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0도는 물이 얼기도 하고 녹기도 하는 특별한 온도다. 얼음이 0도에서 녹기 시작하고, 물도 0도에서 얼…

섭씨 0도는 물이 얼기도 하고 녹기도 하는 특별한 온도다. 얼음이 0도에서 녹기 시작하고, 물도 0도에서 얼기 시작한다. 1도였던 물을 0도로 낮추면 얼고, -1도였던 얼음을 0도로 높이면 녹는다. 그럼 0도에서 물은 액체인가 고체인가? 사실 같은 0도에서도 어떤 물은 액체 상태이고, 어떤 것은 얼음일 수 있으며, 두 상태가 섞여 있는 경우도 흔하다. 이 현상의 과학적 이유는 온도가 평균값이기 때문이다. 물 분자 하나하나는 서로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전체 분자의 평균 운동 에너지가 0도일 뿐이다. 이 분포를 볼츠만 분포라고 한다. 온도는 분자들이 가진 에너지의 평균을 나타내는 거시적 개념이고, 실제로는 각 분자의 에너지는 제각각이다. 컵 전체의 온도는 정확히 0도일 수 있어도, 그 안의 분자들은 어떤 것은 더 빠르게 움직이고, 어떤 것은 거의 정지에 가깝게 움직인다. 에너지가 충분한 분자들은 액체 상태로 남고, 에너지가 부족한 분자들이 많아지면 고체 상태가 유지되기 쉬워진다. 그러니 평균 온도는 같아도 상태는 섞여 있을 수 있다. 또한 상태 변화에는 단순한 온도 변화뿐 아니라 에너지 흐름이 중요하다. 에너지가 외부에서 들어오면 얼음은 물로 바뀌고,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물이 얼게 된다. 따라서 0도에서의 상태는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에너지 흐름에 따라 바뀌는 중간 지점'이다. 예를 들어, 외부 환경이 정확히 0도로 유지되는 냉장 공간 안에 한 컵의 증류수가 놓여 있다고 해보자. 컵 안에는 얼음과 물이 반반 섞여 있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열도 나가는 열도 없는 상태라면 이 비율은 오랜 시간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얼음이 녹는 속도와 물이 어는 속도가 같아져서 평형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열역학적으로 닫힌 계에서 전체의 통계적 에너지 분포가 안정되면 상평형(phase equilibrium)이 이루어지며 얼음과 물이 공존하게 된다. 이처럼 0도는 단순한 '변화의 순간'이 아니라 두 상태가 공존하며 안정될 수 있는 지점이다. 게다가 0도에서는 국지적으로 일부가 갑자기 얼거나 녹는 일도 가능하다. 에너지 교환이 미시적으로는 무작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컵 전체의 평균 온도는 0도지만, 미세한 열 이동이나 밀도 변화로 특정 부위에서만 상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겉보기에 외부 요인이 없어도 이런 변화는 충분히 발생하며, 이는 분자 간 충돌과 확률적 에너지 분포로 설명된다. 즉, 0도라는 평균 온도 아래에서도 물질 내부에서는 계속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현실에서는 정확히 0도에서 물과 얼음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완전히 액체나 완전히 고체로 유지하는 쪽이 더 어렵다. 예를 들어 같은 냉동고 안에 같은 순도의 물을 한 컵은 얼음으로, 한 컵은 액체로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때는 정확히 0도보다 오히려 약간 더 낮은 온도가 오히려 유리하다. 얼음은 더 낮은 온도에서 얼린 뒤 0도 근처로 올리면 고체 상태로 안정되게 유지되고, 액체는 –10도 가까이 내려간 상태에서도 진동 없이 불순물 없이 완전히 정제된 환경이라면 과냉각(supercooled)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 조건만 맞으면 하나는 얼음, 하나는 물인 같은 순도의 두 컵이 같은 -1도의 냉동고 안에서 나란히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