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외교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식민지 개척 시절 제국들이 100년 단위로 전략을 세우며 경쟁하던 장대…

역사·정치·외교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식민지 개척 시절 제국들이 100년 단위로 전략을 세우며 경쟁하던 장대함과 기개에는 경외심을 느낀다. 한때 식민지였던 한국 출신으로서 친일 잔재를 아직도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 식민 수탈의 상흔은 끔찍하지만, 세월의 간극만큼은 분노 대신 담담히 과거를 돌아볼 수 있기에, 그 시대 제국의 영광을 ‘타인의 시선’으로 존중한다.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 스페인-포르투갈의 세계 양분, 프랑스-영국의 해양 패권…. 내가 지금도 프랑스 외교를 주시하는 이유도 프랑스가 여전히 ‘세계 경영’ 시도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스페인 등이 저물자 왕관을 쥔 미국은 한때 소련과, 지금은 중국·러시아와 패권을 다툰다. 감탄보다는 탄식이 앞서도 그 전략은 눈부시다. 에너지 강국이자 북극 항로 개방으로 부활 조짐이던 러시아를 미군 전사자 없이 사실상 눌러앉혔다. 군사·경제·인구 피해를 감안하면 러시아는 최소 10년 후퇴했다. 원래 불가능해 보였다. 러시아는 최첨단 핵탄두를 미국보다 많이 보유한 핵강국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크라이나라는 해법을 찾아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명치’다. 모스크바 바로 아래 자리해 서부 러시아의 인구·경제력에 직결된다. 프리고진 반란에서 보였듯, 우크라이나에 적이 주둔하면 모스크바 방어는 포기해야 하고 그 순간 러시아는 무너진다. 수도가 전장이 되니까. 소련 서기장 다섯을 배출할 만큼 핵심 지역이었던 탓에 지도자들은 인접 영토를 고향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붙여줬다. 소련 해체와 우크라이나 독립은 러시아에 영구적 안보 리스크를 남겼다. 완충지대였던 구소련 공화국들을 미국이 나토로 흡수해 버리자 마지막 요충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터졌다. 1라운드는 미국의 승리. 지금 2라운드는 트럼프를 얻은 러시아가 손실을 만회하려고 총공격중이다. 불변의 패자는 젤렌스키와 그를 뽑은 불운한 국민들이다. 핵강국 러시아까지 무력화했는데 미국이 멈출까? 트럼프 2기라면 단언하기 어렵지만, 미국은 중국이 현 추세로 성장해 자국을 추월하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미국은 마라톤을 뛰다가도 상대가 쫓아오면 칼을 꺼내 찌르는 선수다. 85년에 일본에게 했던 것처럼, 반도체 규제·관세는 중국을 주저 앉히려는 선제타다. 군사옵션도 준비돼 있고, 명분은 늘 ‘중국의 대만 침공’이다. 중국에게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곳은 대만이다. 미국이 중국을 대만 공격으로 몰아갈 방법은 불행히도 존재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나토 가입’이 러시아를 자극한 금기어였다면, 중국-대만 구도의 대응 단어는 ‘대만 독립’ 선언이다. 2000년 민진당 첫 정권교체 때도 이 한마디가 최대 뇌관이었다. 중국은 대만이 독립하면 즉시 초토화하겠다고 공언했고, 선거에서 민진당이 유력해질 때마다 미사일 도발로 압박했다. 민주주의 열망을 짓누르는 대신 국민에게 약속했던 번영이 미국 등의 견제로 주춤해졌고, 연임 제도도 어기고 장기 집권하는 시진핑은 대만 독립 같은 이벤트를 견뎌낼 만큼 권력이 공고한 상황은 아니다. 중국 공산당도 그걸 허용하고 계속 본토에서 권력유지하기는 힘들다. 중국의 유일한 외교철칙 세계에 중국은 하나 뿐 世界上只有一个中国 원칙이 깨졌는데.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식 차도살인을 재현하려면 1단계는 독립파 부추기기다. ‘대만 독립’ 네 글자가 레드라인이다. ―――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지식인들이다. 이 분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러·친우크라이나로 몰입했듯, 대만 독립 이슈가 가시화되면 또다시 "대만은 독립국가로서 스스로 결정 내릴 권리가 있다"며 반중·친대만으로 이번엔 대만인들의 피를 희생양으로 바치며 미국 국익에 충실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미국·젤렌스키 모두 가해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왜 생각 못하는 걸까. 혹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중 고르면 우크라이나밖에 없다’는 단순 구도를 왜 이렇게 의심 없이 수용하는 걸까. 우크라이나가 독립국가니까 나토 가입하건 말건 자유로워야한다며 젤린스키를 응원한 분들, 다시 생각하기 바란다. 옵션이 있다고 저지르는 게 최선이 아니라 대만처럼 일찌감치 독립 선언하고 산화해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고 번영을 선택하는 게 정답이라는 말이다. 이제라도 스스로에게 물을 때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생존을 응원했나, 폭군 러시아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하게 된 꼴을 보여주는 젤렌스키를 응원했던 건가. 언젠가 우리가 다음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북한을 눌러놓을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미국이 북한을 이용해 중국에 2차 공격을 할 수도 있고, 우리와 북한이 그 꼴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