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의 독일인들

런던 항구에 내린 거대한 사내는 잠시 멈춰 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Your Majesty!”라 외치며 머리를 숙이는데, 그는 시선만 굴렸다. 통역이 옆에서 부지런히 속삭였지만 영어는 여전히 낯설고, 런던의 흙냄새도, 군중의 분위기도 어색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자,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였다. 황제 아래 선제후 7명 중 하나로 서열을 다투던 독일 귀족이 이제 영국의 왕 조지 1세로 불린다는 사실은, 당사자에게도 실감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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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714년 앤 여왕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후사가 모두 요절하면서 왕위 계승 규칙이 문제로 떠올랐다. 가톨릭은 무조건 제외한다는 법 때문에 가까운 친척 대부분이 탈락했고, 계보를 수 단계 거슬러 올라가 계산해보니 조건을 충족하는 가장 가까운 혈통이 신성로마제국 하노버 가문이었다. 당시 하노버 Hanover는 작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선제후령이었고, 선제후(選帝侯 Prince-Elector Kurfürst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 Georg Ludwig는 이미 독일 정치의 핵심 축이었다. 영국은 결국 제국의 강력한 귀족을 왕으로 스카우트하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왕관을 썼다고 바로 영국 왕답게 변신한 건 아니다. 영국 이민(?) 당시 54세였던 조지 1세와 31세였던 아들 조지 2세는 궁정 언어로 독일어를 유지했고, 영국 의회 연설도 통역에 의존했다. 영국 귀족들은 그들을 왕으로 모시면서도 문화적 거리감을 오래 느꼈다. 조지 3세에 이르러서야 조금 ‘영국 왕 답다’는 평가가 붙었지만, 그 역시 독일어는 유창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엔 독일적 색채가 절정에 이른다. 어머니가 독일인, 남편 앨버트도 작센 코부르크 고타 Sachsen-Coburg und Gotha출신. 부부 사이의 대화는 언제나 독일어였고, 오늘날 영국의 상징처럼 보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풍습도 이 시기 독일에서 직수입된 문화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계 왕가들을 중심으로 방대한 혼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유럽 거의 모든 현대 왕실을 잇는 중심축이 됐다. 아홉 자녀와 수많은 손주들을 결혼을 통해 유럽 왕실 곳곳으로 보냈다. 훗날 1차대전 때 다양한 유럽 국가들이 참전했지만 사실 사촌들간의 싸움이었다. 영국의 조지 5세는 빅토리아의 손자, 독일 빌헬름2세는 외손자, 러시아 니콜라이 2세는 손녀 사위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다.

독일 하노버는 그래서 영국 국왕의 땅이었으나 빅토리아 여왕 즉위 당시 하노버에서는 여성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지 않아 빅토리아 여왕의 삼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통치를 시작하고 갈라졌다. 30년 뒤 독일 통일 과정에서 흡수되고 사라진다.

2차대전 때 나찌 전범들 중 찰스 에드워드/칼 에두아르트가 당시 국왕 조지 5세의 사촌이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자였다. 영국에서 태어났고 영국 왕자였으나 가문의 명령으로 10살 나이에 독일로 보내져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히틀러의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전후 전범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공은 영국 해군 장교로 참전했지만 어머니가 독일인이고 그의 누나 4명은 모두 독일 귀족과 결혼했기 때문에 매형들도 나찌 당원이거나 군부와 연결돼 있었다.

필립 공의 사연도 파란만장하다. 덴마크 국왕의 둘째 왕자였던 아버지가 새로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실에 스카우트 돼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가 됐으나 덴마크 왕위 계승권과 칭호를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근데 필립 공이 그리스에서 태어나고 1년 만에 쿠데타가 일어나 그리스 왕족들이 마구 처형 당했다. 독일 헤센 대공국의 바텐베르크 가문 출신이지만 동시에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로 영국 왕실의 직계 혈통인 어머니 앨리스 공주가 친정 영국 왕실에 구조를 요청해 영국이 군함을 파견해 구출해왔다. 그래서 필립 공은 프랑스, 독일, 영국을 떠도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그리스와 덴마크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정교회에서 영국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결혼했다.

영국 왕실 성씨 또한 1917년까지 작센 코부르크 고타 Saxe-Coburg and Gotha라는 독일식 이름을 썼으나 1차대전이 터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이 독일과 싸우는 와중에 왕실 성이 독일식이라는 사실은 말 그대로 폭탄이었다. 국왕 조지 5세는 성을 작센 코부르크 고타에서 윈저 Windsor로 바꿨다. 하지만 그 역시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공식 석상에서는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엘리자베스 2세는 독일어를 잘 이해했지만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았다. 아들인 현 국왕 찰스 3세는 아버지 필립 공의 영향으로 독일어 구사가 능숙하다. 정상회담에서 독일어권 지도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장면이 해외 언론에서 여러 차례 포착됐다.

필립 공 쪽의 모계 친족들인 영국에 살던 독일의 귀족 가문 바텐베르크 Battenberg 씨들도 성을 마운트배튼 Mountbatten으로 바꿨다. 지금 왕실 멤버들은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을 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윈저였으나 필립 공이 자녀들에게 마운트배튼 성을 고집해서 합의를 봤다 한다. 왕위 승계를 포기하고 나온 해리 왕자도 공식 이름이 Henry Charles Albert David Mountbatten-Windsor다. 아버지가 왕세자였고 영국에서 왕세자는 일반적으로 웨일스 공이라 학교 다닐 때는 Harry Wales 라는 이름도 썼고 독립한 뒤에는 결혼할 때 받은 작위인 서섹스 공작에서 따온 Sussex 라는 성도 쓴다. … 그냥 자기 멋대로 아무 이름이나 쓰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