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는 일본 열도 북부, 특히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 사할린 일대에 오랜 세월 살아온 토착민이다. 언어적으로도 일본어와 계통이 완전히 다르며, 유전적으로도 혼합 전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런 이유로 일본 주류 사회는 오랫동안 아이누의 존재를 회피하거나 집요하게 지우려 했다. 동화 정책과 제도적 차별, 문화 말살은 정체성 붕괴로 이어졌고, 지금은 아이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다.
홋카이도는 1869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홋카이도'라 이름 붙여지며 일본 영토로 편입돼 식민화됐고, 그 이전에는 아이누 인구 8만명의 에조(蝦夷)라 불리던 자치적 문화권이었다. 이 지역이 일본의 오래된 본토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이누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토착민이라는 점과 함께, 일본이 북방 영토에 대해 주장하는 역사적 정통성 논리와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꺼려지는 불편한 진실이다. 아이누가 현대 일본인과 공존해서는 곤란하고 옛 조상 중 하나 쯤으로 남아있어줘야 했다.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말살된 아이누 인구는 18세기 8만명에서 19세기 1.5만명으로 줄었다.
아이누어도 1869년부터 계속 금지됐다. 1997년에야 아이누어 금지 정책이 종료됐고 이 때는 이미 화자 수가 100명 이하로 떨어진 뒤였다. 뒤늦게 부흥운동, 진흥정책 등이 이야기 됐지만 지금은 아이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예 없다. 구직, 혼인을 위해서 아이누 출신임을 숨기는 사람이 많다.
여기에 러시아가 비슷한 시기에 북방에 진출해 사할린과 쿠릴을 두고 일본과 충돌했기에, 일본 입장에서 아이누가 여전히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홋카이도가 정통 일본 땅이 아니라는, 즉 일본 열도 본토를 구성하는 규슈·시코쿠·혼슈·오키나와·쓰시마·이키·사도가 포함된 전통적인 '오기칠도(五畿七道)' 체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약점으로 연결된다. 결국 아이누 정체성과 북방 영토의 짧은 일본역사는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일본은 이 둘을 동시에 부정하거나 은폐하는 쪽을 택해 왔다.
수렵채집 생활을 마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생산성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먹을 것을 스스로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힘은 시간과 에너지의 여유를 낳았고, 이 여유는 철학, 과학, 문자, 음악, 종교 같은 문명의 기초들을 가능하게 했다. 문화를 뜻하는 영어 단어 culture가 ‘경작하다’를 뜻하는 cultivate에서 유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명의 성장은 항상 먹을 것의 안정성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번영기를 맞은 것도 에게해 무역과 곡물 확보가 가능해진 덕분이고, 당나라의 전성기 역시 화북과 강남 지역의 이중 수확 체계와 대운하로 대표되는 물류 혁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삼국 말기나 고려 말기처럼 정치 혼란과 전란, 기근이 반복되던 시기에는 학문과 예술이 뿌리내릴 여유 자체가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보릿고개가 일상화되고, 기후 악화와 전란, 인구 폭증이 겹치면서 조선 전기와 같은 창조력은 더 이상 재현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도 국가나 왕조가 안정된 곡물 생산과 식량 자급 속에서 스스로 무너진 사례는 매우 드물다. 고려 말기나 조선 말기, 혹은 프랑스 구체제 말기, 명나라 말기처럼 우리가 ‘○○ 말기’라 부르는 시기는 대부분 내부적으로 이미 먹고 살기 어려워졌을 때다. 기후 악화와 전란, 세금 부담, 수탈, 행정 무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복되는 흉작이 민심을 무너뜨리고 반란과 개혁의 동력이 되었다. 국가 체제가 스스로를 유지할 만큼의 최소한의 생존 기반을 잃었을 때, 권위도 함께 붕괴되는 것이다. 반대로 평화와 식량, 기술과 제도가 조화를 이룰 경우 체제는 안정되고 문명은 꽃핀다. 창조는 배가 부른 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배가 부르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조건이다.
한국사에서도 그런 문명적 여유와 창조성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가 있다. 바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세종의 통치기다. 이 시기는 중세 조선의 황금기이자, 현재 대한민국 영토의 기틀이 확립된 시기다. 북방의 4군 6진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이 조선의 영역으로 정리되었고, 왜구와 여진의 위협도 상당 부분 제어되었다. 무엇보다 명나라와의 사대 우호 관계가 안정되면서 국방 문제의 상당 부분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국경이 안정되자 전쟁은 사라졌고, 평화는 곧 풍요로 이어졌다.
세종 시대는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풍요의 시대였다. 당시 조선은 전례 없이 넓은 경작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노동력이 집중되면서 쌀 생산량도 정점을 찍었다. 효율 높은 논농사가 이미 확산된 상태에서 경작지의 극대화가 이루어졌고, 밭농사 위주였던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유례없이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세종 말기까지 국가가 집계한 경작지는 조선 최대였으며, 이후 임진왜란으로 그 3분의 2를 잃고는 끝내 최대치를 회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시절 인구는 조선 말기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인구는 적고, 먹을 건 넘쳤다. 국가적 차원에서 시간과 에너지가 남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학문과 기술, 예술로 흘러들었다. 축적된 민중의 여가는 곧 당대 문명의 찬란함으로 드러난다. 굶주리는 백성들 속에서는 철학자, 예술가와 발명가들이 넘쳐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바로 세종 본인이고, 그가 만든 훈민정음이다. 당시 집현전은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싱크탱크였고, 이들이 세종과 함께 전례 없는 연구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한 합작이 아니었다. 집현전 학자들 다수가 강하게 반대했으며, 세종은 그들과 논쟁을 벌였고, 일부는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한글은 세종 개인의 주도와 고집, 그리고 비범한 천재성에서 탄생한 발명품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세종이라는 인물이 단지 위대한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창의력과 실력을 갖춘 천재였다는 점이다. 그런 인물이 역사에 등장했고, 그가 끝없는 전쟁이나 권력투쟁에 시간 허비할 필요없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풍요와 평화, 인재와 지식이 모두 준비된 시대였다는 점이 조선 전기의 진짜 위대함이다. 문자라는 것은 단지 말의 기록 수단이 아니라, 사고 체계 전체를 바꾸는 도구다. 백성 전체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조선 사회 전체의 지적 구조를 재편하는 혁명이었다.
네덜란드는 무역 열강 시기에 축적한 부를 지금까지 도시의 구조, 방대한 간척지, 치수 설비, 건축 양식 등으로 남겨두었기에 오늘날 방문객들도 그 영화를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은 세종 시대의 풍요와 창조력을 다른 방식으로 남겼다.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이라는,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만을 위해 발명된 문자다. 세종은 군주로서 권위나 업적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사고 방식을 바꾸는 도구를 만들었고, 그 덕에 한민족은 단순한 통치의 틀을 넘어서 문명적 구조 자체를 새롭게 획득하게 되었다. 그 어떤 물리적 유산보다도 깊고 넓은 자산이었다. 한민족은 세종 덕에 이때 업그레이드 됐다.
플로리다 주지사가 '불법이민자 수용소'라며 건물 주변에 해자를 파고 악어를 풀어놓은 수용소 시설을 매우 자랑스럽게 신나하며 공개해서 논란이 됐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이것도 그냥 예산 빼돌리용이었음이 발각. 건축과정에서, 또 운영에서 업자에게 엄청난 폭리. 아무걸로나 시간당 15만원씩 받아간 사람들이 수두룩.
수퍼맨의 탄생은 슬픈 현실에서 비롯됐다. 1932년, 제리 시걸의 아버지는 강도가 침입한 자신의 옷가게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총에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포와 충격 속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은 열네 살 아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시걸은 이듬해 친구 조 슈스터와 함께, 총알도 뚫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존재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무고한 사람을 지키는 절대적 존재, 수퍼맨의 원형이었다.
1938년, 두 사람은 수퍼맨의 판권을 내셔널 퍼블리케이션즈(현 DC 코믹스)에 단돈 130달러에 넘겼다. 수퍼맨은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떠올랐고, 만화와 전쟁 선전물, 영화, 장난감 등 다양한 형태로 전 세계에 퍼졌다. 하지만 정작 그를 만든 시걸과 슈스터는 저작권 없이 외면당했고, 평생 가난하게 살며 수십 년 동안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1970년대 수퍼맨 실사 영화 제작이 본격화되면서 창작자들의 이름이 다시 주목받았다. 여론이 들끓자 DC는 1975년 두 사람에게 평생 연금과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모든 수퍼맨 콘텐츠에 “Created by Jerry Siegel and Joe Shuster”라는 문구를 넣기로 약속했다. 창작 40년 만의 뒤늦은 인정이었다.
이런 일은 마블의 대표 작가 스탠 리에게도 반복됐다.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 수많은 마블 캐릭터 설정과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는 오랜 시간 편집자이자 작가, 홍보인으로 활동했지만 저작권은 갖지 못했다. 당시엔 창작자에게 저작권이 돌아가지 않는 계약 구조가 당연했기 때문이다. 마블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금전적 보상은 없었다. 스탠 리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가진 재산 대부분은 마블에 소송을 걸어 강제로 받아낸 돈이었다.
스탠 리 사후, 그의 유족은 2021년 디즈니를 상대로 저작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수십 년간 창작된 캐릭터들이 단순 고용 계약으로 탄생한 것인지, 아니면 원저작자에게 권리가 있는지를 두고 법적 판단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수퍼맨과 마블 캐릭터는 오늘날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이 됐지만, 그 뒤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창작자들의 그림자가 있다. 제리 시걸, 조 슈스터, 스탠 리의 사례는 한 사람의 상상력과 상처가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이디어의 진짜 가치를 누가 가져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반면, 잭 커비와 스티브 디트코의 경우는 조금 더 나은 결과로 이어졌다. 커비는 캡틴 아메리카, 판타스틱 4, 토르, 엑스맨, 블랙 팬서 등 마블의 핵심 캐릭터들을 공동 창작했고, 디트코는 스파이더맨과 닥터 스트레인지를 사실상 만들어낸 인물이다. 두 사람 역시 당시엔 고용 작가였기에 저작권은 없었고, 마블이 디즈니에 인수되며 더욱 소외됐다.
그러나 유족들은 미국 저작권법의 ‘권리 회복 청구권(termination rights)’을 근거로 저작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고, 각각 2014년과 2023년에 디즈니와 비공개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완전한 권리를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이후 마블 콘텐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명시되었고, 유족에게도 일정한 보상이 돌아갔다. 디즈니도 법정 논란보다 조용한 합의를 택하며, 창작자 예우 이미지를 지키는 전략을 선택한 셈이다. 스탠 리 유족의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커비와 디트코의 사례는 앞으로의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했던 초기에는 물론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기존 기득권층의 매국을 통해 군사적 침략 없이 쉽게 나라를 접수했다. 2025년 대한민국이 북한이나 일본을 적대적 합병하는데 전쟁 없이 외교와 첩보 작전, 그리고 현 지배층을 매수해서 해결했다고 상상해보자. 엄청난 위업이다. 우리가 피해자 입장이어서 그렇지 남의 일이었으면 연구하고 배워야 할 일이다. 아니, 어차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우리도 언제 누구와 분쟁이 있을지 모르고, 그때가 되면 비용과 생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무혈 승리를 추구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기존 지배계급을 매수해 조선을 접수하긴 했는데,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통치하려고 보니 그 지배계급은 이미 매국노로 찍혀서 통치에 문제가 너무 많은 거다. 일제는 다른 통치 방법, 새로운 현지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제는 충성도 높은 식민 협력자를 길러내기 위한 다양한 이벤트와 제도를 설계했다. 그 핵심은 세 가지 방향으로 압축된다: 상훈과 포상, 교육과 인재 등용, 제도화된 기회 제공이다.
첫째, 총독부 표창과 훈장 제도다. 항일운동을 탄압하거나 징세·징용에 적극 협력한 이들에게는 ‘훈장’과 ‘표창장’을 내리며 지역 유지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명확한 보상 체계였고, 조선인 사회에 "협조하면 출세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둘째, 보통학교와 사범학교, 일본 유학 제도를 활용한 친일 엘리트 육성이다. 초기에는 조선인에게 일본어 교육을 시키고, 일부에게는 사범학교나 도쿄 유학 기회를 주며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 중 충성도 높은 자는 교사나 면서기, 후에는 판사, 검사 등으로 등용되었다. 일종의 조선판 '정치 고시' 루트다.
셋째, 면장·이장 임명과 동리 구조 해체를 통한 기회 부여다. 면 체제를 통해 지역마다 면장을 임명하는데, 이 직은 일본이 직접 또는 지방 경찰 추천으로 선발했다. 과거 향약의 주도자였던 양반층 대신, 일제에 협조적인 인물들이 새로운 유지가 되었다. 특히 지주나 중소상인 중 일부가 면장을 맡으며 지역 권력을 장악했다.
이 밖에도 친일 단체 결성도 있었다. 1920년대에는 자작단, 1930년대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대화숙 등의 조직을 통해 친일 인사를 공개적으로 포섭하고, 강연이나 상을 주며 권위와 명분을 부여했다.
이 중에 특히 저 면 체제가 꽤 악랄하다. 기존 조선의 지방 체제는 동과 리로 나눠 향약 등을 통해 지역의 유지 등을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외세의 침입이 있어 의병이 일어날 때에도 바로 이 체계가 지도자부터 말단까지 그대로 의병조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시대가 시작될 때도 이런 조직을 통해 전국적인 항일 감정이 일었다.
일제 입장에서 이걸 해결해 준 게 바로 면 제도였다. 일제는 1914년부터 시작해 1917년에 본격적으로 일본의 면 제도를 가져다 동과 리 위에다 입혔다. 멀쩡하게 동으로 구성돼 있던 지역 사회를 면으로 새로 합치거나 갈라서 분열시키고, 새로 육성되는 친일파를 면장으로 임명해 지역 사회를 장악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총독이 지정하는 지정면/직할면으로 해서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는 일반면으로 나눠 충성하는 지역 유지들에게 다시 나눠주는 방법으로 일본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장악해나갔다.
저 때 면장에 임명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일본어를 배웠고, 일제에 협조적이고, 지역 내 항일 세력과 친분이 적은 사람들이었다. 전부 친일파였다고 볼 수는 없더라도 항일 인사가 아님을 인증받은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친일파를 키워내기 위한 일제의 세 가지 노력이 결집되며 태어난 새로운 부역자 계급이었다.
강선우 장관 지금도 안된다는 사람들은 대놓고 말은 안하지만 기준이 "성인군자가 아니니 안된다"인 것 같네. 급한 사정으로, 예외적으로 부탁한 일을 갑질로 보려면 굉장히 엄격한 눈으로 봐야 가능한데, 장관 뽑는데 그런 기준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냥 여성주의 장관을 얻지못할 바에야 이재명 대통령이 원하는 후보도 낙마시켜주겠다는 일부 정의당 부류 잔존세력이 있는 건 알겠는데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거 아닌가. 내 진심 그들을 같잖게 보고 하는 말이다. 어디 국힘 아류들이 다시 신분세탁을 하고 등장하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