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나찌독일은 사실 여러모로 신기한 존재였다. 역사의 전개를 살펴보면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2차대전 나찌독일은 사실 여러모로 신기한 존재였다. 역사의 전개를 살펴보면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1차대전의 패배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박살이난 독일이 왜 갑자기 강대국이 돼서 유럽을 정복했나. 어떻게 경제를 살렸고 어떻게 첨단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한건가. 유럽을 다 점령했으면 그것만 잘 지켜도 역사상 최강의 제국 탄생인데 왜 멈추지 못하고 소련 등을 침공한 건가. 유태인을 왜 그렇게 미워했나. —- 사실 한 가지만 알면 이 모든 의문점은 풀린다. 돈이다. 나찌독일은 돈을 어떻게 마련한 것인가.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독일 경제는 망가진 상태였고 생활 수준은 오늘날 이란이나 남아공 수준이었다. 패전과 대공황, 30%가 넘는 실업율의 여파로 막강했던 제국이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었다. 특히 패전국으로서 연합국들에게 계속 내야하는 배상금 때문에 독일국민들의 자존심이 바닥을 친 상황이었다. 이걸 바로 잡겠다고 약속하고 정권을 잡은 게 나찌였고, 실제로 잡았다. 어떻게 한 걸까. "금속가공 연구 협회"(Metallurgische Forschungsgesellschaft m.b.H.)라는 종이회사를 등록하고 그 회사에서 다양한 군수업체에 그 회사 이름을 딴 MEFO bill, 미포 빌, 미포 상품권이라는 걸 발행했다. 정부에서는 은행들에게 이 미포 빌을 나중에 분명히 마르크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했고 은행들은 약간의 수수료를 제하고 군수업체들에게 미포 빌을 마르크로 환전해줬다. 사실상 화폐 발행 없이 무제한으로 화폐를 발행했다. 그냥 마르크를 찍지 않고 이렇게 한 이유는 인플레이션 문제도 있지만 연합국들이 독일을 감시중이었다는 점도 있었다. 문제는 직접 와서 감시를 한 게 아니라 예산 등 보고서만 받아보며 재무관리만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렇게 화폐를 발행하지 않고 사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로 전쟁 준비를 시작해서 연합국들의 감시를 피하는 게 가능했다. 화폐를 찍지 않더라도 은행들이 보유하던 자금을 군수업계에 풀었다는 뜻인데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았을까… 물론 경기부양 효과가 있었고 대공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됐다. 군수업 등을 통해 고용율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임금 수준은 동결 혹은 하락했다. 전쟁업에 푸는 막대한 (부채)자금이 민간에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도록 관리했다. 국민들에게는 대신 주기적으로 새로운 무기를 선보이는 군사 퍼레이드로 자부심을 안겨줬고, 국민들은 그 전보다 약간 나아졌지만 여전히 가난한 삶과 1차대전 패전 이전을 넘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게도 만족했다. 이렇게 해서 도로, 공항, 군수공장, 항공기, 전차 등 인프라를 건설했고 2년 뒤 1935년에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재무장을 선언했다. 연합국이 알아도 막을 수 없는 수준의 무장을 끝낸 뒤였기 때문이었다. 이 선언은 베르사이유 조약을 정식으로 위반하는 선언이었고, 베르사이유 조약을 무력화 해주겠다는 공약을 했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약속을 지키게 됐다. —- 자금은 사실상 눈속임으로 인위적 유동성 공급으로 해결했고, 그럼 최첨단 군사 기술은 어디서 나왔느냐.. 독일이 원래부터 산업과 기술 강국이었다. 1차대전 전부터 화학, 물리학, 공학, 금속, 자동차, 정밀기계, 철도 등 거의 모든 산업기술에서 세계 중심이었다. 노벨상 수상자가 다수였고, 지멘스, BASF, IG 파르벤, 크루프, 다임러, BMW 같은 초거대 기업군과 세계 일류 학계가 이미 1920년대부터 존재했다. 이 인프라를 전부 군수산업으로 돌려놓고 같은 자금을 쏟아넣자 실제로 쓸만한 기술이 나와 유보트, 타이거 탱크, V2 미사일 같은 게 탄생했다. 자금, 기술, 이 두가지가 준비되자 독일은 기관차를 단 열차처럼 전진했다. 전쟁을 선포하고 폴란드 등을 점령하고나서는 전쟁 약탈로 미포빌을 대신할 수 있었고, 이 시점부터 나찌독일이라는 열차는 떨어져가는 연료(자금과 자원)을 구하기 위한 노력(전쟁과 약탈)을 반복하게 된다. 전쟁이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니라 채무의 현물 상환 작전이었다. 네덜란드, 프랑스, 노르웨이 등 새로운 점령지의 중앙은행이 가진 금, 예술품, 현금 등을 독일 제국은행에 예금하도록 강제했다.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맹국 역시 독일이라는 열차를 위한 수백만 명의 노동력 공급지로 전락했다.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유럽의 재화를 전쟁과 확장, 독일 내수를 통해 실제로 거의 소진했고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로는 부족했다. 프랑스로도 식량이 부족했다. —- 이렇게 소비에 미친 열차가 된 독일에 희생된 또 다른 그룹이 유태인들이었다. 인종주의, 역사적 이유 등을 찾지만 결국 중요한 건 돈이 많은 "타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들만의 나라가 없기에 특별히 저항할 방법이 없는 민족인데 재산은 많았다. 나찌독일은 유태인들 추방과 학살을 통해서도 무시못할 규모의 재원을 마련했다. 그로도 부족했다. 자원이 고갈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동물 무리처럼 이제 독일은 동쪽의 광활한 지역을 향했다. 소련을 침공했다. 레벤스라움 Lebensraum 이라고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그냥 소련의 천연자원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 코카서스의 유전, 시베리아의 광물, 소련의 노동력, 모든 게 독일이라는 열차에서 고갈되고 있던 자원이었다. 히틀러는 단기간에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바바로사 작전이 성공했더라도 그 다음 약탈지, 또 그 다음 약탈지를 찾아야만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멈춰야 할 열차였다. —- 이래서 돈으로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질문에 답이 구해진다. 처음에는 그냥 속임수로 돈을 풀어 돈으로 돈을 벌듯 군수경제로 돌아갔다. 유럽을 정복하는 놀라운 업적을 보였으나 자원을 소진하고 난 독일에게 유럽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계속 침략전쟁을 벌이게 된 이유였다.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규모까지 팽창하고 자원 조달을 위해 자신들보다 강한 소련까지 침공하고는 그냥 몇년 안에 망해버렸다. "유럽을 정복한 히틀러가 그때 멈췄으면 지금까지도 나찌 제국이 있지 않았을까" 같은 상상이 큰 의미없는 이유다. 폰지 사기와 군국주의 팽창은 지속될 수도, 연착륙할 수도 없다. —- 사진 1. 미포 빌 사진 2. 미포 빌이라는 금융 사기 도구를 발명한 나찌독일 국가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 나중에 전쟁에는 반대해 해임됐고 히틀러 암살 음모 "발키리 작전"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나찌에 의해 수감됐다. 1970년 93세까지 장수했다.

비슷한 산업구조, 미국에 종속된 점까지 흡사한 문화, 강제로 공유된 근대사 등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극심한 수…

비슷한 산업구조, 미국에 종속된 점까지 흡사한 문화, 강제로 공유된 근대사 등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극심한 수도권 집중 모델이고 일본은 거의 전국균형발전 모델이다. 차이가 뭘까. 선진 경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보다 더 불리한 조건과 더 짧은 기간 내에 성장을 이룬 한국에게 서울 집중 경제는 뚫기 힘든 성장률 그래프 천장에 구멍을 내는 송곳 역할을 해줬다. 이미 성장을 이뤄버린 지금은 아쉬운 점들이 많다. 집중하던 관성이 있어서 지방이 황폐화되며 수도권 집중이 더 심화된다. 분명히 정책은 비슷했다. 중공업 분산 정책이 있었고 공업특화벨트도 만들었고 공공기관 이전도 했다. 차이는 주일미군의 사세보, 요코스카 항과 주한미군의 부산, 진해 항 간 물류수송 용이성, 한국을 지배한 독재자들의 결정 등으로 수도권 외 개발은 주로 영남지방에서 이뤄졌다는 점과 지방을 개발해도 수도권과 연결하는 방사형 개발이지 지방간의 네트워크 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점 등을 흔히 든다. 한국은 지방교부세,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국고보조금 등 중앙정부의 이전재원이 지방 재정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지만 일본은 지방정부가 걷는 자체 세수 비중 자체가 높고(일본 40%: 한국 25%) 전체 세출규모도 중앙정부보다 더 크다. 어차피 써야하는 돈을 쓰는 거지만 재원이 중앙이냐 자체냐는 권위에서 큰 차이가 생긴다. 한국 등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 등에 집중했지만 일본은 10-20년 단위 장기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했다. 62년 계획은 태평양벨트, 고도성장 축을 설정했고, 69년 계획은 과밀 억제, 분산. 77년 3차에서 지역 간 형평. 87년 4차에서 다핵분산형 국토 계획. 98년 5차에서 고령화, 재난, 지방소멸 대응 책으로 거점 네트워크, 회복력 중점. 완벽하진 않지만 분명 균형발전에 도움이 됐다. 어쩌면 가장 큰 차이는 지방자치제 실시 기간이다. 각 지역이 자신들의 이득을 추구하며 경쟁하는 속에서 올 수 있는 혜택이 분명히 있다. 그걸 한국은 계속 중앙에서, 그것도 독재국가라 대통령 혼자 결정했다. 지방은 눈에 들어오기 힘들었다. 그러다 1990년 김대중의 무기한 단식 투쟁으로 노태우 정부가 항복하고 95년부터 지자체가 실시됐다. 지방 공무원들이 이렇게라도 중앙정부에서 조금이나마 풀려나서 97년 한국 최초의 정권교체가 가능했다. 각 지역이 실제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행정과 정치를 한지가 이제 30년이 됐다는 뜻이다. 일본은 지자체를 1947년 헌법과 함께 지방자치법을 제정하고 같은해 바로 실시했다. 50년대에는 이미 도도부현–시정촌(都道府県-市町村) 체계가 안정화 됐다. 한국보다 50년 먼저 시작했고 지금까지 80년간 각 지방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간 이용객 50만 미만 지역 공항이 그렇게 많다. 일본 인구가 한국의 2배지만 일본 민간 여객 취항 공항 수는 한국의 14개에 비해 75개다. 더 올라가면 일본은 에도시대 번(藩)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며 메이지 유신 후 1871년에야 번제가 폐지된다. 다시 1947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까지 약 76년간의 중앙집권 시스템이 유지된 기간 외에는 1000년 째 지방자치 중이라고 봐도 된다. 반면 한국은 10세기 중반 고려 광종 때 노비안검법 등으로 호족들의 힘을 빼기 시작해 14세기 말 조선 건국 후 양반, 관료제, 향약, 관찰사 체계 등으로 지방 무력 자치세력이 절멸됐다. 일본과 달리 조선을 봉건제 국가로 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짧게는 500년, 길게는 900년에 걸친 중앙집권기를 겪고 1995년에야 지자체를 실시해 30년이 된 상태다. 한국이 수도권 집중 & 지방 공동화 & 거기서 오는 인구 절벽 심화 현상을 해결하려면, 경북 등을 보면 한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지방의 재정 자립도를 올려야 한다. 시도지사, 광역연합체 등을 중앙 정치의 상원 모델로 재구성하는 방법도 있다. 지방 정당이 생존하려면 뭐가 필요할지를 준비하면 지역이 살아난다. 부채 발행 자율권도 키워서 중앙정부의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장기적인 인프라 추진이 더 늘어야 한다. 앞으로의 교통 네트워크도 서해-동해, 남부-중부-북부 간선 연결 중심으로 설계해야 한다. 전라-경상, 강원-충청 직결 노선이 생겨야 지역경제가 직접 연계되고 수도권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그 안에서 뭔가가 돌아갈 수 있다. 단일 회사, 기관만 보내서는 하청경제가 될 뿐이다. 여러 지역과 기업, 대학을 묶어 연계 클러스터로 R&D, 스타트업, 금융까지 자체 생태계를 만들어야 돈이 그 안에서 돌 수 있다. 서울은 앞으로 문화도시, 외교도시, 금융허브로 특화시키고 산업은 무조건 지역 클러스터 들을 만든다고 생각해야 일본 같은 다핵 경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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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에서 사루만의 죽음 장면을 촬영하고 있던 피터 잭슨 감독이 사루만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토퍼 리에게 등에 칼을 찔렸을 때 어떻게 비명을 질러야하는지 설명했다. 크리스토퍼 리가 정정해줬다. "사람이 등에 칼로 찔렸을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알긴 해? 제대로 찌르면 비명을 지를새가 없어. 숨이 빠져나가는 소리만 난다고." 2차대전 때 다양한 전장에서 전투를 경험했고 영국군 정보부 요원으로 활약해 나중에 크리스토퍼 리의 사촌 이안 플레밍이 크리스토퍼 리 등을 모델로 제임스 본드 소설을 썼음을 알고 있던 피터 잭슨은 저항하지 않고 바로 수긍했다. 아마도 '… 사람 등을 찔러본 사람이랑 단말마에 대해 말싸움할 필요없다.'라는 생각. 너무 신용해버린 잭슨 감독이 첫 테이크에 오케이 해버려서 크리스토퍼 리는 내심 '더 잘 할 수 있는데' 하고 아쉬웠다 한다.

마크 큐반은 1999년 7월 broadcast.com 이라는 회사를 야후에 주식교환 방식으로 팔았다. 야후…

마크 큐반은 1999년 7월 broadcast.com 이라는 회사를 야후에 주식교환 방식으로 팔았다. 야후 주식 1400만주를 받았고 16억불에 달했다. 근데 매도 제한 기간이 있어서 6개월간은 어쨌건 야후 주식을 들고 있어야 했다. 야후는 주가가 인수 발표 후 3개월 만에 110불에서 170불로 오르고 큐반의 주식 가치도 26억불로 올랐을 정도로 당시 엄청 잘 나가던 회사라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마크 큐반은 닷컴 버블이 꺼진다고보고 투자은행들을 동원해 야후 주가와 관계없이 일정 가격에 팔 수 있는 권리를 풋옵션을 통해 확보했다. 당시 95불을 오가던 야후 주식을 무조건 85불에 팔 수 있는 풋옵션을 사고, 동시에 205불에 사겠다는 사람에게 팔겠다는 콜옵션을 팔았다. 야후 주가가 급상승해도 주당 205불 이상은 못받지만 폭락하더라도 85불은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이렇게 풋옵션 수수료를 콜옵션을 팔아 마련해서 비용은 들지 않았다. 매도 제한 기간이 지난 6개월 뒤 야후 주식은 170불에서 30불로 폭락했다. 마크 큐반의 주식 가치도 26억불에서 4.6억불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풋옵션 덕에 85불 가까이에 주식을 처분할 수 있었고 자산 중 11억불을 보존했다. 이 자금이 풀려서 2000년 농구팀 댈러스 매버릭스를 3억불 가량에 인수할 수 있었다. 2023년에 35억불에 매각했다.

애플이 아이폰을 발표하면서 모바일 시대가 시작됐고 스마트폰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다. 스마트폰 시장은 여전히…

애플이 아이폰을 발표하면서 모바일 시대가 시작됐고 스마트폰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다. 스마트폰 시장은 여전히 애플이 꽉 잡고 있지만 이제 특별히 새로운 형태나 기능 혁신은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AI다. 단지 AI의 발전 속도에 비해 스마트폰 등 기기가 그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거나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 페이스북 메타에서 레이밴 디스플레이 스마트글래스를 출시한다. 오리온에 들어갔던 기능들이 거의 다 구현됐다. 손가락 제스쳐, 보이스 컨트롤 및 AI를 통한 멀티모덜 인풋(사용자가 보고 있는 환경을 카메라 등을 통해 이해), AR overlay 등 비전 프로에 있던 기능이 들어갔고, 실시간 통역, 6시간 사용시간, 일반 안경과 구분하기 힘든 디자인 등이 추가됐다. 손을 빼앗기지 않고, 특히 스마트폰 화면 등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고도 컴퓨팅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AI 기능이 완전히 구현되면 [아이언맨]의 자비스에 좀 더 가까워지며 AI 비서 기능이 하드웨어 기능보다 훨씬 중요해진다. AI 시장에서 아직 선두를 지키고 있는 OpenAI도 거액을 투자해 아이폰을 디자인한 조니 아이브의 스타트업을 인수하고 AI용 기기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스마트폰 이후, 애플 이후를 다들 생각하고 있다. 혹시라도 스마트폰 다음 패러다임을 애플이 아닌 다른 회사가 잡을 경우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인 애플의 매출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아이폰이 위험해진다. 애플은 스마트글래스도, AI도 마땅한 제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원래 가동 중이던 비전 프로 경량화 프로젝트도 일단 중지하고 원래 2028년 출시 계획이던 스마트글래스를 2년 안에 출시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하고 있다. 자체 개발한 AI가 없는 애플은 다른 회사 모델이 완성되면 협력해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애플도 이런 쓰나미가 밀려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나름 애플 비전 프로도 만들어봤고, 퀘스트로 성공을 거두고 있던 메타를 눌러놓기 위해 2021년부터 아이폰에 앱 추적 투명성 기능을 넣어 메타에게 2022년부터 한해에만 100억 달러의 손실을 입혔다. 미리 손을 썼지만 오히려 메타의 아이폰, 안드로이드 등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노력이 시작됐다. 팀 쿡은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놓은 제품 개발팀들을 유지 발전시키고 회사 매출을 수십배 늘리는데에는 천재적이었지만 완전히 새로운 히트 상품 개발에는 익숙치 않다. 메타 등이 오픈소스 AI 모델 개발을 중단하고 상용모델로 전환하는 것도 요즘 경쟁적으로 출시되고 있는 AI 브라우저, AI 컴퓨터 조종 모델들과 관련있다. 스마트폰 대체재 등 실제로 어마어마한 수익모델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현실에서 스마트폰이 더 이상 필요없을 정도로 스마트글래스가 편리해질 때까지는 앞으로도 2-3년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금 뒤쳐져 있지만 애플의 특기가 타사 제품의 기능을 1-2년 뒤 몇단계 높은 성숙도로 자사 제품에서 선보이는 것인 만큼 역전도 충분히 가능하다. 애플은 아이폰이라는 막강한 제품과 충성스런 사용자층이 있고, 세계 최고의 자금 동원력이 있으며, 앱스토어라는 더 막강한 생태계가 있다. 레이밴 디스플레이가 아이폰1 같은 혁명적인 제품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메타는 새 제품으로 사용자들을 설득해야하고, 생태계를 새로 만들어 개발자들을 끌어들어야한다. 아직 레이밴 디스플레이에서 사용가능한 앱들도 대부분 메타에서 만든 앱들 뿐이다.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플의 아이폰1도 처음 나왔을 때는 앱스토어가 없었고 우리가 아는 "스마트폰" 이라는 시스템이 완성되는데도 몇년이 걸렸다. 그리고 구글도 후발주자라 힘들었고 오래 걸렸지만 앱스토어에 맞설 수 있는 크기의 플레이스토어를 키우는데 성공했다.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미중 갈등이 계속될 거라는 건 동의. 동맹을 굳이 깰 필요는 없다는 것도 동의. 한국이 핵무장을 고려해야…

미중 갈등이 계속될 거라는 건 동의.

동맹을 굳이 깰 필요는 없다는 것도 동의.

한국이 핵무장을 고려해야한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본다. 핵무장은 안보, 비용,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정말 꼭 필요할 때 선택하는 극단적인 방안이다. 정말 필요해지면 그때가서 개발 시작해도 현무-V에 탑재할 8톤 미만 단순한 핵탄두는 6-36개월 안에 개발 가능하다. 미리 개발해놓고 그 부담을 지기 시작할 필요가 없다. https://www.facebook.com/unattached/posts/pfbid02byTXtJVtyhJcSNqtC1kNE9iucM3xtsMjBuSnZZynPrFcGwfG4aFQ5UrKjmJsWBPUl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키고 검거도 거부하며 용산에서 버티는데 거기다 핵버튼까지 들고있었다고 상상을 해보라. 한국에 핵 없어도 현무-V와 SLBM 때문에 중국이나 북한도 자신들이 당장 한국 때문에 망하게 된 상황이 아닌 이상 한국에 핵공격은 못한다. 핵 필요 없다. https://www.facebook.com/unattached/posts/pfbid02q76AzwfFGHjapHV4MqejVdRQhKGrc255PuBfF9hFEsEkkqVwrqdUd66mp1YLNu3Jl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중재자가 될 수 없다는 강한 주장에 그 근거를 기대하며 읽었는데 안 나온다. 둘 중 선택해야 할 경우 미국을 택하는 게 유리하다는 말만 있다. 대중국 포위 작전에 쿼드로 참여해 한국보다 더 핵심 동맹인 인도는 미국 중심 경제 질서에서 벗어나는 지금 구도를 이미 16년 전에 완성한 브릭스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한국이 중재자를 왜 못한다는 건가. 미국과도 동맹 유지하고 중국과도 준-군사동맹 맺어볼까? 그럼 어쩔건데. 중국 압박에 필수적인 인도한테도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미국 최대 해외 기지이자 대규모 타지역 작전이 가능한 캠프 험프리스가 있는 한국에게도 아무 것도 못한다. https://www.facebook.com/unattached/posts/pfbid02bZS1fiTUjatuiECYAH3fgT6RoSAYcSio3tntYvnhvkyJ62az8ALLULhZ4ozNPThJl

난 저 교수를 잘 모르는 관계로 조선일보가 또 장난친 것으로 판단내린다.

아직 정치 신인인데 감각이 뛰어나다. 이재명 대통령이 필요한 종류의 지원을 해주고 있다. 민주당은 지지층…

아직 정치 신인인데 감각이 뛰어나다. 이재명 대통령이 필요한 종류의 지원을 해주고 있다.

민주당은 지지층이 너무 다양해서 분열을 주의하느라 공개적으로는 대통령이 혼자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중도보수 민주당, 개혁진보 조국혁신당의 역할분담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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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본인들 협상이 아니라 한일협상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도 물밑에서 다양한 작전을 했었다. 지금은 과연 할까 안할까. 언론이 왜 미국측의 요구를 들어줘야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했을까.

"첫 번째 프로젝트는 1965년 2월 23일부터 3월 3일까지 30명의 주요 대학 신문 학생 편집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USIS와 주한 미대사관이 공동 작성해 1965년 3월 18일 본국에 보낸 문건은 첫 번째 방문 프로젝트가 ‘매우 성공적(EMINENTLY SUCCESSFUL)’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근거로 학생 신문들에 ‘호의적인 기사들(FAVORABLE ARTICLES)’이 실리고 있음을 언급했다. 뿐만 아니라 평가 세미나의 분위기 역시 매우 좋았다고 보고했다.

연세대 ‘연세춘추’에 실린 '체류 200시간' 이라는 제목의 방문기는 “선입관념의 껍질을 벗고” 일본을 봐야 한다며, 감정적 대응보다 “이성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울대 ‘대학신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방문기가 연재됐다. '너무나 막연한 韓國觀, 澈底(철저)한 享樂主義(향락주의)에 흐르고' 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일본 사회의 단면과 그들의 한국 무관심을 지적하면서도, 관찰자적 입장에서 일본을 분석하려 노력한다.

USIS는 일본 방문 프로젝트 이후 대학생들의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 참여 의지 자체가 약화됐다는 평가도 내렸다…

….이후 야당이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위해 학생들에게 거리로 나올 것을 설득하려 했을 때, 일본을 다녀온 한국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이 보고하기를, 전체적으로 학생들은 그런 권유에 지쳤으며 공부에 전념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물론 많은 학생들이 동료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하기는 했다.
USIS 1965년도 평가보고서(Country Assessment Report)

동아일보 논설위원도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여론 잠재우기에 동원
USIS는 여론전에 우력 언론인도 동원했다. USIS는 그 대표적 사례로 1964년 평가보고서에서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 이동욱을 꼽으며, USIS 접근법의 ‘전형적인 예(typical of the approach)’라고 기록했다.

USIS가 후원하는 강연자들과 USIS 센터에 모이는 학생 단체들이 한일 관계 정상화를 점점 더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방문 프로그램 수혜자이자 국내 최대 신문사인 동아일보 논설위원인 이동욱이었다. 그는 USIS가 후원하는 한 순회 강연에서, 한국이 가장 큰 이익을 얻을 것이므로 한일 회담을 조기에 타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USIS 1964년도 평가보고서(Country Assessment Report)"

https://newstapa.org/article/pTCAa

국민들이 좀 더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 한일협상도 반대시위가 강해서 당연히 한국에게 더 유리하게 종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