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소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연간 목표를 5년 단위로 통합한 장기 산업화 구상을…

1926년 소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연간 목표를 5년 단위로 통합한 장기 산업화 구상을 공개적으로 제안했지만 정치적 주도권을 쥔 인물은 요세프 스탈린이었다. 1928년 중앙의 정치적 결단으로 채택된 첫 공식 5개년 계획은 스탈린의 동원력 아래 수치화·집행되었고, 그 결과 짧은 기간에 중공업과 군수산업의 급성장을 만들어냈다. 소련은 1928년 첫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해체되는 1991년까지 공식적으로 총 13차례의 5개년 계획을 운용했다. 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산업생산은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하고 중공업 능력은 오히려 확대됐다. 연속적 5개년 계획은 중공업·군수산업 중심의 구조를 유지시켰고, 국가예산과 계획표는 산업설비·인력·원재료를 꾸준히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소련은 철강·중기계·전력·철도 등 기초산업에서 빠른 확장을 이뤘고, 군사·우주 분야에서도 스푸트니크 인공위성(1957)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성과와 함께 한계도 분명했다. 농업은 전쟁 피해와 집단화의 후유증으로 생산성 회복이 더뎠고, 소비재·주택·서비스 분야는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공산주의 체제는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시하기 어려워 생산구조의 효율화 대신 농민들을 대거 산업현장에 투입하는 조방적 성장에 의존했다. 이는 농업 약화와 산업 성장 둔화를 동시에 초래했고, 1970년대 이후 체제의 구조적 정체로 이어졌다. —- 일본은 만주에서 1936년경부터 소련식 5개년 계획을 변형·채택해 두 번 실행에 옮겼다. 일본의 자본·행정·군사 동원과 결합된 만주국의 계획은 짧은 기간 안에 중공업·광업·철도 인프라를 확장해 대륙침략과 전시경제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기시 노부스케 같은 관료들이 주도한 이 실험은 전후 일본의 산업정책과 통산성 모델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5년에 일본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57년에 기시 노부스케 본인이 총리로 취임해 만주국 경험 관료들을 요직에 배치하지만 일본이 사회주의로 가는 것을 경계한 미국 경제고문단의 "계획경제보다는 경제예측과 조정"으로 가라는 강한 충고에 일본의 계획은 정부가 목표와 전망만 제시하고 정책으로 유도하되 민간기업에게 나머지를 맡기는 자유주의적 외피를 유지했다. 사실 이게 한국의 "민간 주도, 정부 지원" 방식의 이론적 롤모델이었으나 현실에서 김대중 정부 이전의 한국 정부에서는 일본 모델보다 직접적 개입과 통제가 훨씬 많았다. 인도는 1951년 첫 계획 이후 2017년 NITI Aayog 체제 전환까지 총 12차례의 5개년 계획을 운용했다. 네루 총리가 주도한 초기 계획들은 소련 모델과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중공업과 공공부문을 강조했다. 이들 계획은 농업·인프라·교육·중공업 기반을 확충하는 데 기여했으나, 허가제(License Raj)의 관료주의적 비효율과 1991년 경제자유화 이후의 시장경제 전환 과정에서 그 역할이 축소됐다. 파키스탄 역시 1950-60년대에 5개년 계획을 도입했으나 정치 불안과 자원 제약으로 성과가 제한적이었다. 북한, 베트남, 쿠바와 동유럽 국가들(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도 5개년 계획을 도입했으나, 효과는 각 지도부의 집행 효율성과 외부환경에 따라 편차가 컸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은 1989년 체제전환 이후 시장경제로 급속히 이행했다. 중국은 신중국 수립 이후 1953년 첫 5개년 계획을 도입했고, 현재 14차(2021-2025)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1958-1962년 대약진운동은 계획경제의 극단적 왜곡이 초래한 참극이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이 운동은 2차 5개년 계획을 대체하며 '15년 내 영국 추월'이라는 비현실적 목표를 내걸었다. 뒷마당 용광로 같은 비과학적 정책과 농업 집단화의 급진적 추진, 지방 간부들의 생산량 허위보고가 겹치며 대기근이 발생했고, 학자들은 1,500만에서 4,5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계획경제가 정치적 광기와 결합할 때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되었다. 문화대혁명(1966-1976) 기간에도 정치적 혼란으로 3차, 4차 5개년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5개년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경제와 결합시킨 '사회주의 시장경제' 모델로 발전시켰다. 이 방식은 산업기반 확충과 기술·제조 역량 축적에 유리하게 작동해 30년 이상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했다. 최근 계획들은 '중국제조 2025', 반도체 자립, 탄소중립 등 첨단제조·자립형 공급망·그린전환을 우선순위로 삼고 있어, 대약진의 실패를 딛고 5개년 계획을 가장 지속적이고 적응적으로 운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이념적 이유와 연방제 구조 때문에(그리고 아마도 자존심 때문에) 5개년 계획이라는 이름의 정책을 시도해본 적은 없으나, 실제 정책에서는 정부주도 계획경제 실험을 많이 해봤다. 1933년 국가산업부흥법 NIRA로 산업별 생산량과 가격, 임금을 중앙정부가 조정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를 통해 7개 주에 걸쳐 전력, 홍수통제, 농업개발을 위한 지역 개발을 성공적으로 시도했다. 연방정부가 대규모 경제 개입을 통해 여러 주에서 사업하는 공기업 전력회사를 만들고 지금도 소유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전례없던 시도였다. 그리고 2차대전 후 유럽 재건 시기에는 유럽 우방국들에게 (자존심 상 5개년은 안되고) 4개년 복구계획 제출을 요구했다. —- 대한민국은 1962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첫 번째 공식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후 1차(1962-66), 2차(1967-71), 3차(1972-76), 4차(1977-81), 5차(1982-86), 6차(1987-91), 7차(1992-96)까지 이어졌고, IMF 외환위기 이후 명칭과 성격이 변화했다. 첫 두 계획기(1962-1971)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8-10%대에 달했고 제조업 비중과 수출이 급증했다. 국가가 수출지향 산업을 우선 지정하고 정책금융·국영은행·차관을 통해 대기업을 집중 지원한 결과, 단기간에 산업기반이 구축되고 외환수입이 증가해 경제구조가 급속히 변화했다. 경제기획원이라는 슈퍼 부처가 계획수립과 예산편성, 외자도입을 총괄하며 강력한 조정력을 발휘했다. 한국의 성공은 소련·중국 초기 모델과 명확한 차별점이 있었다. 첫째, 중국 후기 모델처럼 수출시장 성과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 외향적 전략을 택했다. 둘째, 국영기업이 아닌 민간 재벌을 국가 지도 아래 경쟁적 수출기업으로 육성했다. 셋째, 수출실적에 따른 선별적 지원과 제재를 결합해 시장 규율을 부과했다. 넷째, 미국의 안보 우산과 시장 접근이라는 냉전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이러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모델은 일본과 대만의 경험과 함께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전형으로 연구되고 있다. 속도는 빨랐지만 재벌 집중, 노동억압, 지역불균형 등의 구조적 문제를 남겼고,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국가주도 계획경제 시대는 사실상 종료됐고 노무현 대통령은 다양한 의미에서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다. —- 5개년 계획은 20세기 후발 산업화 국가들이 선택한 대표적 catch-up 전략이었다. 냉전기 체제 경쟁 속에서 사회주의권뿐 아니라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이 모델을 변형·채택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의 농업 파탄, 중국의 대약진 참극처럼 엄청난 인명 희생을 초래한 실패도 있었고, 한국·대만처럼 권위주의 정치와 결합되었지만 경제적 도약을 이룬 사례도 있었다. 성과는 여전히 운용 주체의 역량에 달렸다. 21세기 현재 대부분 국가들이 이 방식을 포기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이를 국가 전략의 핵심 도구로 활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