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송도 국제지구의 아파트 단지는 가을 바람에 물든 은행나무와 단풍으로 가득했다. 넓은 보행로 옆에는…
1.
송도 국제지구의 아파트 단지는 가을 바람에 물든 은행나무와 단풍으로 가득했다. 넓은 보행로 옆에는 현대식 조경이 반듯하게 이어졌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뛰놀고, 카페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날은 평범한 산책이 아니었다. 바람이 갑자기 차갑게 바뀌고, 발밑의 지반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송도의 초고층 빌딩들이 빛을 반사하며 흔들리더니, 순간 하늘에서 낮과 밤이 동시에 겹쳐 보였다. 태양은 여전히 떠 있었지만, 달빛 같은 은빛 광채가 건물 사이로 스며들었다.
산책하던 발걸음이 멈추었고, 나는 그저 숨을 죽인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파트 단지의 바닥에서 울림이 올라왔다. 잔디밭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분수대 물줄기는 하늘로 솟아올라 거대한 무지개로 변했다. 멀리 송도의 바다, 갯벌이 있던 자리는 갑자기 붉게 일렁이며 갈라졌다. 마치 바다가 스스로 벽을 세우듯 갈라져 물길이 끊어졌다.
땅은 갈라지지 않았다. 대신 발밑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와, 내가 딛는 길마다 부드럽게 빛났다. 송도의 바다는 말라버리는 대신 더 맑아져서, 깊은 바닥까지 훤히 보였다. 아이들은 물속을 들여다보며 환호했고, 어른들마저 두려움보다 경이로움에 휩싸였다.
2.
벽이 투명해지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높은 담이나 벽은 의미가 없었다. 사람과 사람을 가르던 모든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파괴라기보다 껍질이 벗겨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외벽은 부서지는데 그 속에서는 낯선 형태의 새로운 건축물 같은 형체가 자라나고 있었다. 금속도, 유리도 아닌, 나무와 돌과 빛이 섞인 듯한 물질이었다.
산책로 양옆의 가로수들도 눈앞에서 변화했다. 낙엽은 사라지고, 몇 초 만에 가지들이 연둣빛 새싹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으나 동시에 새로운 기운에 휘말렸다. 개벽의 순간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 변화는 무섭기도 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평온을 함께 담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빚을 갚고 새 출발을 맞는 듯한, 묘한 안도감이 사람들의 심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3.
놀이터에 있던 아이들은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른들은 스마트폰을 쥔 채 기록하려 했지만, 화면은 빛에 잠겨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신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 직접 새겨지듯 장면이 각인되었다.
어떤 이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어떤 이는 눈빛이 빛나며 환하게 바뀌었다. 마치 사람들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에 따라 겉모습이 변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로를 두려움이나 의심으로 보던 시선이 사라지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벗을 대하듯 따뜻해졌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중요한 것은, 그 표정이 모두 진실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스마트폰과 기계들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눈빛과 마음만으로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인천대교 쪽 하늘은 갈라져 거대한 빛기둥이 솟아 있었고, 그 빛은 단순한 광선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 속을 꿰뚫는 파동이었다. 그 빛이 내 몸을 스치자, 오래된 기억과 짐들이 무너졌다. 두려움, 후회, 억눌린 욕망이 벗겨지고, 오직 투명한 의식만 남았다.
하늘에서 또렷한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언어가 아니라, 각자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侍天主, 시천주”, 하늘님을 모신다는 선언이었다. 그 순간 사람들은 깨달았다. 하늘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이 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은 동시에 가슴을 붙잡았다. 그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솟구쳐 나와 온몸을 감쌌다. 어린아이도, 노인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같은 빛을 품었다. 차별은 의미를 잃고,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엄으로 서 있었다.
4.
송도의 도시는 여전히 존재했으나, 그 본질이 바뀌었다. 아파트 단지는 빽빽한 콘크리트 숲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 공간이 되었다. 건물은 빛을 품은 나무처럼 변화했고, 길은 강처럼 흘러 서로를 이어주었다.
사람들은 경쟁이나 소유 대신, 서로의 삶을 북돋우는 데 몰두했다. 말없이도 통했고, 억지로 누르지 않아도 모두가 스스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는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라, 실제로 눈앞에서 이루어진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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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개벽(後天開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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