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조국 대표가 사면 확정됐으니 다음 구상을 하자. 지금 한국 정치에서 민주당은 사실상 국힘 외 모든 유…

이제 조국 대표가 사면 확정됐으니 다음 구상을 하자. 지금 한국 정치에서 민주당은 사실상 국힘 외 모든 유권자를 대표하는 거대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내란 진압 국면이라 잘 느껴지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좌에서 중도우까지 전부 품어야 하니 이념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어느 쪽에도 확실히 만족을 주기 어렵다. 특히 진보층은 원래부터도 진보 의제가 국회에서 온전히 대표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중도보수층은 민주당을 여전히 ‘좌파 정당’ 이미지로 경계한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연합해 무상급식 등을 사회 의제로 만들고 새누리당까지 요리해 관철 시켰던 영화는 과거 일이다. 사라진 줄 알았던 색깔론이 정의당과의 연대가 끝나자 부활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비대한 민주당은 성장 할 수 없고 혼자서 양쪽을 다 만족시키려는 시도가 매번 절반의 성공에 그친다. 결국 전략적 분업이 필요하다. 민주당은 중도보수에 확실히 자리 잡아 중도보수층에서 의석을 직접 빼오고, 진보층은 별도의 합리적 진보정당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직접 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재명 대통령이 중도보수 선언을 했다. 민주당이 중도보수당으로 탈바꿈했을 때의 장점은 분명하다. 스스로 중도나 중도보수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절반 이상인 현실에서 이들과의 접점을 넓히면 수도권, 충청, 부산권 등에서 최소 15석 이상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사실 총선 전 지금도 저 내란 정당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의원들 있다. 그들을 흡수하며 중도보수 정당 이미지가 확립되면 기존 진보 성향 지지자들이 일부 이탈할 수 있으나, 그 공백은 혁신당이 메운다. 이렇게 하면 민주진영은 기존 지지층을 잃지 않으면서 국힘 지지층 중 일부를 끌어오는 확장 효과를 얻는다.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좌클릭과 우클릭 하기를 멈추고 이념적 좌우 흔들림 없이 안정된 중도보수 이미지로 장기 집권 기반을 만들 수 있다. 개헌이 가능해진다. 사실 이제 끊임없이 개혁이 필요하고 그에 필요한 개헌도 수시로 해야 한다. 혁신당을 진보정당으로 키워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진보층 표를 모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진보 간판을 걸고도 실제로는 진보 의제를 왜곡하거나 거래 대상으로 삼는 세력, 대표적으로 정의당처럼 진보 이름으로 사기치는 집단이 다시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진보층은 최소 20%의 유권자를 차지하니 300석 중 60석 이상 갖는 게 맞지만 지금까지 교섭단체로 성장한 진보정당은 없었다. 민주당이 진보정당 역할도 함께 했기 때문이다. 혁신당이 교섭단체 규모를 넘어 40석, 60석으로 커진다면 진보 의제가 독자적으로 힘을 갖게 되고, 민주당과의 전략적 연대를 통해 입법까지 연결할 수 있다. 민주당은 진보층 눈치 볼 것 없이 중도보수, 부국강군을 원하는 지지층을 공략하면 된다. 진보 의제와 보수 의제를 묶어 함께 정책 연합으로 추진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민주당은 정치적 부담을 줄이고 진보 의제의 부작용이나 반발을 흡수하는 방파제를 혁신당이 대신 맡게 된다. 단계별 계획은 다음과 같다. 1단계: 다음 총선까지 민주당은 수도권 40-50대 직장인과 자영업층, 충청권 실용보수층, 부울경 산업노동층을 대상으로 경제성장·규제완화·안보 실용주의를 내세운다. 혁신당은 20-40대 진보 성향 대도시 거주층과 비정규직·청년주거·기후·젠더 이슈 관심층을 결집시켜 비례대표 8-10석을 추가확보하고 교섭단체 진입을 목표로 한다. ‘민주당은 국민 과반이 동의할 일만 한다’는 이미지를 고착시키고, 혁신당은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의제를 공론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 필요하면 앞으로 몇번의 선거에서는 비례투표를 혁신당에 몰아주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차피 더불어민주당에서 직접 비례를 내면 손해가 크기 때문에 더불어시민당 같은 걸 계속 만들게 된다. 그러지 말고 그냥 혁신당으로 몰아주고 그 안에서 활용하면 위성정당 논란도 피할 수 있다. 어차피 우리 쪽 교섭단체가 하나 더 있으면 유리해지는 건 이재명 대통령이다. 저절로 이뤄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당장 약속한대로 교섭단체 기준을 낮추던가 총선 때 비례를 몰아줘 채워야 한다. 혁신당은 당분간 선출직에는 낯설지만 행정이나 자기 분야 전문성이나 상징성 높은 진보적 인재들을 원내 진입시키는 창구로 생각해도 좋다. 이제 최초 이주자출신, 첫 여성 시각 장애인 비례 대표 등이 더 이상 국힘에서 나올 필요없도록. 지금까지 해온 소수정당/시민단체들과의 협업도 혁신당을 통해서 계속 할 수 있다. 민주당의 의석을 뺏기는 게 아니라 별동대에 충분한 인원을 배정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2단계: 그 다음 총선까지 민주당은 영남 등을 계속 공략하고 중도보수 기반을 안정화해 20-25석 추가 확보를 노린다. 혁신당은 30~40석 규모로 성장하며 진보 의제 주도권을 장악하는 걸 목표로 한다. 두 당은 선거연합을 공식화하고 초기에는 지역구는 민주당 단일후보, 비례는 혁신당 몰표 구조를 만들고 점차 선거제도 개혁과 지역구에서 통합경선을 통한 단일화 연합을 추구한다. 국회 상임위 배분과 일부 입각도 민주당은 예결·국방·외교·행안, 혁신당은 환경·복지·노동·여성가족 등을 맡아 역할을 분명히 할 수도 있다. 3단계: 민주당과 혁신당은 총 240석 구조를 완성한다. 나중에 합리적 보수정당이 나타나고 다시 세력을 재건하더라도 장기적으로 60-140-100의 균형을 유지해 보수는 개헌저지의석을 목표로, 우리는 개헌의석을 목표로 총선 때마다 경쟁하는 구도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극단적 세력은 국회에서 퇴출시키는 것이 목표다. 진보 의제는 혁신당이 제안하고 민주당이 조정해 국회를 통과시키는 정책 생산 라인이 고정된다. 민주당은 국가 경영과 실용 분야 전문가를, 혁신당은 시민운동·정책개발·국제연대 인물 등을 차세대로 육성하며 두 당 간 인사 교류 및 교육을 제도화해 장기적 안정성을 높인다. 이 전략은 단순한 선거연합이 아니라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시도다. 극단 세력을 밀어내고 중도보수와 합리적 진보 그리고 미래에 합리적 보수가 안정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 그것이 민주당과 혁신당 분업 전략의 핵심이다.

요점: –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정의당과 진보진영에 독이었다. 석패율제와 비례대표제만 바라보게 된 것 자체…

요점:

–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정의당과 진보진영에 독이었다. 석패율제와 비례대표제만 바라보게 된 것 자체가 독이었다. 약한 명분. 정치적 타협을 이뤄낼 레버리지가 없는 상황에서 도박하다 실패.
– 전부 비례로 가면서 지역구 준비하던 그룹과 류-장을 위로 올려 여성주의로 가려던 그룹 등과 당내 갈등.
– 위성정당이라고 비판했지만 민주당의 비례정당을 통해 더 많은 소수진보 정당들의 의석 탄생.
– 조국 사면 때문에 앞으로도 정의당 몫은 안 나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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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포인트들이 있으나 기본 전제를 “조국이 잘못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려다보니 검찰 이야기를 전혀 하지 못했다. 정의당에 대한 유권자의 최종적 단죄는 친검찰성향 때문이었다. 친검찰당이랑 어떻게 다시 민주당이 선거연합을 하겠나. 대한민국에서 제 정신이던 사람들은 다 검찰 타도를 외치는데 정의당 혼자 검찰이 기소하면 이재명은 체포돼야 한다고 그 지랄을 했다. 민주당 혐오에 너무 깊이 빠져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한지 오래됐다. 시대정신과 정면으로 대립해 "자꾸 검찰을 보지 말고 진짜 악인 민주당을 보자"고 우기며 싸우다 산화했다.

2. 정의당은 민주노동당일 때부터 민주당의 지원없이 자력으로 법안을 통과시킨 적이 없다. 표도 상당수는 민주당의 진보성향 유권자들에게서 나왔다. 그렇다고 정의당이 "우리는 민주당 덕에 존재해요 민주당 사랑해요"할 필요는 없었다. 진보 이상을 이야기하고 민주당의 구태에 대한 비판도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런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입으로는 여성주의를 외치며 손으로는 국힘과 함께 당론표결했다. 특히 이재명 체포동의안 등 검찰의 주요 관심사안에서는 대부분 국힘과 함께 했다. "우린 민주당 2중대가 아니예요"라는 호소도 한두번이지 국힘 2중대 짓을 숨기려는, 유권자를 속이려는 태도로 보였다. 검찰정권의 행패는 점점 더 심해지는 상황에.

3. 존재 기반 자체가 민주당에 있는 당인데 민주당을 죽이겠다고 20, 21대를 허비했으니 기다려주던 진보 유권자들도 혁신당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정의당은 혁신당을 민주당2중대 구태 정당이라고 정의하고 싶어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정의당에서 심상정 차기로 경쟁하고 있었어야 할 신장식 같은 인물들도 검찰 비판을 꺼리는 정의당을 포기하고 윤석열 사냥하러 혁신당으로 갔다. 그래서 진보성향 유권자들 판단에 정의당은 검찰당이고 혁신당이 더 진보적이었던거다. 당 강령이나 말로만 내세우는 공약말고 실제 정체성에서.

게다가 정의당은 자꾸 무시하려 하지만 검찰개혁에 투신하기 전부터 조국은 진보계에서 심상정이 근접할 수 없는 스타였다. 진보계의 유일한 만년 대선주자 심상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문재인 정권 전부터도 조국이 진보신당을 창당하면 정의당은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고, 자기 당에서도 후계를 키우지 않는 심상정은 조국의 문재인정부 입각 및 현실 정치계에서 급부상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와 검찰개혁 시도했다가 가족이 공격 당해 흔들릴 때 검찰편에서 함께 찌를 것인가 중 후자를 선택했다.

4. 진보정당들 입장에서 정의당은 정의당이 보는 민주당과 비슷한 존재였다. 진보 의석 대부분을 가져갔지만 실제로 진보를 대변하지 않던 존재. 정의당을 버리고 원래 진보의석이 생성되던 소스인 민주당 진보유권자들을 선택한 진보정당들 의석이 정의당보다 많아졌다는 게 시사하는 부분이 크다. 애초에 민주당 진보유권자 힘으로 유지되던 진보 의석인데 그 민주당 진보유권자 없이도 진보정당들끼리 독자적으로 뭉치면 가능하다는 신기루를 좇다가 안되자, 검찰편을 들어 이재명과 민주당을 파괴하면 자신들의 활로가 나올 걸로 생각했고, 그것도 안되자 제3지대라는 더 오래된 신기루를 찾아 류호정은 이준석 당으로 갔다.

5. 조국 죽이기에 동참했던 기억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건 자유지만, 피해자 조국이 주늑들지 않고 재기에 성공한 상황에 아무리 "악몽이었다"고 호소해도 왕따 가해자에게 줄 수 있는 연민에는 한계가 있다. 권영국과 당명 개명으로 이미지 쇄신을 하고 싶겠지만 “조국의 강”(사실 검찰의 강)의 얕은 물에서 허울만 남은 정의당 혼자 아직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없다.

난 박용진 같은 사람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이재명 대통령이 또 누굴 더 끌어들일 수 있는지 보고 싶단 말이다…

난 박용진 같은 사람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이재명 대통령이 또 누굴 더 끌어들일 수 있는지 보고 싶단 말이다. 그것도 가장 심하게 야비하게 우리를 공격하던 인물들이 고개 숙이고 들어와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그런 모습을 더 보고 싶단 말이다.

한미 협상, 대표 선거 끝났으니 다시 영입이 시작되더라도 딴지 좀 그만 걸자. "저 사람, 저 사람을 저 자리에 임명한다고? 안돼! 얼마전까지 ____하던 사람인데!" 같은 따분한 소리 그만하고.

내가 고대로 돌아가 통신망을 설계해야 하면 어떻게 할까 구상해본 적이 있는데 몇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단순한…

내가 고대로 돌아가 통신망을 설계해야 하면 어떻게 할까 구상해본 적이 있는데 몇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단순한 건 10-30km 마다 서로 보이는 장소에 신호소를 설치하고 낮에는 양 손에 긴 깃발을 들고 위 아래 위치를 사용하면 00 01 10 11 네가지 신호를 빠르게 보내는 게 가능하다. 먼거리에서 보이려면 깃발이 좀 길어야 하는데… 그게 힘들면 건물에 10m 너비 정사각형 창을 2개 만들고 사람들이 열고 닫아 신호를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밤에는 두 개의 큰 화로에 원통형 금속이나 도자기 덮개로 덮었다가 개폐하는 방법으로 같은 신호를 보내는 게 가능하다. 이 4가지 신호에 바탕해서 각 언어에 맞는 부호 체계를 만들면 된다. 8000km 라고 해도 평균 25km 마다 하나씩 설치해서 320개 신호소에 숙련된 신호수들이 일하면 1초에 1-2 심볼 전달 가능. 아니면 창문 너비를 5m로 줄이고 10km마다 설치하거나. 문자 하나에 여유있게 3심볼을 쓴다고 가정하면 제어 신호까지 만들어서 블록마다 체크, 에러 제어까지 가능. 짧은 메시지는 제국 끝에서 끝까지 1시간 안에 전달 가능. 장문일 경우도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보내면 1시간 안에 가능. 양방향 프로토콜이기 때문에 중간에 신호소 하나가 문제가 생겨 끊겨도 정확하게 어디서 끊겼는지 ACK, ping, traceroute 점검 신호도 보낼 수 있다. 중앙에서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어디에 문제가 생겼으니 어디 누구를 시켜 점검해야할지 알 수 있다. 보내는 정보가 많아져 망이 포화될 경우 현대 정보이론을 적용해보면 날씨나 전황 같은 매일 거의 반복되는 내용을 보낼 경우 따로 축약신호도 만들어서 메시지 압축이 가능하다. 많은 정보를 굉장히 빠르게 전달할 수 있다. 중앙정부에서 제국 전역의 날씨와 기후/재정상황 등 보고를 매일 받아도 된다. 정말 필요하면 평소 늘 보내는 메시지 사이에 긴급 메시지를 섞어보내는 다중화도 가능하고, 보안화도 가능하고, 저화질의 이미지도 신호로 바꿔 보내고 재생이 가능하고, 정 필요하면… 데이타에 중복을 넣어 수신측이 오류를 스스로 교정하게도 가능… …. 아니 그만하자. 수천킬로미터 멀리 떨어진 곳 전투 명령을 몇달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보고받고 분 단위로 조정 가능하다. 제국에 무역망 가격 안정화가 쉬워진다. 도망자 추적이 쉬워진다. 아무리 빠른 말을 훔쳐타고 달아나도 더 빠르게 수배령을 내릴 수 있다. 어느 시점에 필요하면 대인원이 필요한 사무작업(대규모 계산원이 필요한 작업이랄지) 등을 여러 도시에서 작업을 나눠서 하는 게 가능해진다. 특히 반란 진압이 쉬워져서 제국들의 수명이 길어졌을 거다. 내게 타임머신을 달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칭기스칸의 이쁨을 받을 자신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비우스의 신호체계가 전투에 사용됐던 것 같고, 17, 18세기에 들어서는 풍차처럼 생긴 시각적 텔레그램들이 발명됐다. 19세기에는 거울과 태양빛을 이용한 통신 방법도 개발됐다.

조선 시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마패 제도는 단순한 신분 증명 수단이 아니라 역참 제도의 일부였다. 마패를…

조선 시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마패 제도는 단순한 신분 증명 수단이 아니라 역참 제도의 일부였다. 마패를 가진 사람은 전국의 역참에서 말을 교체해 탈 수 있었고, 숙식까지 제공받았다. 이 제도는 조선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고려 시기에 이미 한양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시행된 전례가 있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인 범위가 아니라 수도와 주요 경로 위주로만 운영됐다. 이 제도의 원형은 몽골의 ‘파이자(paiza 牌子 패자)’였다. 파이자는 금속이나 목재로 만든 패로, 몽골 제국의 관원이나 사신이 제국 전역의 역참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보장하는 증표였다. 이 시스템은 몽골이 지배하던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통용됐고, 말 교체와 숙식, 경호까지 지원하는 규모로 운영됐다. 당시로서는 국제적인 이동권 보장 제도이자, 사실상 세계 최초의 ‘범유라시아 여권’에 가까웠다. 파이자는 몽골어로 ‘게레게(gerege)’라고도 불렸고, 재질과 등급에 따라 권한이 달랐다. 금·은·동(혹은 청동) 순으로 권한이 강했고, 상단에는 ‘영원한 하늘의 힘으로’ 같은 권위 문구가 새겨진 경우가 많았다. 표면에는 몇 필의 말을 요구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인원과 수레를 동원할 수 있는지 등 구체 권한이 기재되기도 했다. 문자는 몽골-위구르 문자를 기본으로, 중국어·페르시아어 병기가 확인되는 사례도 있다. 파이자가 보장한 핵심 인프라는 ‘얌(Örtöö, 역참망)’이었다. 역참은 대략 하루 반나절 거리마다 배치되어 말과 기수를 교대시켰고, 급행 공문·사절·군사 수송을 빠르게 처리했다. 파이자 소지자는 이 네트워크에서 말, 식량, 숙소, 안내병을 합법적으로 ‘관용 징발’할 수 있었다. 이 특권은 외교 사절과 행정관뿐 아니라 국고와 동업한 상인(오르톡 상단)에게도 제한적으로 부여되어, 제국의 장거리 상업과 조달을 촉진했다. 특히 오게데이 칸(1229~1241) 시기에는 파이자 제도가 대폭 확장·정비됐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하나의 작전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 통신망 구축이었다. 오게데이는 몽골의 모든 주요로와 국경 거점에 역참을 촘촘히 배치하고, 기존보다 말 교체 주기를 짧게 줄였다. 덕분에 기마 전령이 하루 300~400km를 주파하는 기록도 가능해졌다. 이 속도는 당시 어떤 문명도 따라잡지 못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외교·군사·무역 사건이 중앙의 카라코룸까지 불과 몇 주 만에 보고될 수 있었다. 이 초고속 네트워크는 단순 보고용이 아니라 즉시 반격·원정 명령·외교 지시까지 내려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서방 전선에서 크림 반도의 상황을 카라코룸에서 파악한 뒤, 몇 주 안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새로운 지시를 전달하는 일이 가능했다. 파이자 중에는 군사를 동원할 권한이 부여된 종류까지 있었다. 그 결과 몽골 제국은 대륙 양 끝에서 동시다발적 군사 작전을 조율할 수 있었고, 무역로·외교 사절의 안전도 보장됐다. 파이자는 이 네트워크의 열쇠로서, 단 한 장만으로 제국 전역의 말·사람·물자를 공인된 속도로 동원하게 했다. 남용도 있었다. 일부 소지자가 필요 이상으로 말과 물자를 요구하거나 사적 용무에 쓴 탓에, 13세기 중엽부터 대칸과 분국 황실은 파이자 등급을 재정비하고 발급·회수를 엄격히 했다. 권한 범위를 표기해 오·남용을 줄였고, 역참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지 납세 체계와 보급 예산을 분리하는 시도도 이뤄졌다. 이후 원·일한국·차가타이·킵차크한국 등 각 분국은 자국 사정에 맞게 파이자와 역참망을 조정했고, 이 표준이 동아시아와 이슬람권 행정 문화에도 흔적을 남겼다. 몽골 제국이 최대 규모였을 때, 파이자를 가진 사신이나 고위 관리라면 오늘날의 베이징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약 8,000km를 3~4개월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말만 바꾸면 하루에 200km를 달리는 것도 가능해, 평시라면 유라시아 횡단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이뤄졌다. 여정은 위험과 편의가 공존했다. 한 역참에 도착하면 피로에 찌든 기수와 말은 교체되고, 준비된 뜨거운 차와 따뜻한 식사가 기다렸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가는 긴장감, 예기치 않은 기후, 초원과 사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 속에서, 파이자를 목에 건 그 순간만큼은 제국의 보호 아래 있다는 안도감이 함께했다. 당시 이를 경험한 여행자는, 말 그대로 “패 하나로 세계를 가르는” 감각을 누릴 수 있었다. 반대로 파이자가 없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에 직면했다. 말과 짐꾼, 숙소를 모두 사비로 해결해야 했고, 역참의 말 교체는 허가 없이 불가능했다. 하루 30-40km를 겨우 이동하며, 경로 우회와 계절 대기까지 포함하면 8,000km 여정이 최소 12-15개월, 나쁘면 2년이 걸렸다. 비용은 말과 인력 교체마다 눈덩이처럼 불었고, 도적·기후·질병 같은 위험도 혼자 감당해야 했다. 파이자의 존재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장거리 이동의 가능성을 결정짓는 경계선이었다. 흥미롭게도, 파이자의 상징성은 현대 몽골의 국가 이미지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몽골 지폐, 일부 기념주화에는 파이자의 둥근·방패형 문양이 들어가 있다. 칭기즈 칸 초상 옆이나 뒷면 장식에 새겨진 이 디자인은, 단순 장식이 아니라 ‘국가 공인 권위’와 ‘역사적 통합 네트워크’를 상징한다. 현대 화폐 속 파이자 문양은, 몽골이 과거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었던 제국의 후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장치다. 우리 역시 그 제국의 일부였다.

기독교와 불교가 처음 마주친 시점은 서로가 이미 교리 체계를 갖춘 이후였다. 2~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인…

기독교와 불교가 처음 마주친 시점은 서로가 이미 교리 체계를 갖춘 이후였다. 2~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인 클레멘스는 인도의 사상과 부처의 가르침을 언급하며, 이를 철학적 지혜의 한 갈래로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여행담 차원이 아니라, 동방의 종교를 지중해 지성계가 인지하고 해석하려 한 초기 시도였다. 간다라 불상은 이집트와 로마 제국에서도 발견된다. 주로 로마 상인이나 군인, 인도-중앙아시아 출신 노예나 용병이 가져온 물건 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로마 제국과 인도 사이에는 인도-로마 해상 무역망이 활발히 작동했고,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 인도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루트는 상품뿐 아니라 사상과 인물의 이동로이기도 했다. 더 직접적인 접점은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동방교회(네스토리우스파)는 5세기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중앙아시아 깊숙이 진출했고, 불교 사원과 기독교 수도원이 같은 도시 안에서 공존하는 사례가 생겼다. 투르판, 메르브, 사마르칸트 같은 지역에서는 두 종교가 서로의 언어(소그드어, 시리아어,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를 매개로 경전 번역과 논쟁을 경험했다. 이런 환경은 단순 전파가 아니라, 용어 차용과 개념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어, 불교의 ‘보살’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시리아어 기독교 문헌이 ‘사도/거룩한 제자/apostle’ 개념을 덧씌우는 식의 교차 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불교의 열반(nirvāṇa) 개념은 시리아어로 옮길 때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완전한 평화’나 ‘영원한 안식’을 뜻하는 기독교 용어와 연결돼, 천국(Paradise)이나 안식일(Sabbath rest)과 비슷한 뉘앙스로 해석되었다. 다르마(dharma)는 ‘율법’이나 ‘하나님의 법’으로 대응되었고, 불교의 마하카루나(mahākaruṇā, 대자비)는 시리아어 기독교 문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raḥme) 개념과 합쳐져 설명되었다. 반대로 기독교의 구원(salvation)은 불교 번역에서 ‘해탈(mokṣa)’과 연결되었으며, 성령(Holy Spirit)은 불교권에서 ‘성스러운 기운’이나 ‘깨달음을 돕는 지혜’로 의역되기도 했다. 이런 번역은 양쪽 종교의 신학 체계를 유지한 채, 서로의 핵심 개념을 가장 근접한 자국 종교 용어로 설명하려는 시도였고, 그 과정에서 의미가 부분적으로 재구성되거나 변용되었다. —- 간다라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오늘날 파키스탄 북부·아프가니스탄 동부 일대에서 번성한 불교 미술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헬레니즘 문화가 깊이 스며든 곳이었고, 그 결과 불교는 인도 전통의 상징적·비인체적 표현에서 벗어나, 그리스-로마식 사실적 인체 묘사와 공간 구성을 흡수했다. 간다라 불상은 아폴론이나 제우스를 연상시키는 이상화된 얼굴 비례, 파상형 머리결, 깊게 패인 드레이퍼리 주름, 둥근 헤일로(광배)를 특징으로 한다. 이 조형어법은 초기 기독교 미술, 특히 비잔틴 성화나 모자이크의 성인상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요소다. 여기에는 ‘직접 영향’이라기보다, 헬레니즘 미술이라는 공통 모태를 두고 동·서 종교가 각자 차용한 ‘평행 진화’의 성격이 강하다. 이 지역 조각에서는 부처의 옆을 지키는 헤라클레스가 자주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간다라 지역은 불교 경전과 기독교 문헌이 같은 언어권(그리스어·소그드어·박트리아어)을 통해 전파되는 공간이었다. 그 결과, 종교 간 도상은 직접 접촉이 없더라도 ‘시각 언어’의 공통분모를 키웠다. 예를 들어, 간다라 불상의 니임부스 표현법은 로마 제국 후기의 황제 초상과 기독교 성인 도상 모두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 지역에서 동서양 역사와 문화의 혼합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 통치자이자 불교를 제국 전역에 퍼뜨린 아쇼카 대왕은 유명한 아쇼카 칙서를 내리는데, 각 지역의 현지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 아프가니스탄인 간다라 지역에는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칙서를 내렸다. 불교를 인도 전체로 확장시킨 대왕이 구약의 언어 아람어와 신약의 언어 그리스어로 칙서를 내렸다. 간다라 지역 박트리아 등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들이 세운 그리스계 왕국들은 일부 불교로 개종한 뒤였기 때문에 파란 눈을 하고 그리스어를 쓰며 불경을 외운 메난드로스 1세 같은 왕도 있었다. —- 관음보살과 성모 마리아의 도상적 유사성은 주제와 역할에서 비롯된다. 관음은 본래 남성 보살로 전승되다가, 중국 남북조당대 이후 자비와 구제를 상징하는 여성적 이미지로 점차 변모했다. 송명대에는 ‘백의관음’, ‘송자관음’ 같은 형태로, 흰 옷을 입고 아이를 안은 모습이 대중적으로 확립됐다. 이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모자 도상과 자연스럽게 겹치는 구조다. 16~17세기 예수회 선교가 중국에 도착하자, 가톨릭 미술은 중국 회화 기법과 불교·도교 상징을 적극 차용했다. 이 과정에서 성모자 이미지는 연꽃·구름·버들가지 같은 관음 도상 요소와 결합했다. 명·청대 화첩에는 ‘관음처럼 보이지만 십자가나 천사, 성경을 품은 여성상’이 나타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을 은폐하거나, 불교·기독교 양쪽 신도에게 모두 어필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일본에서는 금교령(1614년) 이후 기독교 신도들이 성모상을 관음상으로 위장한 ‘마리아 관음’을 제작·봉안했다. 외형은 백의관음이지만, 내부에 십자가·성서가 숨겨져 있었다. 이 경우에는 기독교 도상이 불교 외형을 차용한 셈이다. 두 종교의 도상 교류가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이었다. —- 발라암과 왕자 요사파트 ‘Barlaam and Josaphat’은 불교의 석가모니 전기가 기독교 성인전으로 재탄생한 사례다. 줄거리는 본질적으로 부처의 출가와 깨달음 이야기다. 인도에서 시작된 이 서사는 페르시아·아랍어로 번역되며 ‘Bilawhar wa Budhasaf’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서 ‘Budhasaf’는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보디사트바)의 변형이다. 이후 조지아어판 ‘Balavariani’를 거쳐, 11세기 아토스 산의 수도사 에우튀미오스가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그리스어판은 곧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확산됐고, 중세 유럽에서 널리 읽히는 성인전이 됐다. 발라암과 요사파트 성인전이 유행하자 가톨릭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 ‘요사파트(Josaphat)’를 공식 성인으로 시성했다. 이로써 석가모니는 가톨릭 성인이 됐다. 요사파트는 동방정교회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중세 유럽 신자들은 그가 불교 창시자인지 몰랐고, 회심과 은수 생활의 모범으로 이해했다. 현대 학계가 언어·문헌학적 분석을 통해 이 성인의 불교 기원을 밝혀내면서, 이는 종교 간 전승·변형·동화의 대표 사례로 자리 잡았다. 현대 카톨릭, 성공회 등은 전례력에서 요사파트를 뺐다. 신기하게 러시아 정교회를 포함한 동방정교회는 아직 요사파트를 성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인도계는 식민지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경제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19세기…

아프리카의 인도계는 식민지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경제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19세기 말 영국이 동아프리카 철도와 항만, 행정 인프라를 건설할 때 인도 서부와 북부에서 대규모 이주가 이뤄졌다. 주로 구자라트와 펀자브 출신 노동자, 상인, 기술자들이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같은 동아프리카 연안국에 정착했고, 이후 남아프리카, 모리셔스, 세이셸, 나미비아 등으로 확산됐다. 초기에는 상업과 중개무역, 건설과 금융에서 기반을 닦았고, 세대를 거치며 제조업, 농업, 서비스업 전반으로 영향력을 넓혔다. 현재 아프리카 전역에는 수백만 명의 인도계가 거주하며, 인구 비중은 국가별로 큰 차이가 있다. 모리셔스는 인도계 비중이 약 70%로 압도적이며, 세이셸과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상당한 규모를 가진다. 케냐와 탄자니아,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인구 비중은 낮지만 경제 비중이 매우 높다. 대표적으로 우간다의 인도계는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지만 국가 세수의 60% 이상을 기여하고 경제 전체의 약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케냐에서도 인도계는 소수지만 소매·도매 유통망, 부동산, 제조업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도계의 경제적 부상은 상업 네트워크와 가족·지역 기반의 자본 축적 방식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초기 식민 경제에서 유럽인과 현지인 사이의 중간 계층 역할을 하며 무역과 금융, 고부가가치 산업을 장악했고, 독립 이후에도 사업 기반을 유지하거나 확장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치·사회적 긴장 속에 재산 몰수나 추방을 당한 사례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경제 재진입과 복귀가 이뤄졌다. 정치와 사회 운동에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1893년부터 21년간 인도계 이민자 차별 철폐와 권리 보호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비폭력·불복종 철학은 아프리카에서 다듬어진 것이며, 훗날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도 모리셔스의 아네루드 주그노트(전 총리), 남아프리카의 프리트비 비한나(의사이자 정치인)처럼 각국 정치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도계 지도자들이 있다.

중동 지역 공용어들 1. 수메르어 시대 (기원전 3200-2000년경) 최초의 문명 언어 – 메소포타미아…

중동 지역 공용어들 1. 수메르어 시대 (기원전 3200-2000년경) 최초의 문명 언어 –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생한 인류 최초의 문자 언어 – 설형문자 발명과 함께 문서 기록의 출발점 – 종교, 법률, 행정 문서의 표준어 역할 – 언어계통 불명의 고립어 초기 도시국가들 간의 종교적, 학술적 공용어로 기능했으며, 후대까지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라틴어와 같은 역할. 2. 아카드어 시대 (기원전 2500-600년경) 셈어족의 등장 – 사르곤 대왕의 아카드 제국(기원전 2334년) 이후 확산 – 바빌로니아어와 아시리아어로 분화 – 약 1,500년간 고대 근동의 국제 외교어 – 이집트, 헤타이트, 미탄니 등과의 외교 문서 – 함무라비 법전, 길가메시 서사시 등 문학 작품 – 상업과 무역의 공통어 3. 아람어 시대 (기원전 1000년-기원후 600년경) 새로운 패러다임 – 기원전 1천년경부터 아카드어를 대체하기 시작 – 알파벳 문자 사용으로 학습 용이성 증대 –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 행정어 채택 – 다니엘서, 에스라서 등 구약성경 일부 – 예수 시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상어 – 실크로드 상업어로도 활용 4. 그리스어 시대 (기원전 330-기원후 600년경) 헬레니즘의 확산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기원전 336-323년) 이후 코이네 그리스어가 지중해 전역의 공용어로 확립 – 학문, 철학, 과학의 언어 – 신약성경의 원어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공식어 – 셀레우코스 제국의 행정어 5. 라틴어 시대 (기원전 1세기-기원후 600년경) 로마 제국의 유산 – 서부 지중해와 유럽 지역의 지배적 언어 – 법률, 행정, 군사 분야의 표준어 – 기독교 확산과 함께 교회 라틴어로 발전 동로마(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리스어가, 서로마에서는 라틴어가 각각 공용어 역할. 6. 아랍어 시대 (기원후 630년-현재) 이슬람 확산 – 이슬람 정복 이후 중동 전역으로 확산 – 쿠란의 언어로서 종교적 권위 확립 – 과학, 철학, 의학의 학술어 아바스 왕조 시대(750-1258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번역 운동을 통해 그리스 고전과 페르시아, 인도 문헌들이 아랍어로 번역. 7. 터키어와 페르시아어의 역할 – 오스만 터키어: 16-19세기 오스만 제국 시대 발칸반도에서 중동까지의 행정어 역할 – 페르시아어: 중세 시대 이란, 중앙아시아, 인도 무굴 제국의 문학과 궁정어 8. 근현대의 변화 – 유럽 언어들: 19-20세기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영어, 프랑스어 등이 새로운 국제어로 등장 현재 중동에서는 아랍어가 여전히 주요 공용어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영어가 국제적 소통의 언어로 기능. 9. 변화의 패턴 – 정치적 패권과 함께 언어 영향력 확장 – 종교적 권위를 통한 언어 지위 공고화 – 상업과 무역을 통한 실용적 확산 – 문자 체계의 편의성이 채택과 확산에 영향 – 문화적 우월성에 의한 자발적 수용 —- 중동 지역은 고대부터 제국과 문명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여러 언어가 시대별로 넓은 범위에서 공용어 역할을 했다. 가장 이른 사례인 수메르어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기원전 31세기경 등장한 고립어로, 특정 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원래는 수메르인들이 사용했지만 행정과 학문 언어로서 아카드어 등장 후에도 수세기 동안 기록 언어로 남았다. 아카드어는 셈어족 동셈어파에 속하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제국의 언어로 기원전 24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나톨리아 일부, 이란 서부까지 퍼졌다. 설형문자 체계를 통해 주변 언어에 영향을 주었고, 행정·외교의 표준어로 쓰였다. 아람어는 셈어족 서셈어파로, 원래 시리아 북부와 아람인들의 언어였으나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행정언어가 되며 범위가 급격히 확장됐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는 이집트에서 인더스 강 유역까지의 행정·상업 언어로 쓰였고, 문자체계와 어휘가 히브리어·아랍어 등에 큰 영향을 줬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어(특히 코이네 그리스어)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확장과 함께 소아시아,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심지어 인더스 강 유역까지 공용어로 퍼졌다. 그리스어는 인도유럽어족 헬레닉어파로, 철학·과학·행정 언어로서 라틴어와 아랍어를 거쳐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학문 용어를 남겼다. 로마 제국의 동방 확장 이후 라틴어는 지중해 전역과 서아시아 일부에서 행정·법률·군사 언어로 쓰였다. 인도유럽어족 이탈릭어파인 라틴어는 서방에서 로망스어군의 모태가 되었지만 중동에서는 주로 행정·군사 분야에 한정되었고,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리스어가 우위를 차지했다. 7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 확장과 함께 아랍어가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일부, 이베리아 반도까지 퍼졌다. 셈어족 남셈어파인 아랍어는 꾸란의 언어로 종교·법률·학문 분야에서 권위를 갖고, 페르시아어·터키어·스와힐리어 등 다수 언어에 어휘·문자·문체 영향을 남겼다.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파로, 아케메네스 왕조 이후 사산조, 사마니드, 티무르, 사파비 왕조를 거치며 이란,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부, 오스만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 행정·문학 언어로 쓰였다. 시와 산문 전통을 통해 인도·터키·아랍 문화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터키어는 튀르크어족 오구즈어파로, 셀주크와 오스만 제국 시기 아나톨리아, 발칸,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일부에서 행정·군사 언어로 자리 잡았다. 아랍어·페르시아어 어휘와 문어체를 흡수했으며, 제국 내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는 기능을 했다. 이렇게 중동의 공용어들은 제국의 흥망과 함께 범위와 위상이 변했지만, 서로의 어휘·문자·문체에 깊이 스며들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복합적 언어 지형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