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부터 느낀건데, 한국 민주당 대통령들에 대해서 언론은 뭐라고 떠들더라도 이념적으로 껄끄러워하는 경우에도…

그전부터 느낀건데, 한국 민주당 대통령들에 대해서 언론은 뭐라고 떠들더라도 이념적으로 껄끄러워하는 경우에도 해외 정상들이 결국 정중하게 대하고 성실하게 협상에 임한다.

국힘계 대통령일 경우 언론에서 말은 엄청난 의기투합을 하고 대국이 우리에게 뭔가를 배푸는 조공외교할 것처럼 바람을 많이 잡아놓지만 강대국 정상들은 주로 굴욕을 주고 뭔가 뜯어갈 기회로 삼는다.

프랑스 군함 브레타뉴의 갑판 위 공기는 숨 막히게 무거웠다. 아침부터 영국 함대가 항구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

프랑스 군함 브레타뉴의 갑판 위 공기는 숨 막히게 무거웠다. 아침부터 영국 함대가 항구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고, 동료들 사이엔 말 없는 불안이 흘렀다. 최후통첩이 오가던 그 순간, 우리는 여전히 ‘우방국 영국이 히틀러를 놔두고 우리에게 발포할 리는 없다’는 희망에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굉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귀청을 찢는 포성이 뒤따랐다. 첫 포탄이 브레타뉴의 현측을 갈라놓자, 강철이 비명처럼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충격으로 온몸이 던져졌고, 곧 폭발과 함께 뜨거운 불길이 밀려들었다. 동료들이 쓰러지고, 누군가는 불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몸을 던졌다. 연기와 화염 속에서 명령은 들리지 않았다. 기관실은 이미 불길에 잠겼고, 배 전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발밑 금속이 끊임없이 떨리며, 물이 스며들 때마다 차가운 소금물과 끈적한 피가 뒤섞여 발목을 적셨다. 숨을 몰아쉬며 갑판으로 올라가자, 불타는 기름이 바다를 덮고 있었고, 바다로 뛰어든 이들의 몸이 다시 화염에 휩싸였다. 그 모든 혼돈은 10분도 되지 않아 닥쳤다. 친구와 동료가, 내가 몸담았던 배가, 순식간에 불길과 파편 속에 사라졌다. —- 그러나 이 비극은 단순한 오인 사격이나 우발적 충돌이 아니었다. 배경에는 냉혹한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1940년 여름,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프랑스 해군은 여전히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기지에 주둔해 있었다. 영국의 처칠 정부는 이 함대가 독일의 손에 넘어가 영국 본토를 위협하는 시나리오를 가장 두려워했다. 협상과 중립국 이전, 심지어 자침(自沈)까지 요구했지만 프랑스 측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 함대는 기습적으로 빼앗는데 성공했으나 알제리에서는 실패했다. 결국 영국은 선택지를 전부 소진한 뒤, 발포를 명령했다. 그리하여 메르스엘케비르Mers-el-Kébir 항구에서 벌어진 포격은, 군사적으로는 독일의 해군력 확대를 막았지만,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깊은 불신을 남겼다. 1940년 7월 3일 이날 영국군의 공격으로 프랑스 해군 1297명이 사망했다. 전쟁의 논리가 한순간에 동맹국을 적으로 만들었고, 불과 3시간의 혼돈은 그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앙금을 남기게 되었다.

코 풀다가 갑자기 든 생각.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즐거움과 혼란을 주는 존재. 신과…

코 풀다가 갑자기 든 생각.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즐거움과 혼란을 주는 존재. 신과 인간 사이, 환상과 현실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 Peter Pan. Pan. 판 신화는 성적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 아동문학에서 다루기는 부적절해서 성장을 거부하는 순수/유년의 상징으로 바꾼 게 피터팬.

인도가 0을 발명해서 인류에게 가르쳐주기 전까지 손/필기/암산은 10 x 10은 10을 10번 더해서 해결했…

인도가 0을 발명해서 인류에게 가르쳐주기 전까지 손/필기/암산은 10 x 10은 10을 10번 더해서 해결했다. 예를 들어 로마숫자였으면 X * X기 때문에 X + X + X + X + X + X + X + X + X + X 하는 수 밖에 없었다. 0이 발명되고나니 10에 0만 하나 더하면 됐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산가算架와 주판算盘에 자릿수표기가 가능해서 송원대에 0이 중국까지 전달되기 전에도 쉬운 연산이 가능했다. 분수, 소수 다 가능했고 사칙연산에서도 빈자리를 설정해서 쉽게 계산이 가능했다. 이건 유럽쪽에서도 counting board라는 계산판이 같은 역할을 했다. 계산은 주판으로 해결했지만 0이 없다보니 직관적인 설명이나 기록이나 복잡한 수학은 여전히 힘들었다. 인도에서 . 으로 0을 표기하기 시작하다가 동그라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아랍, 유럽, 모두 0를 사용했다.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도 송원대 이후로 零이나 〇으로 표기했다. —- 요일 개념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했다. 7개의 천체를 요일로 사용하는 개념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됐지만 보편적이진 않았고 그리스에서 일·월·화·수·목·금·토 개념이 정립되고 로마 시대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7일 주간과 일요일 휴일 개념이 정립됐다. 나중에 이게 인도 점성술·불교 천문학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와 간다라·인도 북서부를 거쳐 동아시아로 전달된다. 남북조 시기(5–6세기) 불교 경전과 점성학 문헌에서 “七曜日” 언급이 나타나고 불교 의례에서 요일 사용 기록이 나온다. 한국도 삼국시대 때부터 요일이 불교 문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도 아스카 시대(6–7세기) 불교와 함께 중국 달력·천문학 전래되며 “曜日(ようび)” 개념이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중국 달력·불교 점성술과 함께 요일 개념 도입돼 일·월·화·수·목·금·토 개념이 일찍 보편적으로 정립됐고 메이지 유신 때 그레고리력을 도입하며 저 요일명을 대입해 사용했다. 한국도 1896년 양력 공식 도입 때 일본의 요일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1912년 중화민국 건립 때 도입했으나 명칭은 星期一(성기일/월요일) 星期二(성기이/화요일)…星期日(성기일/일요일)로 정했다. 행성 이름을 버리고 숫자로 단순화했다. 숫자를 앞으로 빼 一星期 하면 1주일, 二星期하면 2주일의 뜻이다. 일·월·화·수·목·금·토 개념이 아시아로 전달된 이후 게르만 문명은 자신들의 신화 체계로 명칭을 대응시키며 오늘날의 Wednesday(Wooten's day 오딘의 날), Thursday(Thor's day 토르의 날), Friday(Frigg's day 프리가의 날)같은 명칭이 들어갔기에 영어나 게르만계 언어에서는 일본/한국 요일명과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 스페인어 등 라틴어 계열언어에서는 아직도 우리 일·월·화·수·목·금·토에 대응되는 용어를 쓴다. 라틴어로 dies Solis, dies Lunae, dies Martis, dies Mercurii, dies Jovis, dies Veneris, dies Saturni로 우리 요일과 지금도 행성 의미가 일치한다. 하루 24시간 60분 60초 체계를 도입한 것도 같은 시기였다. 그 전까지는 하루 12시진時辰으로 1시진이 2시간이었고 하루의 세분법으로 100각刻으로 나누기도 했다. 1각이 14.4분. 촌각을 다투다의 촌각寸刻이 寸은 짧은 길이(한 자(尺)의 1/10) 刻은 짧은 시간을 의미. 짧은 단위까지 다툴 정도로 급하다는 뜻.

사실 동양식 “성 + 이름”이나 서구식 “이름 성” 이름 체계가 생각보다 보편적이지 않다. 인도네시아, 버…

사실 동양식 "성 + 이름"이나 서구식 "이름 성" 이름 체계가 생각보다 보편적이지 않다. 인도네시아, 버마, 티베트는 아직 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태국은 성씨가 생긴지 약 110년 밖에 안됐다. 1913년 처음으로 의무화 됐고, 그 전까지는 이름 + 별명으로 구분했다. 라마 6세가 서구식 국가 체제를 도입하면서 식별 수단으로 성씨 제도를 법제화했다. 각 가문이 서로 다른 성씨를 사용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에 수만개의 굉장히 많은 성씨가 생겨났다. 구성은 "민호 김" 이런 식인데, 별명 문화가 있다. 태어날 때 짧고 기억하기 쉬운 별명을 부여받는다. 콜라, 아이스같은 짧은 영어 단어 이름도 많이 쓴다. 본명은 너무 길어서 일상에서 잘 안 쓴다. 개명이 법적으로 쉽고 흔하다. 운세에 안맞는다는 견해를 들으면 개명한다. 이름을 바꾸는 게 액막이 의미가 있고, 평균 평생 2-3번 바꾼다고 한다. 본명은 가족만 알고 남들에게는 별명만 알려주는 경우가 많아서 개명해도 모른다. 몽골 이름은 "철수의 아들 민호" 이런 식이라 가문의 고정된 성씨가 대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이슬란드도 "민호 철수son" 혹은 딸이면 "민희 철수dottir" 하는 식으로 성으로는 아버지 이름만 알 수 있다. 남인도는 "김 민호" 북인도는 "민호 김"으로 쓴다. 러시아는 "민호 철수vich 김" 이런 식으로 자신 이름, 아버지 이름 표기, 다음에 성씨를 붙인다. 고정된 성씨가 이어진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는 "민호 김(아버지 성) 정(어머니 성)" 패턴을 따른다. 포르투갈, 브라질, 필리핀은 "민호 정 김" 패턴을 따른다. 필리핀은 포르투갈 방식을 따르려고 따른 건 아니고 이름 중간이름 성씨 패턴을 자유롭게 쓰다가 미국령이 되면서 표준화하는 과정에 중간이름으로 어머니 성을 넣는 풍습이 생겼다. —- 한반도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난다. 4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때부터 귀족 집단이 성을 가졌다고 기록된다. 고려때 중국식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 점점 확대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전국민이 성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일제시대 때 호적 제도가 도입되면서 성이 없는 사람은 새로 만들거나 주변인 성씨를 받아 등록했다. 일본도 5세기 무렵 야마토 왕권 때 씨족(氏族)과 관위(官位) 제도를 정비하면서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때는 아직 성이라기 보다 귀족 지위를 나타내는 칭호였다. 11세기 헤이안 시대에 무사집단이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 에도 막부가 끝날 때까지 인구의 90%였던 평민은 성씨 사용이 금지됐다. 대부분 농민은 이름 + 촌락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1870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성씨 사용이 의무화 됐고 제한없이 각자 작명해서 신고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명, 직업, 자연물 등을 따서 성씨로 삼았다. 같은 동네에서도 다른 집안끼리 서로 다른 성씨를 쓰려는 경향이 있어서 30만종의 성씨가 생겼다. 지금도 20만종의 성씨가 남아있다. 중국은 전설시대부터 춘추전국 시대까지 성은 모계 혈통을, 씨는 후대에 가문에서 분파된 집단을 나타내는 표기로 사용됐었다. 한나라 시절에 지금같은 성씨 개념이 생겼지만 아직 사용이 보편화 되지는 않았다. 대부분 이름만 있었고 성은 없었다. 수당 시절에 다수가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0-12세기 송원시대에 사실상 전국민이 성씨를 사용했다. —- 한국은 본관(本貫), 파(派), 돌림자(行列字) 등으로 더 세분화된 가문 구분을 하는데, 사실 중국에서 온 풍습이다. 돌림자도 송대에 생긴 전통이었다. 족보(族譜)를 편찬하는 풍습도 마찬가지로 송대에 생겨났다. 문화대혁명때 족보 등이 없어졌다가 1980년 개혁개방 이후 다시 쓰기 시작한 집안들도 있다. 한국에서 돌림자 사용 방식도 위치를 고정해 매번 앞자가 같거나 매번 뒷자가 같은 경우가 있고, 세대마다 돌림자의 위치를 바꿔 쓰는 방식이 있다. 돌림자 한자의 부수(部首)를 음양오행에 맞춰 항렬자로 돌려 쓰는 방식이 가장 널리 쓰인다. 일부 가문에서는 시나 문구를 미리 정해놓고 각 글자를 세대별 항렬자로 쓴다. 중국은 돌림자를 쓰는 경우 가훈(家訓)이나 가시(家詩)를 세대마다 한 글자 씩 돌려 쓴다. 대부분 앞자에 쓰고 뒷자를 자유롭게 붙인다. 덕목이나 자연요소를 사용해서 德, 孝, 忠, 義, 山, 江, 松, 海, 같은 돌림자가 많다. 한국도 비슷하다. 중국은 부수를 활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역시 한국보다 돌림자를 지키는 집안 비율은 매우 낮다. 일본은 사실 본적, 파, 돌림자 풍습이 없다. 족보를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의 몇대째 후손인지 확인할 길은 거의 없다. 단지 각 지역의 사찰이나 신사가 신도 명부에 기록해놓는 경우가 있어서 수백년 전 조상의 장례 기록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명문가는 족보를 관리하는 경우가 있다. 도쿠가와(德川), 아시카가(足利) 가문 후손들은 아직도 족보를 관리한다. 옛날에도 상급 무사 계급은 족보를 기록했지만 하위 무사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다. 베트남도 본적, 파, 돌림자, 족보가 있었으나 프랑스 식민지,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며 전통이 거의 다 단절됐다. 사실 유럽 대부분은 로마시절에 이미 "민호 김(씨족) 김해(분파)" 체계가 보편화됐지만 서로마 제국 멸망 뒤 게르만 족 세계가 되면서 성씨가 사라졌었다. 다시 중세 10-12세기에 봉건사회가 생겨나면서 성씨가 다시 필요해졌고 18세기 전까지 점차 보편화됐다. 귀족은 족보를 기록했고 일반인은 교회에 세례부 기록을 마을 족보처럼 기록으로 활용했다.

내 zune 어디갔지. 한때 잘 썼었는데. 그때 iPod에 비해 화면도 크고 해서 좋았는데. 한글 지원이 안…

내 zune 어디갔지. 한때 잘 썼었는데. 그때 iPod에 비해 화면도 크고 해서 좋았는데. 한글 지원이 안돼서 어떻게 어떻게 펌웨어 수정해서 되게 만들었던 기억이… 그렇게 한 번 내부를 건들고나면 버리기가 아까워짐. 어디갔지. 시간나면 다시 iPod 만들기나 해야지.

남아공 GDP의 약 10%는 중국 내수 서비스 시장 매출에서 나온다. 수출이 아니라 내수. 내스퍼스(Nas…

남아공 GDP의 약 10%는 중국 내수 서비스 시장 매출에서 나온다. 수출이 아니라 내수. 내스퍼스(Naspers)의 출발은 종이였다. 1915년 스텔렌보스에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언론을 표방한 ‘디 나시오날레 퍼스(De Nasionale Pers)’로 신문·잡지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20세기 동안 출판과 서적, 잡지로 뿌리를 내렸고, 1986년에는 남아공 최초의 유료 TV ‘M-Net’을 출범시키며 방송으로 몸집을 키웠다. 1994년 요하네스버그 증시에 상장했고, 1998년 사명을 내스퍼스로 바꾸며 디지털로 방향타를 꺾었다. 이 무렵 멀티초이스·M-Web로 유료방송·인터넷을 아우르며 남부아프리카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전환점은 이때부터였다. 해외 신생 인터넷 기업에 투자를 뿌리기 시작했고, 2001년 중국의 텐센트에 불과 3천만 달러대 자금으로 46.5%를 사들였다. 세기의 한 건이었다. 이후 2019년 국제 인터넷 자산을 묶어 암스테르담에 프로서스(Prosus)를 상장했고, 오늘 내스퍼스는 프로서스의 약 41%를 보유, 프로서스는 텐센트의 약 23~24%를 쥔 구조가 되었다. “한 번의 베팅이 기업 운명을 바꿨다”는 교과서적 사례였다. 텐센트는 위챗 등으로 거대 IT 기업이 됐고 이제 세계 게임시장도 장악하고 있다. 결국 내스퍼스의 시총가치 대부분이 텐센트 주식에서 나왔다. 3천만달러 투자해서 1000억달러가 됐다. 3200배 성장했다. 지금의 스케일을 보자. 내스퍼스 시가총액은 약 529억 달러 수준이고, JSE 전체 시총은 약 21.7조 랜드(≈1.23조 달러)다. JSE 톱40에서 내스퍼스의 비중은 대략 12~13%에 달한다. 과거엔 지수 편중이 25%까지 심해져 JSE가 상한선 ‘캡’ 규칙을 도입할 정도였다. 내스퍼스가 남아공의 삼성/TSMC인 셈이다. 이 말은 곧 남아공 최대 기업의 주가와 지수 흐름이 중국 빅테크(텐센트)의 실적과 맞물려 움직인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텐센트 주가가 오르면 프로서스·내스퍼스가 동조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남아공 대표주의 수익과 배당의 큰 몫이 중국 내수 인터넷 생태계에서 나온다는, 흥미로운 연결고리였다. 게다가 내스퍼스가 가진 텐센트 주식 가치보다 내스퍼스의 시총이 항상 낮았다. 텐센트에 투자하고 싶은 사람은 내스퍼스에 투자해야한는데 남아공 증시 접근이 불편해 가치가 디스카운트 됐던 거다. 이런 저런 부작용이 있어서 프로서스의 유럽 상장을 통해 내스퍼스/남아공 증시의 텐센트 의존도를 줄여놓은 상황이다.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다. 내스퍼스·프로서스는 2022년부터 텐센트 지분을 오픈엔드 방식으로 조금씩 매도해 자사주를 사들이며 ‘지주사 디스카운트’ 해소에 나섰고, 2023년엔 복잡한 크로스홀딩을 해소해 구조를 단순화했다. 그 사이 프로서스는 음식배달·핀테크·교육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혔고, 스택 오버플로우·유데미·코드카데미 등에도 손을 뻗었다. 2025년에는 저스트잇 테이크어웨이 인수로 유럽 테크 챔피언을 노린다고 밝혔다. 남아공 출판사였던 내스퍼스가 중국 내수의 파도를 타고, 유럽·인도·라틴으로 뻗는 거대한 인터넷 지주로 변신한 여정이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20세기엔 신문을 찍던 기업이었다. 21세기엔 한 건의 대담한 투자로 남아공 증시를 좌우하는 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거인의 현금창출원 상당 부분이 중국의 이용자·게임·핀테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글로벌화의 오늘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레드불의 이야기는 태국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태국의 Chaleo Yoovidhya가 크라팅 댕(Kra…

레드불의 이야기는 태국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태국의 Chaleo Yoovidhya가 크라팅 댕(Krating Daeng)을 만들었다. 노동자와 기사들이 피로를 풀려고 마시는 로컬 에너지 드링크였다. 두 마리 붉은 황소가 부딪히는 로고도 그때 생겼다. 1980년대, 오스트리아의 Dietrich Mateschitz가 태국을 여행하다 크라팅 댕을 마셨다. 그는 시차 피로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직감했다. “이건 세계에서도 통한다.” 그는 곧 Chaleo와 손을 잡았고, 음료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꿔 Red Bull을 만들었다. 1984년 두 사람은 회사를 세웠다. 지분은 마테시츠 49%, Chaleo 49%, 나머지 2%는 그의 아들 Chalerm에게 돌아갔다. 운영은 전적으로 오스트리아 측이 맡았다. extreme sports, F1, 축구 구단 인수 같은 공격적 글로벌 마케팅은 모두 마테시츠의 손에서 나왔다. 유위디야 가문은 운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지분 덕분에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리고 외부투자 없이 사업 이윤 재투자로 성장했기에 초기 지분이 희석된 적이 없다. 지금도 유위디야 가문은 레드불의 51% 지분을 보유하며 태국 최대 재벌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태국 내에서도 여전히 T.C. Pharmaceuticals를 통해 크라팅 댕을 비롯한 음료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규모는 글로벌 레드불에 비하면 훨씬 작지만, 태국 로컬 시장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존재감을 유지한다. 마치 일본 롯데에서 투자해서 시작했고 여전히 소유중이지만 한국 롯데가 규모는 열 배 이상 큰 상황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지분 구조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마테시츠는 원창업자인 Chaleo의 기여를 존중했고, 지분 절반을 그대로 인정했다. 글로벌 확장에서 흔히 원저작권자가 배제되곤 하는 상황과 달리, 그는 파트너십을 존중하는 선택을 했다. 레드불은 단순한 에너지 드링크가 아니었다. 태국의 로컬 음료와 오스트리아식 글로벌 경영이 결합해 만든 아이콘이었다. 운영은 유럽에서, 부의 절반은 태국으로, 그리고 태국에서는 여전히 크라팅 댕이 살아 있다. 존중과 분업이 만들어낸 독특한 성공 모델이었다. 비슷한 스타일의 에너지 드링크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먼저 1960년대부터 리포비탄D 같은 작은 갈색 병 에너지 드링크가 널리 퍼졌고, 한국에서도 곧바로 박카스 같은 유사 제품이 등장했다. 모두 노동자와 학생층을 겨냥해 피로회복과 활력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았다. 레드불은 이 아시아식 에너지 드링크 문화를 서구식 브랜드 전략으로 세계화한 사례였던 것이다.

코카콜라는 처음에 애틀랜타 약국의 소다 파운틴에서 컵으로 따라 팔리던 음료였다. 한 잔에 5센트였다. 레시피…

코카콜라는 처음에 애틀랜타 약국의 소다 파운틴에서 컵으로 따라 팔리던 음료였다. 한 잔에 5센트였다. 레시피는 약사 펨버턴이 만든 특별한 조합이었고, 지금도 금고 속에 잠겨 보안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곧 병입(bottling)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등장했다. 병입이란, 본사가 만든 시럽을 지역 병입업체들이 받아 병에 담아 팔고 유통하는 구조였다. 코카콜라는 이 시장에 무심했고, 창업자 아사 캔들러는 미국 전역 병입권을 두 변호사에게 단돈 1달러에 넘겨버렸다. 게다가 영구 계약이었다. 곧 음료 시장은 병 음료 시장으로 정리됐고 이 때문에 코카콜라 본사는 병 가격을 올려도 이득을 볼 수 없었고, 가격 조정의 주도권도 잃었다. 코카콜라가 택한 길은 5센트 고정 전략이었다. “언제나 5센트”라는 광고가 전국에 퍼졌다. 소비자 머릿속에는 코카콜라=5센트라는 믿음이 굳어졌다. 병입업자들이 다양하게 만들어 팔던 병 디자인도 통일 시켜 가격 수정을 막았다. 코카콜라 하면 상징적인 비키니 "콜라병" 디자인이 탄생했다. 자동판매기도 5센트 니켈 하나만 받도록 설계돼 가격 인상이 사실상 막혔다. 본사는 나중에 자동판매기를 교체하기 힘들자 정부에 7.5센트짜리 동전 발행까지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쨌건 이 전략은 홍보효과 면에서 대성공이었다. '언제나 5센트' 코카콜라는 대중적 음료가 되었고, 세대를 건너 사랑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병입업체들은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병 하나 5센트에 묶여 수익성이 계속 낮아졌다. 본사는 이 상황을 활용했다. 수익 압박에 시달리던 병입업체들과 하나하나 재협상에 성공했고, 결국 병입망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되찾았다. 5센트 고정 전략이 병입업체를 압박하면서 본사가 다시 주도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오늘날 아리조나 아이스티의 99¢ 전략도 이와 닮아 있다. 캔에 아예 가격을 박아 넣어 유통업체가 손댈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소비자에게는 “언제나 99¢”라는 믿음을 주며, 브랜드 정체성을 가격 자체와 결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