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 관련 다양한 정보를 전해주는 분.
근데 인식에 좀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흑백논리의 문제점이 뭔지 잘 모르는 분들은 이 글 보며 공부해도 될 것 같음.
내가 방아쇠를 당겨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를 사살해도 괜찮다고 인정받는 경우가 전쟁이다. 내가 그 사람을 죽인 책임은 내 상관이 지고, 최종적으로 국가가 책임진다. 그럼 내가 저지른 살상의 정당성 여부는 국가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왜 전쟁 중인가로 판가름난다. 전쟁의 명분이다. 여기서 군인인 나는 [명령]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다.
어느 쪽이 먼저 때렸느냐는 당연히 중요한 명분이 된다. 남의 침략에 맞서 방어하는 전쟁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명분이다. 우크라이나 전에서 침략을 당한 건 우크라이나다. 여기까지는 쉽다. 우크라이나의 명분은 [방어전]이다.
어느 쪽이 얻어맞고 있느냐는 명분을 따질 때 고려사항은 되더라도 주요 근거가 되기는 힘들다. 나치가 침략전쟁을 시작할 때는 강자였지만, 전면적 세계전이 되고 나서는 비등하거나 열세였다. 태평양전쟁에서는 일본이 열세였다. 한 쪽이 수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 한 개인을 잡기 위해 몇달간 쫓아다니더라도, 정부와 신창원의 관계라면 정부 편을 들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명분은 [정의]가 되겠다.
근데 우크라이나(아조프 연대건, 정규군이건, 일반 우크라이나 민간인이건)돈바스 지역 러시아계 학살, 나토/EU 가입 추진으로 지역 전체의 안보 균형을 뒤흔든 걸 무시할 수도 없다. 여기서 러시아의 명분은 [자국민 보호/방어] 및 유럽-러시아 진입로가 갑자기 수천킬로 국경을 걸쳐 넓어지는 걸 막는 [안보]다. 특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실리가 없는 선택이었으니 더 안타깝다. 우크라이나의 명분이 확실히 아닌 건 [실익]이다. 우크라이나의 행보로 이득을 본 건 미국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두 주면 큰 인명피해 없이 끝났을 전쟁이 미국의 물자지원으로 계속 되고 있고 계속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미국의 대외적 명분은 [침략받는 약자 돕기]이지만 실제 명분은 [잠재적 경쟁자로 부상중인 러시아 막기]이다.
미국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미국은 전쟁 전부터 개입해왔다. 전쟁 전에는 정보전과 홍보전으로(전쟁을 막기 위한 정보전이 절대 아님), 발발 후에는 물자지원까지 나섰다. 사실상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 두들겨 맞고 있는 건 러시아고, 침략을 누가 했느냐, 이게 누구의 방어전이냐의 문제도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전쟁 전까지 계속 생존에 위협을 받던 건 돈바스와 크리미아의 러시아인들이다. 이들에게 이 전쟁은 또한 [방어전]이다.
세상이 복잡하므로 전쟁의 명분도 다양하다. 위에 나온 전쟁 명분은 전체적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봤을 때에만 성립한다. 양쪽이 모두 명분이 없을 때도 있고, 양쪽 모두가 있을 때도 있다. 두 국가가 아니라 여러 국가가 참여할 경우 더 복잡해진다. 이 상황에 "그래서, 어느 쪽이 나쁜 놈인데? 그것만 알려줘. 나머진 상관없어." 하면 단순해진다. 상황이 단순해지는 게 아니라 내 머리 속이. 이게 흑백논리다.
이런 상황을 놓고 "그래서 어느 쪽 편인데?"부터 따지면 안된다. 애초에 분쟁에 있어서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야한다는 개념 자체가 현실의 분쟁이 아닌 스포츠 경기에 익숙한 사람들의 인식이다. 현실에서는 계속 에러가 날 수 밖에 없다. 왜 한 쪽 편을 드는 게 우선인가? 무리하게 결론을 정해놓고 출발하니 과거의 학살 같은 건 잊어야한다는 주장까지 가게 된다. 과거의 학살과 현재의 학살이 다른 게 도대체 뭐지?
단순하고 쉬운 답을 포기하고 답이 모호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건 사실 요구하기 미안하다. 그러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게 목적이라면, 후자가 기본적으로 답이다. 전자의 경우가 되려면 정말 일방적이어야 하고, 그런 경우는 역사의 단면에서만 존재한다. 스포츠 관람/응원이 목적이 아니라 이런 의미없는 죽음과 파괴를 막는 게 목적이라면 어렵더라도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게 우리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