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토(神道)는 일본 전국에서 고르게 퍼져 있으며 지역별 편차가 거의 없다. 사이비라고도 불리는 신흥 종교들은…
신토(神道)는 일본 전국에서 고르게 퍼져 있으며 지역별 편차가 거의 없다. 사이비라고도 불리는 신흥 종교들은 조직적으로는 활발하지만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다. 일본에서 지역별로 분포가 뚜렷하게 나뉘는 것은 불교 종파들이다. 일본에서 가장 세력이 큰 불교 종파는 단연 정토진종(浄土真宗, じょうどしんしゅう)이다. 신란(親鸞)이 1224년에 (가마쿠라 중기) 창시한 이 종파는 전국에 약 4,800만 명의 자칭 신도를 보유하며, 불교계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특히 홋카이도(北海道), 호쿠리쿠(北陸), 긴키(近畿) 지역에 강세를 보이고, 오타니파(大谷派)와 혼간지파(本願寺派)로 양분되어 있다. 신란은 정토종(浄土宗, じょうどしゅう) 승려 호넨(法然)의 제자였고, 스스로 환속하여 결혼한 재가 불자로서 살아가며 염불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설파했다. 이 재가 중심의 불교는 일본의 장례문화와 결합해 강력한 대중 기반을 형성했다. 한국 불교에는 없는 절대 타력 의존적 신앙이며, 결혼한 승려가 일반화된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정토진종의 모체인 정토종은 호넨이 1175년에 (헤이안 말기) 창시했다. 신도 수는 약 600만 명이며 전국적으로 퍼져 있으나 정토진종만큼 지역적 집중도는 크지 않다. 호넨은 천태종(天台宗, てんだいしゅう) 출신으로,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송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는 기존 수행 중심 불교에 대한 파격적 대안이었다. 정토진종과 달리 출가한 승려는 결혼하지 않는다. 한국 불교는 염불을 수행 일부로 보지만, 정토계열처럼 그것만으로 구원을 단정하지 않는다. 니치렌계(日蓮系)는 신도 수만 보면 약 1,000만 명 이상으로 정토종보다 많다. 1253년에 (가마쿠라 중기) 일련종을 창시한 니치렌(日蓮, にちれん)은 평민 출신으로, 천태종에서 출가해 법화경(法華経) 이외 모든 경전을 배척하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経)’만을 염송하도록 했다. 주요 기반은 도쿄(東京)와 가나가와(神奈川)를 포함한 간토(関東) 지역에 있으며, 신도 수는 많지만 정통 불교 교단 체계 내에서의 교세나 사찰 수로 보면 정토계보다 약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계열에서 현대에 들어 창가학회(創価学会, そうかがっかい) 같은 신흥 세력이 출현했고, 전후 일본 정치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자민당 정권의 공동정부 파트너 공명당(公明党)이 창가학회의 정당이다. 특히 창가학회는 오키나와(沖縄)에서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교리적으로는 가장 배타적이며, 정치성과 대중 동원력이 강하다. 한국 불교와 달리 강한 교조성과 선민의식을 갖는 점이 뚜렷하게 이질적이다. 조동종(曹洞宗, そうとうしゅう)은 도겐(道元)이 1227년 (가마쿠라 초기) 중국 조동선에서 배워온 좌선 중심의 선종이다. 신도 수는 약 530만 명이지만, 사찰 수는 일본에서 가장 많다. 도호쿠(東北) 지방과 지방 소도시에 널리 분포한다. 특징은 오직 좌선만을 수행으로 삼는 ‘지관타좌(只管打坐)’ 전통이며, 공안이나 언어적 개입 없이 조용한 참선을 중시한다. 한국 조계종과는 선 수행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한국은 임제종 기반이라 공안이 핵심인 반면 조동종은 수행 방식이 훨씬 단순하고 묵묵하다. 임제종(臨済宗, りんざいしゅう)은 에이사이(栄西)가 1191년에 (가마쿠라 초기) 중국에서 들여온 선종으로, 조동종보다 언어적 방편과 공안 수행에 무게를 둔다. 신도 수는 약 450만 명으로 조동종과 유사하며, 전국적으로 퍼져 있으나 수도권보다는 간사이(関西) 이남에서 흔하다. 좌선과 선문답이 균형을 이루며, 선 수행과 무도, 다도 문화와의 연결이 깊다. 한국 조계종과 가장 유사한 계열이지만, 일본에서는 정토계열에 밀려 대중성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진언종(真言宗, しんごんしゅう)은 밀교 계통으로, 구카이(空海)가 816년 (헤이안 초기) 당나라에서 밀교를 배워 돌아와 일본식 밀교로 정착시켰다. 신도 수는 약 550만 명이며, 고야산(高野山)을 중심으로 긴키와 시코쿠(四国) 지역에서 강세다. 주술과 진언, 만다라, 불화, 불상, 호마(火供) 등의 화려한 의식 중심 전통은 한국 불교에선 거의 사라진 요소들이다. 특히 국가 제사와 결합한 경향이 강하며, 실용적인 치병과 복을 비는 목적도 뚜렷하다. 천태종은 사이초(最澄)가 806년에 (헤이안 초기) 창시했으며, 신도 수는 약 280만 명으로 비교적 적지만 교리적 기반은 깊다. 후쿠시마(福島)나 이바라키(茨城) 등 간토 북부와 도호쿠 일부 지역에 영향력이 있다. 원융불교를 지향하며, 선·염불·계율·밀교를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정토종과 니치렌종의 창시자 모두 천태종 출신일 정도로 많은 종파의 원류가 된다. 한국 천태종과 교리적으로 유사하지만, 일본에서는 전통 지식 중심 종단에 가까우며 대중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한국 불교에 비하면 수행보다 염불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정토진종 외에는 모두 출가 승려의 독신을 강조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 정책에 의해 모든 승려의 결혼이 가능해졌고 실제로 승려 가문에 의해 사찰이 대를 이어 자녀들을 통해 교육/승계/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신불분리 정책은 불교의 종교로서의 위엄을 줄이고 신토로 그 중심을 옮기려는 시도였다. 원래 천태종과 진언종이 아마테라스를 비로자나불(大日如来)로 간주하며 교리에 포함시키고 신불습합을 추구했다. 나머지 교파들은 거의 거부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 불교와 신토가 많이 융합돼 신사에 불상이 있고 특히 천태종/진언종 사찰에 아마테라스가 있는 경우가 흔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토를 천황 중심의 국가 종교로 밀며 거의 완전히 분리됐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