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불교가 처음 마주친 시점은 서로가 이미 교리 체계를 갖춘 이후였다. 2~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인…

기독교와 불교가 처음 마주친 시점은 서로가 이미 교리 체계를 갖춘 이후였다. 2~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인 클레멘스는 인도의 사상과 부처의 가르침을 언급하며, 이를 철학적 지혜의 한 갈래로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여행담 차원이 아니라, 동방의 종교를 지중해 지성계가 인지하고 해석하려 한 초기 시도였다. 간다라 불상은 이집트와 로마 제국에서도 발견된다. 주로 로마 상인이나 군인, 인도-중앙아시아 출신 노예나 용병이 가져온 물건 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로마 제국과 인도 사이에는 인도-로마 해상 무역망이 활발히 작동했고,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 인도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루트는 상품뿐 아니라 사상과 인물의 이동로이기도 했다. 더 직접적인 접점은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동방교회(네스토리우스파)는 5세기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중앙아시아 깊숙이 진출했고, 불교 사원과 기독교 수도원이 같은 도시 안에서 공존하는 사례가 생겼다. 투르판, 메르브, 사마르칸트 같은 지역에서는 두 종교가 서로의 언어(소그드어, 시리아어,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를 매개로 경전 번역과 논쟁을 경험했다. 이런 환경은 단순 전파가 아니라, 용어 차용과 개념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어, 불교의 ‘보살’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시리아어 기독교 문헌이 ‘사도/거룩한 제자/apostle’ 개념을 덧씌우는 식의 교차 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불교의 열반(nirvāṇa) 개념은 시리아어로 옮길 때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완전한 평화’나 ‘영원한 안식’을 뜻하는 기독교 용어와 연결돼, 천국(Paradise)이나 안식일(Sabbath rest)과 비슷한 뉘앙스로 해석되었다. 다르마(dharma)는 ‘율법’이나 ‘하나님의 법’으로 대응되었고, 불교의 마하카루나(mahākaruṇā, 대자비)는 시리아어 기독교 문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raḥme) 개념과 합쳐져 설명되었다. 반대로 기독교의 구원(salvation)은 불교 번역에서 ‘해탈(mokṣa)’과 연결되었으며, 성령(Holy Spirit)은 불교권에서 ‘성스러운 기운’이나 ‘깨달음을 돕는 지혜’로 의역되기도 했다. 이런 번역은 양쪽 종교의 신학 체계를 유지한 채, 서로의 핵심 개념을 가장 근접한 자국 종교 용어로 설명하려는 시도였고, 그 과정에서 의미가 부분적으로 재구성되거나 변용되었다. —- 간다라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오늘날 파키스탄 북부·아프가니스탄 동부 일대에서 번성한 불교 미술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헬레니즘 문화가 깊이 스며든 곳이었고, 그 결과 불교는 인도 전통의 상징적·비인체적 표현에서 벗어나, 그리스-로마식 사실적 인체 묘사와 공간 구성을 흡수했다. 간다라 불상은 아폴론이나 제우스를 연상시키는 이상화된 얼굴 비례, 파상형 머리결, 깊게 패인 드레이퍼리 주름, 둥근 헤일로(광배)를 특징으로 한다. 이 조형어법은 초기 기독교 미술, 특히 비잔틴 성화나 모자이크의 성인상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요소다. 여기에는 ‘직접 영향’이라기보다, 헬레니즘 미술이라는 공통 모태를 두고 동·서 종교가 각자 차용한 ‘평행 진화’의 성격이 강하다. 이 지역 조각에서는 부처의 옆을 지키는 헤라클레스가 자주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간다라 지역은 불교 경전과 기독교 문헌이 같은 언어권(그리스어·소그드어·박트리아어)을 통해 전파되는 공간이었다. 그 결과, 종교 간 도상은 직접 접촉이 없더라도 ‘시각 언어’의 공통분모를 키웠다. 예를 들어, 간다라 불상의 니임부스 표현법은 로마 제국 후기의 황제 초상과 기독교 성인 도상 모두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 지역에서 동서양 역사와 문화의 혼합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 통치자이자 불교를 제국 전역에 퍼뜨린 아쇼카 대왕은 유명한 아쇼카 칙서를 내리는데, 각 지역의 현지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 아프가니스탄인 간다라 지역에는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칙서를 내렸다. 불교를 인도 전체로 확장시킨 대왕이 구약의 언어 아람어와 신약의 언어 그리스어로 칙서를 내렸다. 간다라 지역 박트리아 등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들이 세운 그리스계 왕국들은 일부 불교로 개종한 뒤였기 때문에 파란 눈을 하고 그리스어를 쓰며 불경을 외운 메난드로스 1세 같은 왕도 있었다. —- 관음보살과 성모 마리아의 도상적 유사성은 주제와 역할에서 비롯된다. 관음은 본래 남성 보살로 전승되다가, 중국 남북조당대 이후 자비와 구제를 상징하는 여성적 이미지로 점차 변모했다. 송명대에는 ‘백의관음’, ‘송자관음’ 같은 형태로, 흰 옷을 입고 아이를 안은 모습이 대중적으로 확립됐다. 이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모자 도상과 자연스럽게 겹치는 구조다. 16~17세기 예수회 선교가 중국에 도착하자, 가톨릭 미술은 중국 회화 기법과 불교·도교 상징을 적극 차용했다. 이 과정에서 성모자 이미지는 연꽃·구름·버들가지 같은 관음 도상 요소와 결합했다. 명·청대 화첩에는 ‘관음처럼 보이지만 십자가나 천사, 성경을 품은 여성상’이 나타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을 은폐하거나, 불교·기독교 양쪽 신도에게 모두 어필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일본에서는 금교령(1614년) 이후 기독교 신도들이 성모상을 관음상으로 위장한 ‘마리아 관음’을 제작·봉안했다. 외형은 백의관음이지만, 내부에 십자가·성서가 숨겨져 있었다. 이 경우에는 기독교 도상이 불교 외형을 차용한 셈이다. 두 종교의 도상 교류가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이었다. —- 발라암과 왕자 요사파트 ‘Barlaam and Josaphat’은 불교의 석가모니 전기가 기독교 성인전으로 재탄생한 사례다. 줄거리는 본질적으로 부처의 출가와 깨달음 이야기다. 인도에서 시작된 이 서사는 페르시아·아랍어로 번역되며 ‘Bilawhar wa Budhasaf’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서 ‘Budhasaf’는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보디사트바)의 변형이다. 이후 조지아어판 ‘Balavariani’를 거쳐, 11세기 아토스 산의 수도사 에우튀미오스가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그리스어판은 곧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확산됐고, 중세 유럽에서 널리 읽히는 성인전이 됐다. 발라암과 요사파트 성인전이 유행하자 가톨릭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 ‘요사파트(Josaphat)’를 공식 성인으로 시성했다. 이로써 석가모니는 가톨릭 성인이 됐다. 요사파트는 동방정교회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중세 유럽 신자들은 그가 불교 창시자인지 몰랐고, 회심과 은수 생활의 모범으로 이해했다. 현대 학계가 언어·문헌학적 분석을 통해 이 성인의 불교 기원을 밝혀내면서, 이는 종교 간 전승·변형·동화의 대표 사례로 자리 잡았다. 현대 카톨릭, 성공회 등은 전례력에서 요사파트를 뺐다. 신기하게 러시아 정교회를 포함한 동방정교회는 아직 요사파트를 성인으로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