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음악의 역사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보통 브롱크스의 흑인 아티스트와 거리 문화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비…

랩 음악의 역사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보통 브롱크스의 흑인 아티스트와 거리 문화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는 이 통념을 바꾼 그룹이었다. 단순히 백인 힙합 그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랩을 미국 주류 대중음악 무대에 끌어올린 ‘기록 제조기’였기 때문이다. 1986년 데뷔 앨범 Licensed to Ill은 역사상 최초로 플래티넘을 기록한 랩 앨범이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한 첫 힙합 앨범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런DMC 나 투팍이 아니라 비스티 보이즈가 최초 히트 랩 앨범이었다. 당시 랩이 ‘흑인 하위문화’로만 취급되던 분위기에서, 이들의 성공은 장르의 상업적 가능성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이 사람들이 랩 음악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냐 하면 비스티 보이즈가 등장하기 전인 1980년대 초·중반, 미국 랩 음악 시장은 연간 수천만 달러 규모에 불과했다. 메이저 레이블 입장에서 힙합은 틈새 장르였고, 전국적으로 크게 히트한 앨범도 손에 꼽았다. 그런데 Licensed to Ill은 1,000만 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단일 앨범이 당시 전체 랩 음반 시장 규모를 몇 배나 뛰어넘는 매출을 올렸다. 이후 메이저 레이블들은 랩에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고, 시장은 불과 몇 년 만에 5배 이상 커져 수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이들은 미국 TV에 출연한 첫 랩 그룹 중 하나였고, 방송에서 랩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일찌감치 나섰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LL Cool J를 발굴해 데뷔를 돕기도 했고, Run-D.M.C., Public Enemy, Cypress Hill 등과의 협업과 교류를 통해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985년, 마돈나의 ‘Like a Virgin’ 투어에 오프닝 게스트로 합류한 사건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당시 마돈나 공연은 미국 팝 시장의 절정 무대였고, 관객은 대부분 팝과 록을 즐기던 백인 10대·20대였다. 미국 주류 중에서도 주류 소비층이었다. 그 무대에 랩을 들고 등장한 세 명의 백인 청년은, 이전까지 랩을 TV나 특정 문화권에서만 접해보던 청중에게 “랩도 멋질 수 있다”는 첫인상을 남겼다. 유머와 반항심, 록 공연 같은 에너지로 무대를 장악하며, 랩을 ‘다른 문화의 음악’에서 ‘미국 청소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확장시킨 순간이었다. 백인 청소년들이 랩 앨범을 사고, 패션을 모방하고, 학교에서 라임을 흉내내기 시작한 출발점이 바로 이 투어였다. 비스티 보이즈의 무대는 단순한 히트곡 이상이었다. 라이브에서 라임을 주고받는 다중 보컬 방식, 재즈·펑크·하드록·클래식까지 가리지 않는 샘플링, 장르와 장르를 섞는 감각은 이후 힙합 듀오나 그룹들의 교본이 됐다. ‘얼터너티브 힙합’이라 불릴 새로운 흐름도 여기서 시작됐다. 상업적인 성공만 이룬 게 아니라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통해 힙합의 영역을 확장했다. 이들의 영향력은 후배 아티스트들의 증언에서도 선명하다. Eminem은 여러 차례 이들의 팬임을 밝혔고, 2018년 앨범 Kamikaze 커버는 Licensed to Ill을 그대로 오마주했다. Nas는 “MCA와 함께 작업한 것이 음악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 Kid Rock은 데뷔 앨범에서부터 비스티 보이즈의 스타일을 짙게 반영했고, 나중에는 헌정 무대에서 MCA 역할을 맡았다. Fucked Up의 Damian Abraham은 “랩에 빠진 건 Beastie Boys 덕분”이라고 했으며, Cool Kids는 스스로를 “Beastie Boys의 흑인 버전”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미국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 한국에서 랩과 록을 결합한 음악을 처음 대중적으로 성공시킨 서태지와 아이들 역시, 비스티 보이즈와 유사한 접근 방식을 보여줬다. 서태지는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에 생소하던 랩과 록, 댄스를 결합해 10대·20대 청중을 사로잡았는데, 이런 장르 혼합과 무대 에너지, 스타일링, 유머러스한 퍼포먼스는 비스티 보이즈가 1980년대 중후반에 이미 미국에서 개척한 영역과 맞닿아 있었다. 직접적인 표절이나 모방이 아니더라도, ‘랩은 특정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와, 록 밴드 출신이 랩을 흡수해 새로운 대중음악을 만드는 전략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스티 보이즈는 한국 초기 힙합·랩 기반 대중음악 형성에도 간접적이지만 뚜렷한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발표한 *Paul’s Boutique*는 평단에서 ‘힙합의 Sgt. Pepper’s’라 불리며 랩의 예술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후에도 랩·록·전자음악을 넘나드는 실험을 이어가며, “장르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후배들에게 남겼다. 결국 비스티 보이즈는 ‘백인 래퍼의 성공 사례’로만 정의할 수 없다. 최초의 플래티넘 랩 앨범, TV 출연, 마돈나 투어로 백인 청소년층의 랩 수용 확대, LL Cool J 발굴, Eminem과 Nas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들의 음악적 증언,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다른 나라 아티스트에게까지 전해진 장르 혼합과 대중화 전략. 이 모든 업적이 합쳐져, 비스티 보이즈는 랩 음악의 흐름을 바꾸고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그룹으로 남게 됐다. 가장 인기있는 랩 그룹일 뿐 아니라 초기 그룹들 중 아직까지 활동중인 거의 유일한 랩 그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