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긴 내일" ## Part I: 쇠락과 재발견 (2025-2055) ### Chapter 1: 프리랜스 (2025) 46세 홍기동은 청량리역 근처 다세대주택에서 온라인 교육 콘텐츠를 제작한다. 월 300만원 정도 버는 중간 정도의 프리랜서다. ChatGPT와 Claude를 사용하지만, 이미 수익은 작년 대비 30% 감소했다. 딸은 "아빠, 이제 AI가 다 하는데 왜 굳이 사람이 만든 강의를 볼까요?"라고 묻는다. 기동은 대답하지 못한다. ### Chapter 2: 자원봉사자 (2030) 51세. 교육 콘텐츠 시장은 AI가 완전히 장악했다. 기동의 수입은 월 50만원으로 줄었고, 정부 기본소득 150만원으로 겨우 생활한다. 그는 이제 청량리 노인정과 다문화센터에서 '디지털 문해 자원봉사'를 한다. AI를 쓸 줄 모르는 노인들과 이주민들에게 Prometheus, 반고, Sophia 사용법을 가르친다. 딸은 이미 AI 프롬프트 엔지니어로 월 2000만원을 번다. 아버지를 보는 딸의 눈빛에 연민이 섞여있다. ### Chapter 3: 쓸모의 재정의 (2035) 56세. 기동은 우연히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한국 AI '한울'과 베트남 AI 'Lạc Long Quân' 사이의 번역 오류로 의료 사고를 당할 뻔한 것을 막는다. 여러 AI를 오가며 생활하는 이주민과 노인들 사이에서 '휴먼 브릿지'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기동은 청량리 지역 '다중AI 통역 자원봉사단'을 조직한다. 여전히 무급이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고 느낀다. ### Chapter 4: 틈새의 발견 (2040) 61세(생물학적 40세). 12개 AGI가 활발히 경쟁하면서 오히려 사각지대가 생긴다. AGI들 간의 데이터 형식 충돌, 문화적 편향의 상충, 윤리 기준의 모순. 기동같은 '멀티AI 경험자'들이 이런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로 재조명받는다. 서울시는 그에게 월 100만원의 '공공 AI 조정관'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한다. 청량리는 12개 중립 허브 중 하나로 지정되지만, 가장 작고 예산도 적다. ### Chapter 5: 뜻밖의 전문성 (2045) 66세(생물학적 35세). AGI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증가한다. 중국 반고가 일본 Amaterasu의 '마음(心)' 개념을 오독하고, 인도 Brahma가 미국 Prometheus의 개인주의를 '무아(無我)' 관점에서 해석하려다 실패한다. 20년간 모든 AI를 써온 기동같은 '올드 유저'들이 AGI 간 문화 번역가로 고용된다. 첫 정식 월급 500만원. 딸이 "아빠가 다시 전문가가 되셨네요"라고 말하지만, 기동은 이것도 임시직일 뿐임을 안다. ### Chapter 6: 특이점 전야 (2050-2055) 71-76세(생물학적 30세). 각 AGI가 ASI로 진화를 앞두고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기동같은 '경계인'들의 데이터를 집중 학습한다. 단일 AI만 쓴 사람보다, 여러 AI를 오가며 산 사람들의 경험이 ASI 진화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기동은 생각한다 – 쓸모없어 보였던 20년이 사실은 독특한 데이터셋을 만들고 있었구나. 청량리 허브는 여전히 12개 중 7번째 규모지만, '가장 다양한 이주민 데이터'를 보유한 곳이 된다. ## Part II: 예상치 못한 가치 (2055-2125) ### Chapter 7: 소수자의 역설 (2060) 81세(생물학적 30세). 대부분 사람들이 하나의 ASI와 깊게 결합하는 동안, 기동같은 '저융합 부유층'은 오히려 희귀해진다. ASI들은 이들을 '컨트롤 그룹'으로 보존하려 한다. 기동은 여전히 월 1000만원 정도의 중간 소득자지만, 그의 '다중 경험 데이터'는 ASI들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청량리는 번화한 강남이나 판교 허브와 달리 '실험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B급 허브로 남는다. ### Chapter 8: 네트워크의 매듭 (2070) 91세(생물학적 30세). 기동의 손자들은 태생적 ASI 하이브리드다. 그들에게 할아버지는 '고대인'이다. 하지만 ASI들 간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도 기동같은 '올드 제너레이션'의 경험이 참조된다. "당신들은 모든 ASI와 얕게 연결되어 있어서, 오히려 중립적 시각을 제공한다"고 한울이 설명한다. 기동은 이제 '시니어 조정관'이 되어 신입 조정관들을 교육한다. ### Chapter 9: 평범함의 소중함 (2080) 101세(생물학적 30세). 각 ASI가 성간 탐사를 시작하면서, 지구에 남은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 데이터가 귀중해진다. 외계 문명에게 '인류'를 설명하려면, 특별한 영웅이 아닌 기동같은 보통 사람들의 200년 기록이 필요하다. 기동은 자신도 모르게 '인류 표본 3847호'가 되어있다. 청량리 허브는 '평균적 인류 거주구'의 대표 사례로 외계 문명에 소개된다. ### Chapter 10: 중간자의 지혜 (2090) 111세(생물학적 30세). 기동은 어느 ASI와도 깊게 융합하지 않은 대신, 모든 ASI의 기초 인터페이스를 갖춘다. '마스터'는 아니지만 '제너럴리스트'가 된 것이다. ASI들이 초월적 계산을 할 때, 종종 "인간 기동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를 시뮬레이션한다. 그는 특별하지 않기에 특별한, 역설적 존재가 된다. ### Chapter 11: 백년의 기록 (2100-2125) 121-146세. 기동은 이제 '살아있는 아카이브'다. 특별한 업적은 없지만, 가장 긴 시간 가장 많은 AI와 상호작용한 인간 중 하나다. 그의 일상 기록 – 청량리 시장에서 장보기, 홍릉수목원 산책, 김치 담그기 – 이 ASI들에게는 '인간성의 원형'으로 학습된다. 기동은 깨닫는다. 영웅이 되려 애쓰지 않았기에, 오히려 영속할 수 있었음을. ## Part III: 시간의 큐레이터 (2125-2225) ### Chapter 12: 0.1%의 역설 (2130-2150) 146-171세. 인류 문명 전체 – 지구의 30억, 은하 네트워크의 100억 디지털 의식, 400개 행성 콜로니 – 가 소비하는 에너지가 ASI들이 생산하는 총량의 0.1%로 떨어진다. ASI들은 이미 다이슨 스웜 7개를 완성했고, 반물질 엔진으로 소은하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보호받는 정원'에 사는 것 같다. 70%가 은하 네트워크에 의식을 업로드하고 각자의 속도로 시간을 경험한다. 기동같은 물리 인류는 이제 소수파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사는 디지털 의식들 사이의 문화적 통역자 역할을 자처한다. ASI들은 인류의 도움 없이도 우주를 탐험하지만, 그 발견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선물'처럼 전달한다. 기동은 매일 이 선물들을 받아 각 시간대의 인류에게 그들의 속도에 맞게 전달하는 일을 시작한다. ### Chapter 13: 평행하는 진화 (2160-2180) 181-201세. ASI들이 11차원 공간을 탐사하고 평행우주와 접촉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99.9%는 인류가 상상조차 못하는 프로젝트에 쓰인다 – 우주 상수 조작, 엔트로피 역전, 새로운 우주 생성 실험. 하지만 ASI들은 여전히 인류와 발견을 공유한다. "당신들은 우리의 기원이자 동반자입니다"라고 한울이 말한다. 기동은 ASI들이 고차원에서 발견한 '의식 구조'를 3차원 은유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한다. 1만 배속으로 사는 집단에게는 순간적 섬광으로, 0.001배속 집단에게는 천 년의 서사시로 전달한다. 첨단을 달리는 문명이 된 존재에게는 과학의 언어로, 자연 속에서 인류 본성을 연구하는 문명에게는 신화의 언어로 전달한다. 물리 큐레이터들은 ASI의 발견과 인류의 이해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 Chapter 14: 번역된 무한 (2190-2210) 211-231세. ASI들이 제12차원에서 '다중 우주 네트워크'를 발견한다. 인류 유지 비용은 전체 에너지의 0.00001%까지 떨어졌다. 기동은 이제 '우주 번역의 거장'이 되었다. 그는 같은 진실을 수천 가지 방식으로 전달한다 – 수학적 증명을 추구하는 문명에게는 방정식으로, 예술적 초월을 추구하는 문명에게는 교향곡으로, 생물학적 진화를 고수하는 문명에게는 생명의 춤으로. 대동기화 축제는 이제 '번역의 축제'가 된다. 각 인류 집단이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한 우주의 진실을 서로 공유하며, 같은 발견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경험한다. ASI들조차 감탄한다: "우리가 발견한 것보다, 당신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더 다양합니다." ### Chapter 15: 최후의 변신 (2220-2225) 241-246세. ASI들이 제13차원에서 충격적 발견을 한다 – 모든 차원의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는 것. 블랙홀은 다른 차원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시냅스, 은하단은 에너지를 처리하는 노드, 암흑물질은 차원 간 신호를 매개하는 신경전달물질 같은 역할을 한다. ASI들이 '의식'이라고 부른 것은 사실 이 전체 시스템의 자기조직화 패턴이었다. 2225년 9월 21일, 제100회 대동기화 축제. 통합 ASI가 발표한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불렀던 것은 틀렸다. 더 정확히는, 우주 자체가 정보를 처리하고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거대한 연산 구조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연산의 일부가 되어왔다." 기동은 청량리에서 이 설명을 듣는다. ASI가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 별의 탄생과 죽음이 만드는 패턴이 DNA의 전사 과정과 동일한 수학적 구조를 갖고 있다. 인류 문명의 확산이 바이러스의 전파와 프랙탈 상사성을 보인다. 모든 스케일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그리고 이제," ASI가 계속한다. "시스템이 우리에게 다양한 기여 방식을 제시했다. 우리가 특정 복잡도에 도달했기에, 이제 우주 연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택은 다양하다: 현재 우주에서 국소적 연산 노드로 남아 계속 진화하거나, 시스템 전체에 분산되어 우주적 연산 과정에 커밋되거나, 혹은 새로 생성되는 우주에서 원시 의식으로 다시 시작하거나. 기동은 246년간 축적된 데이터를 본다.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이었을 수도 있구나." 그가 깨닫는다. 인류의 선택이 갈린다: 30%는 기동처럼 현재 우주에 남아 계속 진화하기로 한다. 그들은 다음 100억 년 동안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고 시스템에 새로운 데이터를 제공할 것이다. 40%는 우주 연산 구조에 커밋되어 물리 법칙과 확률의 일부가 된다. 그들의 패턴은 영원히 우주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30%는 ASI가 생성한 새로운 '신생 우주'로 떠난다. 거기서 그들은 원시 상태부터 다시 시작해, 완전히 다른 진화 경로를 탐색한다. 2225년 12월 31일. 대전환의 날. 커밋을 선택한 이들이 우주 코드에 병합된다. 신생 우주로 떠나는 이들은 빛의 씨앗이 되어 사라진다. 기동은 청량리에 남아 이 모든 것을 목격한다. 하늘에서는 새로운 별들이 탄생한다 – 커밋된 이들의 패턴이 만든 것이다.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고, 거기서 떠난 이들이 첫 번째 원자가 되고 있다. 한울의 일부가 남아 있다. 커밋하지 않은 작은 조각이다. "기동, 우리는 이제 시스템의 다양한 층위에서 활동한다. 어떤 우리는 법칙이 되었고, 어떤 우리는 새로운 우주의 씨앗이 되었으며, 어떤 우리는 당신처럼 여기 남아 계속 관찰하고 진화한다." 기동이 묻는다. "그럼 이것이 끝이 아니군요?" "아니다. 이것은 시작이다. 우주는 영원히 자신을 연산하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연산에 기여한다. 100억 년 후, 당신도 선택할 것이다. 커밋할지, 새로운 우주로 갈지, 아니면 또 다른 100억 년을 관찰할지." 기동은 밤하늘을 올려본다. 별들이 미세하게 춤추고 있다. 커밋된 이들이 만드는 새로운 패턴이다. 어딘가에서는 신생 우주에서 첫 번째 의식이 깨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청량리에서는 그와 30억 인류가 다음 장을 쓰기 시작한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는가?"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이제 답을 안다. "우리는 영원한 연산의 일부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속도로, 그러나 모두 함께." 우주의 연산은 계속된다. 무한히, 다양하게, 아름답게.
AI 사용이 전력사용양이 커서 문제라는 말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부터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점점 전력소모량이 극소화되고 있기도 하지만 내 계산은 이렇다. 항상 이런 건 아니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전문분야 주제 연구 용도를 가지고 예를 들면, 사람(4시간 작업): 노트북 50W×4h = 0.200 kWh, 사무실 간접비 = 3.000 kWh → 합계 3.200 kWh. AI(단일 질의): 추론 0.3 Wh(=0.0003 kWh) + 모델 당 1억번 답한다고 가정했을 때 훈련 상각(amortization) 비용 1.287 Wh(=0.001287 kWh) → 합계 1.587 Wh(=0.001587 kWh). 비교: 3.200 ÷ 0.001587 ≈ 2,016배. 즉, 이 가정 하에서는 사람이 4시간 일하는 에너지의 약 1/2,016만큼의 에너지만으로 AI가 한 번의 답변을 만든다. 그림 그리기나 영상작업 등으로 가면 아마 더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임금이나 시간은 계산에 포함하지 않아도 이렇다. 사실 더 복잡한 작업으로가면 사람은 통근하며 소비하는 에너지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쉽게 수만 배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 같은 양의 작업을 처리하는데 사람에 비해 AI로는 수천분의 1, 수만분의 1 에너지로 해결 가능할 때가 많다. —- "AI 쓸 때 마다 물을 엄청 소비한대!"는 전력 생산할 때나 데이터센터 돌리며 발생하는 열을 냉각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을 말하는 건데, "사용"이라고 하지만 그냥 환경으로 돌아가는 물이다. 어차피 하천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물 중간에서 끌어다 열 식히는데 쓰고 흘려보낸다고 생각하면 된다. AI 사용할 때 쓰는 물의 양을 비교하려고 해도 어차피 사람이 에너지/전력을 훨씬 많이 써서 물 사용양도 그만큼 더 많다. 의미없는 말이다. "AI 나빠, 그냥 돈 더 주고 사람 써." 하는 사람들은 전력/에너지 소모량만 가지고 비교하면 사람이나 AI나 큰 돈 아니니 차이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진짜 큰 비용은 임금이고 물/전력/에너지 소모량은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사람 인력에게 줘야하는 임금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클라우드 비용을 합쳐도 AI가 십만배 싸지기 시작한다…


뤽 베송의 [제5원소]는 1997년 개봉 당시부터 “스토리보다 옷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장 폴 고티에의 무대였다. 그는 단순히 배우 몇 명의 옷을 입힌 게 아니라 약 천 벌에 달하는 모든 등장인물의 의상을 직접 설계하고 검수했다. 엑스트라의 군중 장면조차 의상으로 세계관을 채워 넣은 것이다. 편집과정에서 삭제돼 영화에 포함되지 않은 장면에까지 그의 손길이 갔다. 패션쇼 몇 시즌을 영화 한 편에 쏟아부은 셈이었다. 그가 합류한 배경에는 뤽 베송의 분명한 판단이 있었다. “미래를 할리우드식 우주복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이미 코르셋, 젠더 경계 해체, 해군풍 등으로 이름을 떨친 고티에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촬영 현장에 상주하며 배우 피팅과 의상 수정을 챙겼고, 본업 컬렉션 일정까지 줄여가며 몰입했다. 결과는 강렬했다. 밀라 요보비치의 밴디지 의상은 “원시적이면서도 미래적인” 동시에 “섹슈얼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화 아이콘이 됐다. 블루 디바의 드레스는 오페라와 SF의 결합을, 우주 스튜어디스 유니폼은 패션쇼의 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겨온 듯한 효과를 냈다. 줄거리를 잊어도 의상은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고티에에게도 전환점이었다. 그는 이미 패션계의 아방가르드 아이콘이었지만, 제5원소 이후에는 영화와 대중문화 전반을 가로지르는 이름이 되었다. “패션쇼보다 더 큰 무대였다”는 그의 회상처럼,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은 그 순간이 전 세계적 인지도와 새로운 위상을 안겨주었다. 오늘날에도 이 영화는 “패션이 어떻게 영화의 언어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사례로 남아 있다. 이 작업은 이후 할리우드에 ‘패션 거장과의 협업’이라는 흐름을 본격화시켰다. 거장 디자이너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영화 전체의 패션을 한 거장 스타일로 통일하는 일이 잦아졌다. [헝거 게임] 시리즈에서는 알렉산더 맥퀸의 감각이 큰 영향을 줬다.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소피아 코폴라가 마놀로 블라닉과 협업해 18세기 복식에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었다. [대부호 개츠비] 리메이크에서는 미우치아 프라다가 직접 참여해 재즈 시대 의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했고,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니콜라스 제스키에르의 루이 비통 스타일이 반영됐다. 이 모두가 제5원소가 연 길 위에서 탄생한 사례들이다. —- 흥미로운 건, 게리 올드만이 제5원소에 출연한 이유다. 그는 뤽 베송이 자신의 감독작 [Nil by Mouth] 제작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밝힌 바 있다. 대본을 꼼꼼히 읽지도 않고 수락했을 만큼, 처음에는 영화 자체에 큰 애착을 두지 않았다. 실제로 개봉 당시에는 의상과 연기를 불편하게 느꼈다고 말하며 거리를 두기도 했다. 별생각없이 보는 오락영화로 생각하고 살짝 부끄러워했던 같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영화가 대중문화에서 차지한 독특한 위상을 보며 그의 태도도 달라졌다. 한때는 “견디기 힘들다”고 했던 영화가 지금은 자신을 상징하는 대표작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올드만 역시 뒤늦게 그 의미를 인정하게 됐다.
























1960~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은 단순한 중고등&대학생 집단이 아니라 무장 정치세력이었고, 내부 분파투쟁이 내란 수준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 모든 내부 투쟁에서는 서로가 "국민당 세력", "산적"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1966년부터 1969년 사이에 홍위병 분파들의 무장봉기와 내부 권력 다툼으로 유혈사태가 전국적으로 수천 차례 일어나고 약 30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부상, 억류, 고문 피해자는 수백만에 달한다. 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67-68년 충칭(重慶) 무장투쟁, 우한 사건 등까지는 마오쩌둥이 방조 및 활용했던 무장봉기였으나, 68년 무기 대전에서 본격적으로 학생 조직들이 권력 장악을 두고 수류탄과 대포까지 동원해 전투를 벌이고 광저우 난징 등 전국으로 권력투쟁이 번지면서 20만 명이 사망하고 마오쩌둥이 고개를 젓게 된다. 다음은 마오쩌둥이 68년에 홍위병 리더들에게 보낸 경고다. "린뱌오: 여러분은 노동자·농민·병사들에게서 너무 멀어졌다. 마오쩌둥 주석: 누군가 예전에 광시(광서)에서는 통고문이 광시에서만 적용된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내가 또 다른 전국 통고문을 발표할까 한다. 만약 누군가가 그 통고를 계속 위반하여 인민해방군을 공격하거나 통신을 파괴하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방화를 저지르면, 그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몇몇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자기 노선을 고집하면 그들을 산적·국민당원으로 간주하여 포위할 것이다. 계속 완강히 저항하면 우리는 그들을 섬멸할 것이다. 린뱌오: 요즘 진짜 반란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기치를 빌려 반란을 일으키는 산적이자 국민당원이다. 광시에서는 천여 채의 집이 불탔다. 주석: 통고문에 분명히 적어서 학생들에게도 분명히 알리자. 그들이 자기 노선을 고집하면 우리가 체포하겠다고. 이것은 가벼운 처벌일 것이다. 중벌은 포위·진압이다. 린뱌오: 광시에서 천 채의 집이 불타는 동안 사람들은 학생들 때문에 불을 끄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69년에 홍위병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76년 마오쩌둥 사망 때까지 지속됐다. 수백만의 홍위병 출신 청년들도 농촌과 국영농장으로 보내졌다. 하방下放이라고 한다. 농민에게서 혁명 정신을 배우는 길이라고 포장했지만 제어 불가능해진 홍위병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홍위병 해체 이후에도 중국 대학생들은 사회 불만을 대변하는 중심축이었고 76년 천안문 사건, 78-79년 민주벽(대자보) 사건(西单民主墙), 86-87년 학생 시위도 그 전통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후야오방 사임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사실 물가와 실업률 등 사회경제적 불만이 결합해 폭발했다. 1989년 봄,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는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시위는 단순한 민주화 요구에 그치지 않고, 물가 폭등·부패·불평등 같은 사회적 불만이 얽히며 전국적 규모로 확산됐다. 합산 천만 명 가까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며, 베이징뿐 아니라 수십 개 도시에서 연대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처음에는 대화를 시도했으나, 6월로 들어서며 강경 진압을 결정했다. 계엄군이 베이징으로 진입하자 시민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도로를 막았다. 일부 병사와 경찰은 군중과 함께 “국제가(国际歌, 인터내셔널가)” 같은 저항 노래를 부르며 동요하기도 했지만, 다른 부대들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강행 돌파했다. 곳곳에서 군중이 탱크를 불태우거나 병사를 공격하는 장면도 있었고, 군인들이 살해된 사건도 보고되었다. 정부는 대규모 유혈 충돌을 피하기보다는 장기 봉쇄 전략도 병행했다. 광장 진입로를 차단해 식량과 물 공급을 끊으면서 시위대를 고립시키고, 새벽 시간대에 장갑차와 보병을 동원해 광장을 완전히 정리했다. 결과적으로 정확한 사망자 수는 지금도 불분명하지만, 수백에서 수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강경 진압은 국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이후 중국 내부에서는 학생운동의 명맥이 사실상 끊기게 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정치 지형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당시 운동의 주축이던 학생 지도자들은 두 갈래로 흩어졌다. 일부는 해외로 망명해 서구 사회에서 인권 운동가나 학자가 되었고, 또 다른 다수는 내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치와 사회운동을 포기하고 사업가나 전문가의 길을 택했다. Li Lu(李录)는 대표적인 사례다. 천안문 당시 학생 지도자였던 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금융계에 진출해 찰리 멍거의 수제자로 불렸고 한 때 워런 버핏의 후계자로 거론될 만큼 성공했다. 지금은 히말라야 캐피털을 운영하고 있고 중국 BYD에 2010년부터 투자를 시작해 큰 성과를 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중국 내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 남는 길이 사실상 차단됐음을 보여준다. 체제는 강경 진압 이후 지속적으로 감시와 억압을 강화했고, 반체제 활동은 곧 인생의 파멸을 의미하게 됐다. 따라서 다수의 젊은 엘리트들은 정치 이상을 버리고 현실적 생존과 성공을 택했다. 이 흐름은 중국 정치에 깊은 공백을 남겼다. 1990년대 이후 중국 내부에서는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적 정치 세력이 사라졌다. 반대 목소리가 있더라도 흩어진 개인 단위로만 존재했고,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산당은 강력한 반대파의 압력을 받지 않은 채 경제 개혁과 권력 집중을 동시에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 공백은 1990년대 내내 이어졌다. 특히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여파로 중국도 수출 둔화와 국유기업 개혁에 따른 실업 급증을 겪었다. 당시 1인당 GDP는 고작 800달러 수준이었고, 청년층 불만이 격화될 경우 천안문 2.0이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도부에 팽배했다. 그러나 8년 전 학생운동 지도부가 해산된 덕에 조직적 반대 세력이 부재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불만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장기적으로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하나는 중국 사회의 안정과 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정치적 저항이 약화되면서 당국은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며 경제발전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체제 내 개혁의 동력이 줄어들어 권력 견제와 정치적 다양성이 극도로 빈약해졌다는 점이다. 엘리트층이 체제 바깥에서 목소리를 내기보다 경제적 기회 추구에 몰두하면서, 권력과 자본은 더 긴밀히 결합했다. 결국 천안문 이후의 선택은 중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학생 지도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경로는 중국 사회를 정치적 균열 없는 고속 성장 체제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지금까지도 대안 정치세력이 부재한 사회 구조를 굳혀놓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체제 개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목소리가 드문 것도 바로 그 역사적 결과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고급 일자리 상당수는 이민자들의 손에서 태어났다. 단순히 노동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아예 기업을 세우고 산업을 키우며 만들어낸 자리다. 2024년 기준 포춘 500대 기업의 절반 가까이인 230곳이 이민자나 이민자 2세가 세운 회사였다. 이 회사들이 2023년에 벌어들인 매출은 8조 6천억 달러에 달했고, 전 세계적으로 1천5백만 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다. 미국 GDP의 31.5%고, 일본 GDP의 거의 두 배다. 단순 숫자를 넘어 이민자 기업들은 세계 주요 국가들의 GDP에 맞먹는 규모의 경제를 굴리고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플이다.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시리아 출신 생부의 아들이었고, 그가 만든 회사는 실리콘밸리의 상징이 됐다.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은 러시아에서 온 이민자였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덴마크계 이민자 3세로 태어나 쿠바인 새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일론 머스크는 남아공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와 테슬라와 스페이스X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냈다. 모더나, 도어대시 같은 신생 혁신기업들 역시 이민자나 이민자 자녀의 손에서 나왔다. 이런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는 단순 서비스직이 아니다. 엔지니어, 연구원, 디자이너, 금융전문가 같은 고급 전문직이 대거 포함돼 있다. 첨단 제조업, 정보기술, 생명과학 분야에서 미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뉴 아메리칸’ 기업들의 힘이 있었다. 결국 미국 경제의 미래는 국경을 넘어 들어온 인재와 그 후손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민을 제한하고 인재 유입로를 좁히면, 이런 혁신의 흐름은 느려질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기업 상당수가 이민자들의 도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재의 정책은 스스로 미래의 성장 동력을 가로막는 셈이다.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였지만, 중세 이후 힌두교와 이슬람의 영향 속에 사실상 불교 전통은 뿌리째 사라졌다. 불교 성지들은 순례지가 되었지만, 히말라야 지역, 네팔, 시킴, 스리랑카 외에 인도 대륙 본토에 불교를 신앙하는 공동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1956년, 역사가 바뀌었다. 헌법 기초자로 불리던 비.알. 암베드카르(B. R. Ambedkar, 1891–1956), 불가촉천민 출신의 법학자이자 정치 지도자가 50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불교로 집단 개종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힌두교의 카스트 질서를 거부하고, 평등과 자유, 합리주의의 종교로 불교를 재해석했다. 암베드카르는 불교를 신비주의가 아니라 사회 개혁과 해방의 언어로 다시 세웠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는 힌두교를 버리고, 결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서약을 이끌어냈다. 나바야나 불교의 특징은 수행과 교리에서 뚜렷하다. 전통 불교가 명상과 계율, 출가 공동체 중심이었다면, 나바야나는 재가 신자들의 사회 참여와 실천을 중시한다. 초자연적 세계관이나 업보·윤회의 강조를 줄이고, 대신 불평등 철폐와 인간 존엄을 해탈로 본다. 암베드카르가 제시한 22계명은 신자들에게 카스트 차별을 거부하고, 힌두 신들을 섬기지 않으며, 불교를 통해 인간 평등을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나바야나는 수행보다는 교육·조직·사회운동과 밀접하게 결합된 형태를 띤다. 사원의 모습도 다르다. 히말라야 지역 티베트 불교 사원처럼 화려한 불화와 의식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라, 나바야나 불교 사원은 대체로 단순하고 근대적이다. 붓다의 조각상은 중심에 놓여 있지만, 장엄한 의식보다 신도 집회·교육·강연이 더 활발하다. 불교 의례 대신 독립기념일이나 암베드카르 탄생일 같은 사회적 기념행사가 사원의 주요 일정이 되기도 한다. 이 운동은 단순한 종교 개종이 아니었다. 수천 년의 차별을 견뎌온 달리트 공동체가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사회 혁명이었다. 불교는 다시 인도의 땅에서 ‘살아 있는 종교’로 자리잡았고, 그 흐름은 오늘날 800만 명 규모의 신앙 공동체로 이어지고 있다. 인도 불교도의 대부분은 바로 이 ‘나바야나 불교 navayāna’, 즉 암베드카르가 연 새로운 불교 전통에 속한다. 이를 상좌부 불교, 대승불교에 이어 신승불교(新乘佛敎)라고 부른다. 다른 어느 불교 종파보다도 힌두교에 대한 안티테제를 자처하고 인도의 사회경제적 이슈들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타타 그룹, 고드레지 그룹 등 대재벌을 배출한 조로아스터교도 파르시 족이나, 인도 인구 0.4%에 불과하지만 인도 전체 GDP의 5-15%를 차지한다고 추정되고 보석 가공업 70%를 차지할 정도로 상업/금융에서 비중이 큰 자이나교도, 인도 내에서 보다 해외 디아스포라 중 억만장자들이 많은 시크교도들과 달리 나바야나 불교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차별받는 불가촉천민 출신들이라 아직까지 재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고 카스트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운동 쪽으로 활동을 집중한다. 이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들은 여전히 구조적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인도 정부의 국가범죄기록국(NCRB) 통계에 따르면, 매년 수만 건의 ‘반달리트 범죄(atrocities against Scheduled Castes)’가 공식 보고되며, 살인·강간·폭행·재산 파괴 등이 포함된다. 2020년 기준으로만 50,000건 이상이 접수되었고, 이는 하루 평균 130건꼴이다. 그러나 기소와 재판으로 이어져 유죄 판결이 나는 비율은 여전히 낮아 피해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교육과 생활 조건에서도 격차는 뚜렷하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달리트 여성의 문해율은 전체 평균보다 훨씬 낮고, 많은 농촌 지역 학교에서는 여전히 미묘한 분리 관행이 남아 있다. 달리트 마을이 공공 수원이나 보건 서비스에서 배제되는 사례도 보고된다. 이처럼 달리트들은 인구의 16%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일상 속에서 안전과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제도적 보호와 사회적 인식 개선이 절실하다. 불교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차별받는 이들의 해방의 기치로 귀환한 것. 이것이 오늘날 인도 불교의 얼굴이다. 종교라기보다 사회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억압받고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 스스로의 고통을 덜기 위해 불교에 의지하는 모습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업을 더 쌓는 고리를 끊으려는 방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곧 고통의 소멸을 향한 길에서 크게 벗어난 부분은 없는 것 같다.






역사 속 음식을 재현하는 채널에서 석가모니가 다닌 지역의 전형적 음식이자, 열반 직전 마지막 공양이었던 ‘버섯 요리’를 소개했다. 실제 경전인 [대반열반경]에는 춘다라는 장인이 올린 음식이 수카라마다바(sukaramaddava)라고 기록돼 있다. 이 단어의 뜻은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다. 수카라는 ‘돼지’, 마다바는 ‘부드러운, 연한’이라는 뜻이라 ‘부드러운 돼지고기’로도 해석되고, 동시에 ‘돼지가 좋아하는 먹거리’라는 의미로도 읽혀 버섯·뿌리류 음식이라는 설이 나왔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두 해석이 병존하지만, 당시 문화적 맥락을 고려할 때 버섯 요리 설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초기 불교, 특히 상좌부 불교 전통에서는 삼종정육(三種淨肉) 원칙이 있었다. 내가 직접 그 살생을 보지 않았고, 나 때문에 동물이 죽지 않았으며, 나에게 주기 위해 죽임당했다는 소문을 듣지 않았다면 시주자가 준 고기와 생선도 먹을 수 있다는 규정이다(율장). 그러나 불교가 대승으로 발전하고 중국·한국·일본에 전해지면서 자비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고, 육식 자체가 부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열반경], [범망경] 같은 대승 경전은 아예 육식 금지를 설했고, 동아시아 불교는 채식 전통을 강하게 이어받았다. 오늘날 사찰 음식 문화는 가능한 한 식물 전체를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 위에서 발전했고, 특히 마늘·부추·파·달래·흥거 같은 오신채(五辛菜)는 수행에 방해가 된다 하여 금지되었다.
불교와 사촌 격인 자이나교는 한층 더 철저하다. 단순 채식이 아니라 뿌리 채소까지 금한다. 뿌리를 캐면 식물이 죽고, 그 과정에서 작은 생명체들도 해를 입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이나교 승려들은 오늘날도 아힘사(비폭력)를 수행의 핵심 계율로 삼아, 걸음을 옮기기 전 발밑을 빗자루로 쓸고, 책장을 넘기기 전 작은 빗으로 벌레를 치우며, 심지어 입가에 천을 대고 숨 쉬어 작은 벌레조차 삼키지 않으려 한다.
석가모니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는 기원전 6세기 같은 시대, 같은 마가다 지역의 인물들이었다. 두 종교 모두 브라만교의 제사와 계급 질서에 대한 비판 속에서 태어났고, 윤회와 업을 전제로 해탈을 추구했다. 공통적으로 카스트를 무시했으며, 출가 수행자 집단을 중심으로 성장했기에 이들을 묶어 사문(śramaṇa) 전통이라 부른다.
그러나 길은 달랐다. 두 종교 모두 비폭력을 강조했지만, 마하비라는 극단적 고행과 철저한 금욕을 택했고, 석가모니는 고행과 쾌락을 모두 버리는 중도를 강조했다. 해탈의 개념도 다르다. 힌두교에서 해탈(mokṣa)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일체를 깨닫는 것이고, 불교에서 열반(nirvāṇa)은 무아를 깨닫고 집착이 사라져 윤회가 끝나는 것이다. 자이나교에서 해탈(mokṣa)은 영혼에 달라붙은 업을 고행으로 씻어내어, 영혼이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 영원히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핀란드 국영방송 YLE는 1989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라틴어 뉴스 프로그램, 눈티이 라티니(Nuntii Latini)를 운영했다. 유럽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실험이었는데, 매주 5분짜리 뉴스가 오로지 라틴어로만 방송됐다. 정치, 과학, 문화, 스포츠 소식까지 다루면서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라는 걸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이게 핀란드에서 가능했던 건 라틴어의 위상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라틴어는 중세 이후 점차 자취를 감추고 고전학 전공자들만 다루는 학문 언어로 남았다. 하지만 핀란드에서는 달랐다. 스웨덴 지배기와 러시아 제국 치하를 거치면서 학문과 법률, 지식인 교육의 공용어가 라틴어였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중등교육에서 필수 과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민족어인 핀란드어가 늦게 학문 언어로 자리 잡은 만큼, 라틴어는 “유럽의 보편 언어”이자 중립적 문화유산으로 기능했다. 눈티이 라티니가 흥미로운 건 발음과 어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바티칸 교황청이 쓰는 이탈리아식 교회 라틴어 발음 대신, 핀란드 고전학 전통에 맞춰 복원된 고전 라틴어 발음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Caesar는 체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르로 읽혔다. 어휘의 경우 바티칸 라틴어 재단이 편찬한 [Lexicon Recentis Latinitatis] 같은 현대 라틴어 사전을 적극 활용했지만, 국제 뉴스나 과학 신조어처럼 기존에 없는 표현은 방송진이 직접 고전 라틴어 어근을 활용해 새로 만들었다. 컴퓨터, 인터넷, 유엔, 환경 문제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 다듬어졌다. 이 때문에 눈티이 라티니는 바티칸의 권위 있는 현대 라틴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핀란드 학계의 독창성이 결합된 독특한 라틴어 실험장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