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받는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DEI 정책을 보며 미국 안방극장에서 소수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을 생…

공격받는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DEI 정책을 보며 미국 안방극장에서 소수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을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다들 티비를 보는데 그 화면에서 표현될 수 있는 다양성이라면 미국인들이 그 시대 그 시점에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수준이었거나 혹은 살짝 앞서서 그 장면 때문에 문제가 되거나 했을테니. 미국 티비에서 백인 배우와 흑인 배우 사이에 첫키스는 68년 스타트렉에서 커크와 우후라의 키스였다. 그보다 앞서 62년에 다른 드라마에서도 있었다 하는데 덜 알려졌다. 내용상은 자연스럽게 키스가 필요한 장면이었지만 배우들의 피부색이 주는 의미가 뭔지 제작자나 방송사가 모를리 없었을테니 방송하는 날 방송사 임원들부터 제작진, 배우들까지 마음 조마조마 했을거다. 내가 미국 지상파 티비에서 본 첫 여성간의 키스는 95년 스타트렉 딥 스페이스 9에서 자지아 댁스와 리나라 칸 사이의 가슴아픈 사랑이야기였다. 슬퍼하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티비에서 이성간에도 잘 나오지 않을 수준의 키스가 나와서 놀랐다. 나중에 리부트 된 스타트렉에서 한국계 존 조가 연기하는 술루가 남편과 재회하는 장면이 들어가는데 그건 오리지널 시리즈의 술루 배우 조지 타케이가 게이라는 점에 대한 팬서비스 같은 거였고, 진짜 재미있는 관계는 역시 딥 스페이스 9에서 나온다. 딥 스페이스 9 우주정거장에 처음 부임한 의사 바시어가 옷가게를 하며 간첩질을 하고 있는 가락이라는 외계인을 감시하기 위해 접근하는 장면인데, 여러모로 웃긴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안절부절하며 인사하는 바시어와 달리 가락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친하게 지내자고 한다. 이게 그 장면의 다다. 다른 배경이 전혀 없이 그냥 그 내용으로 진행되는 장면인데 이 둘은 이 장면 때문에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커플이 된다. 드라마 상에서는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지만 팬들이 보기에는 젊고 예쁜 바시어가 어쩔줄 몰라하고 있고 연륜 있는(?) 가락이 그를 유혹하는 모습으로 비친거다. 드라마에서 이 둘 사이에 그 미묘한 긴장감은 나중에 각자 여자친구, 옛 연인 등이 등장하면서야 풀어진다. 이게 약간 그 드라마의 웃음포인트 중 하나다. 앞에 두 키스 장면이 스타트렉 팀이 야심만만하게 "자, 다들 준비 됐나? 우리가 대단한 거 시도한다!"하고 선보이는, 큰 상징적인 시도라면, 바시어와 가락은 동성애 코드를 자연스럽게 활용한, 훨씬 은근한, 일상적인 접근 방식이다. 굉장히 웃긴 건 물론이고 세련됐다고 생각했었는데, 가락 역을 했던 배우 앤드류 로빈슨(더티 해리에서 악당 역)의 인터뷰에서 그 비결을 들었다. 사실 제작진의 의도는 간첩과 정부 측 의사간의 단순한 눈치싸움이었다. 로빈슨은 스타트렉이 뭔지도 잘 모르고 그 두꺼운 외계인 분장도 처음이라 어떻게 연기해야할지 감이 안잡혀서 포기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한다. 간첩 역이긴 한데 이름 외에 모든 게 비밀인 캐릭터라 이걸 표현할 방법이 마땅치도 않았다. 연기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다가 바시어 역을 한 배우 알렉산더 시딕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배경 설명 전혀 없이 간첩 연기를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는데, 가락이라는 캐릭터가 왜 바시어에게 접근하는지는 충분히 그럴듯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 로빈슨은 시딕과 그 대화 장면 촬영 중에 앉아있는 시딕의 의자 뒤로 걸으며 한 손을 시딕의 어깨에 살포시 얹었다. 즉흥적 결정이었지만 로빈슨은 비밀로 가득차고 능글능글한 간첩역을 첫눈에 반한 사람처럼 연기했고 시딕은 바로 눈치채고 정부측의 의사이자 감시자 역을 원하지 않던 구애를 받는 사람처럼 연기했다. 팬들도 당연히 눈치채고 팬픽을 만들기 시작했다. 배우가 인물을 표현할 때 NPC 느낌이 나지 않으려면 대본에 없고 대사량이 별로 없어도 그 인물이 어디 출신이고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지금 이 상황에 이렇게 반응한다, 하는 자신만 숨은 의미, 서브텍스트를 만들어야하는데, 이게 그 최고의 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