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붕괴

1870년 3월 1일, 파라과이 대통령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전투중 자신을 생포하려는 브라질 군에 저항하며 “나는 조국을 위해 죽는다! Muero por mi patria!”라고 외치고 창에 찔려 죽었다. 남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종결이었다.

로페스는 1862년 독재자였던 아버지에게서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2세 독재자였다. 자국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며 지역 문제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주장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우르과이까지 동참해 삼국동맹을 상대로 가장 작은 파라과이가 붙었다. 삼국의 인구는 1100만 명, 파라과이 인구는 약 52만 명이었다. 군 전술로도 다양한 자살 공격에 가까운 작전들을 감행했다. 동시에 콜레라와 기근까지 겹쳤다. 끊임없이 내부 인사들을 숙청하기도 했다.

전쟁 후 로페스는 나라를 망친 패배자로 기억되다가 볼리비아를 상대로 한 1932년 차코 전쟁 때 재평가를 받으며 영웅화 되어 지금은 파라과이 역사 속 대표 인물 중 하나가 됐다.

이 전쟁의 결과 파라과이의 사상자 수는 약 28만 명이었다. 통계가 없던 시절이라 정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인구 60% 이상이 사망했고 특히 징집연령 남성의 90%가 사망했다. 근대사에서 가장 파괴적 비율이었다.

파라과이의 도로, 철도, 통신선 등은 5년간 지속된 전쟁 중에 모두 파괴 됐고 경작지가 대부분 황무지로 변했다. 전쟁 이후에도 밭을 갈 사람이 없었다. 모든 자원이 고갈되다시피 했고 산업이 사라졌다. 한때 자급자족 국가였던 나라가 남미에서 가장 후진국이 됐다. 토지 상당수가 당시 부국이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팔렸고 대농장이 됐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게 상당한 영토를 잃었다. 지도에서 보라색 부분이 저 전쟁에서 잃은 영토다.

남녀 성비가 거의 1:9가 되고나니 어쩔 수 없이 일부다처제에 가까운 사회가 됐었다. 혼외 출산 문화가 지금도 강하다. 대신 여성 가장 가구가 많다보니 여성 교육과 사회 참여 비율은 높다. 경제 역시 지금도 150년 전 파괴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 후 빈곤과 국가 재정 충족을 위한 국유지 매각으로 아르헨티나, 브라질, 영국 기업, 그리고 일부 파라과이 부유층이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농지 85%를 상위 2.5%가 소유한다. 전쟁 전 남미에서 가장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뤘던 파라과이에는 이제 공업이 거의 없고 1차 생산품 위주 농축산물 수출 주류다.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충분히 예견 가능하다.

시리아 아람어

기원전 4년 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모국어 아람어의 방언인 시리아 아람어. 시리아 정교회의 종교의례용 언어다. 그 당시 사람들 말이 이랬고 당시 기도 역시 비슷했을 수 있다. 시리아 아람어는 동부 방언이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서부 방언을 썼다. 팔레스타인에서 아람어 다음으로 많이 쓰인 언어는 그리스어였고 신약은 대부분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히브리어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종교의례용 언어였고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사제들과 학자들 외에 많지 않았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이후 아람어에서 5세기 무렵에는 그리스어로 모국어를 바꾼다. 그러다 7세기에 무슬림 제국에 정복 당하며 아랍어를 쓰게 된다. 팔레스타인 토박이 유태인들은 지금도 아랍어로 기도한다.

일찌감치 유럽으로 건너갔던 유대인들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다시 완전히 갈아타고 10세기까지 사용하다가 각 지역에서 분화되는 언어를 사용했다. 스페인에서는 스페인어와 아람어, 히브리어를 섞은 라디노 Ladino를 유대인 공동체에서 사용했고, 독일과 프랑스 북부 유대인들은 중세독일어에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섞은 이디시 Yiddish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 그룹이 나중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등으로 이주하며 슬라브어 영향을 받고, 각 지역에서 다시 미국으로 이주해서 미국에도 이디시 화자들이 많다.

이스라엘 건국을 준비하던 그룹들 사이에서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를 중심으로 현대 히브리어 표준화가 이뤄졌다. 잃은 나라를 되찾거나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모국어가 필요하다는 시오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히브리어가 현대 히브리어로 복원돼서 이스라엘에서 사용되고 있다. 사어를 되살려 수백만에게 새로 교육해 한 국가의 모국어로 사용하는 희귀한 예다.



조지아 버전

영국 왕실의 독일인들

런던 항구에 내린 거대한 사내는 잠시 멈춰 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Your Majesty!”라 외치며 머리를 숙이는데, 그는 시선만 굴렸다. 통역이 옆에서 부지런히 속삭였지만 영어는 여전히 낯설고, 런던의 흙냄새도, 군중의 분위기도 어색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자,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였다. 황제 아래 선제후 7명 중 하나로 서열을 다투던 독일 귀족이 이제 영국의 왕 조지 1세로 불린다는 사실은, 당사자에게도 실감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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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714년 앤 여왕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후사가 모두 요절하면서 왕위 계승 규칙이 문제로 떠올랐다. 가톨릭은 무조건 제외한다는 법 때문에 가까운 친척 대부분이 탈락했고, 계보를 수 단계 거슬러 올라가 계산해보니 조건을 충족하는 가장 가까운 혈통이 신성로마제국 하노버 가문이었다. 당시 하노버 Hanover는 작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선제후령이었고, 선제후(選帝侯 Prince-Elector Kurfürst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 Georg Ludwig는 이미 독일 정치의 핵심 축이었다. 영국은 결국 제국의 강력한 귀족을 왕으로 스카우트하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왕관을 썼다고 바로 영국 왕답게 변신한 건 아니다. 영국 이민(?) 당시 54세였던 조지 1세와 31세였던 아들 조지 2세는 궁정 언어로 독일어를 유지했고, 영국 의회 연설도 통역에 의존했다. 영국 귀족들은 그들을 왕으로 모시면서도 문화적 거리감을 오래 느꼈다. 조지 3세에 이르러서야 조금 ‘영국 왕 답다’는 평가가 붙었지만, 그 역시 독일어는 유창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엔 독일적 색채가 절정에 이른다. 어머니가 독일인, 남편 앨버트도 작센 코부르크 고타 Sachsen-Coburg und Gotha출신. 부부 사이의 대화는 언제나 독일어였고, 오늘날 영국의 상징처럼 보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풍습도 이 시기 독일에서 직수입된 문화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계 왕가들을 중심으로 방대한 혼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유럽 거의 모든 현대 왕실을 잇는 중심축이 됐다. 아홉 자녀와 수많은 손주들을 결혼을 통해 유럽 왕실 곳곳으로 보냈다. 훗날 1차대전 때 다양한 유럽 국가들이 참전했지만 사실 사촌들간의 싸움이었다. 영국의 조지 5세는 빅토리아의 손자, 독일 빌헬름2세는 외손자, 러시아 니콜라이 2세는 손녀 사위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다.

독일 하노버는 그래서 영국 국왕의 땅이었으나 빅토리아 여왕 즉위 당시 하노버에서는 여성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지 않아 빅토리아 여왕의 삼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통치를 시작하고 갈라졌다. 30년 뒤 독일 통일 과정에서 흡수되고 사라진다.

2차대전 때 나찌 전범들 중 찰스 에드워드/칼 에두아르트가 당시 국왕 조지 5세의 사촌이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자였다. 영국에서 태어났고 영국 왕자였으나 가문의 명령으로 10살 나이에 독일로 보내져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히틀러의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전후 전범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공은 영국 해군 장교로 참전했지만 어머니가 독일인이고 그의 누나 4명은 모두 독일 귀족과 결혼했기 때문에 매형들도 나찌 당원이거나 군부와 연결돼 있었다.

필립 공의 사연도 파란만장하다. 덴마크 국왕의 둘째 왕자였던 아버지가 새로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실에 스카우트 돼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가 됐으나 덴마크 왕위 계승권과 칭호를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근데 필립 공이 그리스에서 태어나고 1년 만에 쿠데타가 일어나 그리스 왕족들이 마구 처형 당했다. 독일 헤센 대공국의 바텐베르크 가문 출신이지만 동시에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로 영국 왕실의 직계 혈통인 어머니 앨리스 공주가 친정 영국 왕실에 구조를 요청해 영국이 군함을 파견해 구출해왔다. 그래서 필립 공은 프랑스, 독일, 영국을 떠도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그리스와 덴마크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정교회에서 영국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결혼했다.

영국 왕실 성씨 또한 1917년까지 작센 코부르크 고타 Saxe-Coburg and Gotha라는 독일식 이름을 썼으나 1차대전이 터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이 독일과 싸우는 와중에 왕실 성이 독일식이라는 사실은 말 그대로 폭탄이었다. 국왕 조지 5세는 성을 작센 코부르크 고타에서 윈저 Windsor로 바꿨다. 하지만 그 역시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공식 석상에서는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엘리자베스 2세는 독일어를 잘 이해했지만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았다. 아들인 현 국왕 찰스 3세는 아버지 필립 공의 영향으로 독일어 구사가 능숙하다. 정상회담에서 독일어권 지도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장면이 해외 언론에서 여러 차례 포착됐다.

필립 공 쪽의 모계 친족들인 영국에 살던 독일의 귀족 가문 바텐베르크 Battenberg 씨들도 성을 마운트배튼 Mountbatten으로 바꿨다. 지금 왕실 멤버들은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을 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윈저였으나 필립 공이 자녀들에게 마운트배튼 성을 고집해서 합의를 봤다 한다. 왕위 승계를 포기하고 나온 해리 왕자도 공식 이름이 Henry Charles Albert David Mountbatten-Windsor다. 아버지가 왕세자였고 영국에서 왕세자는 일반적으로 웨일스 공이라 학교 다닐 때는 Harry Wales 라는 이름도 썼고 독립한 뒤에는 결혼할 때 받은 작위인 서섹스 공작에서 따온 Sussex 라는 성도 쓴다. … 그냥 자기 멋대로 아무 이름이나 쓰는 것 같다.

Carl Zeiss

2차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독일 로켓 기술과 과학자 쟁탈전은 잘 알려져 있다. 근데 로켓 과학자만 탐을 낸게 아니다. 당시에도 광학은 매우 중요했고 독일 광학은 세계 최고였다. 미국은 칼 짜이쓰 Carl Zeiss 가 19세기에 세운 렌즈 회사 공장을 뒤져 핵심 인력과 특허 문서를 챙겨 서독으로 옮겼고 뒤늦게 도착한 소련은 남은 인력과 장비로 동독 짜이쓰를 세웠다. 기술, 상표권으로 싸우던 두 회사의 기술력은 냉전 양 진영 첨단 기술의 기준이 됐다. 독일 통일 뒤 두 회사는 다시 합쳐졌다.

안경, 카메라 렌즈 등 다양한 산업에서 짜이쓰등 독일회사들은 최고였다가 일본이 급속도로 성장하며 정밀광학 기기와 SLR 시장에서 밀렸다. 라이카도 부도 직전까지 갔고 롤라이가 망했고 짜이쓰도 바디 생산을 포기하고 야시카에 콘탁스 브랜드로 하청을 줬다. 광학의 왕좌가 일본으로 넘어갔다. 소비자 시장을 완전 장악한 일본의 칼날을 피해 짜이쓰는 초정밀 B2B에 집중했다. 반도체에서 ASML과 함께 EUV에 모든 걸 거는 도박을 했다. 대성공했다.

EUV 장비 안에 들어가는 거울은 지구상에서 가장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 거울이 지구 크기였으면 가장 높은 산맥 높이가 0.5mm 정도로 매끄럽다. 굴곡이 없다. 그리고 그 거울을 만드는 기술은 세계에서 짜이쓰만 갖고 있다. 특히 EUV 장비와 기술은 해자가 너무 깊어서 라이벌들이 언제쯤 따라잡을 수 있을지 예측도 힘들다. 니콘과 캐논은 반도체 최선단 공정에서는 사실상 퇴출됐다.

수술용 현미경, 라식/스마일 수술용 장비, 다 짜이쓰다. 독점까지는 아니지만 절대 강자다. 자동차 엔진이나 항공기 부품 등 측정하는 산업용 측정기도 짜이쓰가 표준이다.

바디를 하청주고 있던 야시카마저 2005년 카메라 사업을 접으면서 렌즈는 아직 알아주는데 꽂을 곳이 없는 신세가 된 짜이쓰와, 뛰어난 이미지 센서 기술로 비디오카메라에서는 알아주는데 광학기술이 없어서 카메라시장에서는 무시 당하던 소니가 1996년부터 시작한 제휴를 키웠다. 먼저 소니 소형 디카에 짜이쓰 렌즈를 넣어 색감으로 주목받으며 시작했다. 이후 DSLR과 미러리스에서 A 시리즈를 성공시키며 니콘과 캐논에게 완벽하게 설욕했다.

요즘은 소니도 자체 제작 렌즈 라인업을 키우고 있고 짜이쓰도 다른 사업 할 게 많아서 소니에 집착하는 상황은 아니다.

뉴라이트,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재섭이 뉴라이트 철학을 시연해보이겠다고 조선과 대한민국은 별개 국가니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동상말고 다른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15일이 광복일이 아니라 건국일이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해 광복절을 대체하자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지금 우리가 조선과 단절된 존재라는 프레임을 밀면 자신들의 친일도 아무 문제가 아닌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병약한 조선을 합병한 거지 지금의 자신들의 자랑스런 자유민주주의 한국을 합병한 게 아니니까. 한국이 존재하기 전에 친일 앞잡이 좀 한 게 뭐가 문제냐, 그리고 그 친일행위가 문제가 아니라면 지금 일본 편 드는 게 뭐 어떻냐는 거다.

웃기지만 그게 저들 논리 능력의 한계다. 한국의 정체성이 형성된 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때고, 일본제국이 합병한 게 그 대한제국이다. 제헌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잇는다고 되어있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되어있다. 뉴라이트의 주장은 “그게 아니라 45년에 한국이 짠하고 갑자기 시작된 거면 우리가 욕 덜 먹을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좀 더 야심차게 표현한 것 뿐이다. 김재섭 같은 사람들이 덥썩 무는 거고. 정상인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보니 애기 때부터 세뇌할 수 있는 리박스쿨이 필요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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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 별개로 한반도 정치체들의 국호에 패턴이 있는 건 맞다.

고조선은 우리가 이성계의 조선朝鮮과 구분하기 위해 古를 붙여 고조선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이라고 불렀다.

이후 고조선의 강역을 차지하는 고구려高句麗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꿨다.

200년의 발해/통일신라 남북국시대를 지나 금방 국호는 다시 고려가 된다. 궁예의 후고구려/고려/태봉을 물려받은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그 다음은 이성계가 국호를 다시 조선으로 바꿨고, 지금은 북한의 국호가 여전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조선 – 고려 – 고려 – 조선 – 조선/한국 패턴으로 왔다.

통일 논의에서 1960년대부터 북한이 주장하기 시작한 고려연방제 방안이 채택됐으면 다시 한 번 고려가 될 수도 있었다. 영문명이 Korea라 사실 우린 지금도 고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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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좀 예외적이다. 근데 이것도 뉴라이트 주장처럼 45년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고 고조선과 삼국시대 사이에 마한진한변한馬韓辰韓弁韓 삼한 시절에서 따왔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때 고종이 한韓을 국가의 공식 상징으로 격상시키고 이후 신민회 독립협회 애국계몽운동에서 “한민족”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맞서야하는 상황에 19세기 말 전세계적 민족주의의 유행을 빌어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하고 “大韓”이라는 아직 사용된 적 없는 나라 이름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장착, 혹은 옛 정체성을 재발굴했다.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한민족, 한반도, 한국, 한국인이 된 게 겨우 130년 정도 됐다는 뜻이다. 훈민정음/언문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도 1908년 주시경 선생 덕이니 대한제국의 새 정체성 캠페인의 영항을 받았다고 볼수 있다. 한국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조선인이나 고려인이어도 별로 생소할 게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럼 그 전에는 우리를 스스로 조선민족이라고 한 적이 있냐… 민족주의라는 게 근대의 발명이다보니 예전엔 꼭 “우리”를 하나로 묶어 부르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빠르게는 삼국시대 때 고구려 신라 백제로 나눠져 있음에도 셋을 한번에 부를 때는 삼한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고려 때 기록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삼한일통” 같은 시대를 가로지르는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정체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사실 소중화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니 우리를 민족으로 묶어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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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별개의 이야기지만 한국 민족주의/유사사학 계열에서 ‘한’이라는 단어에 애정이 굉장하기도 하다. 한글, 한강의 한, 튀르크/몽골계의 칸/한汗, 환인환웅의 桓, 한韓, 단군의 단檀, 배달倍達/밝달의 배 등이 다 같은 ‘밝다/크다/위대하다’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사무라이, 신앙 위해 모든 것을 버리다

사무라이로 태어난 주스토 타카야마 우콘(ジュスト高山右近)은 12살이던 1564년에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다이묘로 성장한 타카야마는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나 이후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지했을 때 신앙 포기를 거부하고 다이묘 지위와 영지를 포기했다.

27년 뒤인 1614년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인들을 추방했을 때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62세 나이에 필리핀 마닐라로 쫓겨났다. 거기서 환영받았으나 도착 44일만에 급환으로 죽었다. 필리핀에 묻힌 유일한 다이묘다.

기독교 박해에 저항해 모든 것을 포기한 점을 인정해 2017년에 프란시스 교황에 의해 시복돼서 복자(the Blessed)가 됐다. 이후 타카야마 관련 일정한 수의 기적이 검증되면 성인으로 추대 될 수 있다. 이미 검증 과정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종 Servant of God’, ‘가경자 Venerable’, ‘복자 Blessed’, ‘성인 Saint’ 순서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