, 그들은 단순히 패전국 하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다. "다시는 재건될 수 없도록" 민족, 종교, 언어, 영토를 세밀히 갈라놓았다. 아랍은 프랑스와 영국의 위임통치로 쪼개지고, 아나톨리아는 터키 공화국으로 축소됐다. 발칸은 이미 19세기 내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이 해체 과정은 우연이 아니라 정밀한 전략이었다. 서구 지도자들은 오토만이 다시 부활한다면 유럽의 세력 균형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제국은 단순히 무슬림 집단의 제국이 아니었다. 동로마제국을 흡수한 16-17세기 전성기 오토만은 약 2천만-3천만 명을 포괄했는데, 그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동방정교회 신자였다. 발칸반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남부, 그리고 옛 비잔틴의 심장부까지 광범위하게 편입되면서, 오토만 영토 안에는 천만 명 이상의 그리스 정교회, 슬라브 정교회 신자들이 살았다. 즉, 오토만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둘 다 품은 다종교 제국이었고, 단순한 “이슬람 제국”이 아니라 동방정교회와 이슬람을 동시에 지배하는 거대한 정치적 실체였다. 밀레트 제도 아래 정교회 총대주교가 제국 안에서 자치적 권한을 행사했고, 교회조직은 그대로 존속하며 오히려 오토만 통치 덕에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 통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유럽 내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유럽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이 벌어졌지만, 오토만 안의 동방정교회인들은 세금 부담과 제약은 있었어도 공동체를 유지하며 수백 년을 살아갔다. 그래서 발칸과 동지중해의 종교·문화적 지도가 지금까지 오토만의 흔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는 이 제국을 역사적으로 정직하게 다루지 않으려 했다. 교과서와 대중적 역사 속에서 오토만은 몇 번의 전투와 몇몇 위협 장면으로만 등장하고, 그 실제 위상은 의도적으로 축소된다. 오토만이 단순한 적이나 미지의 타자가 아니라, 유럽사의 구조를 형성했던 거대한 축이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은 불편했기 때문이다. 오토만이 기독교 세계 절반을 지배하고, 비잔틴과 로마의 행정 전통을 이어받아 다민족 제국을 운영한 사례라는 사실은 쉽게 지워졌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다루고, 잊히기를 바라는 태도가 서구 역사 서술에 깊이 배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토만은 마지막까지 존속한 최강의 이슬람 제국, 동시에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해 지중해와 중동을 아우른 튀르크 제국 전통의 정점이었다. 더 나아가 비잔틴의 행정과 로마의 법, 그리고 이슬람의 보편적 세계관을 융합한, 인류사에서 가장 독특한 제국의 하나였다. 서구가 두려워하면서도 기록 속에 축소해버린 바로 그 존재가, 사실은 오늘날까지 유럽과 중동의 정치·종교 지형을 만든 실질적 주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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