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유령이다. 별가루로 만들어진 뼈대를 고기로 감싼 육체를 운전하며 광활한 우주 속을 돌진하는 바위 위에…
당신은 유령이다. 별가루로 만들어진 뼈대를 고기로 감싼 육체를 운전하며 광활한 우주 속을 돌진하는 바위 위에 올라타 있는 유령이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은 유령이다. 별가루로 만들어진 뼈대를 고기로 감싼 육체를 운전하며 광활한 우주 속을 돌진하는 바위 위에 올라타 있는 유령이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Jake Deschain added a new photo.


Cassius Marcellus Clay was born in 1810, the son of the wealthiest plantation owner in Kentucky. Upon inheriting his estate, he immediately freed all his slaves and even gave them a portion of his property. By his twenties, he had already served three terms in the Kentucky House of Representatives. But because of his outspoken opposition to slavery, he found it increasingly difficult to win elections in the deeply pro-slavery state. Instead of running again, he began traveling the country, delivering passionate speeches against slavery. He famously ended these speeches by placing a Bible on the podium and saying, “To those who follow God's law, I offer this book as the answer to slavery.” Then he would place a copy of the U.S. Constitution next to it and say, “To those who follow man’s law, I offer this book.” Finally, he would draw two pistols and lay them on the podium, declaring, “To those who follow neither, I offer this.” In effect, he was openly provoking slaveholders wherever he went. As expected, duel challenges followed. He accepted them all—and won. He killed several pro-slavery opponents. Clay’s favorite weapon was the Bowie knife, a heavy combat blade. He survived multiple assassination attempts; not only did he live through gunfire, he often retaliated immediately, killing his attackers with the knife. This violent readiness remained a part of him until he died of natural causes at age 92. But his life was not just defined by violence. A close friend of Abraham Lincoln, Clay was once considered for the vice presidency. However, due to his controversial and bloody reputation, Lincoln instead appointed him U.S. Minister to Russia. While serving in St. Petersburg, the American Civil War broke out. Though frustrated that he couldn’t fight in the war himself, Clay played a critical role in diplomacy: he helped secure the Russian Empire’s strong public support for the Union cause. Russia, at the time one of the few major powers backing the North, sent fleets to American ports as a show of force, implicitly warning Britain and France—who were considering recognizing the Confederacy—that any intervention would risk a broader war. Clay’s diplomatic efforts were instrumental in maintaining this alignment, which significantly weakened the South’s chances of gaining international legitimacy. Later, he also helped pave the way for the U.S. purchase of Alaska from Russia. In 1861, as the Civil War began, Lincoln wanted to bring Clay back from Russia and offered him a major general’s commission. But Clay refused, saying he would not serve unless all Southern slaves were freed. This stance helped pressure Lincoln into issuing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much earlier than originally planned. These were the brightest moments of Clay’s life—he had achieved his lifelong mission of abolition. The next four decades, however, were marked by erratic behavior and conflict. Still a troublemaker, but now without a cause, he became more of a public nuisance than a hero. He died in 1903 at the age of 92. His cousin, Henry Clay, had been one of the most prominent American politicians of his time and a leading presidential contender. The enslaved people owned by Henry Clay took on the surname “Clay.” One of their descendants, Herman Heaton Clay, named his son (born in 1912) Cassius Marcellus Clay and later his grandson (born in 1942) Cassius Marcellus Clay Jr. in honor of the great abolitionist. That grandson would go on to become one of the most iconic athletes in history: after converting to Islam, he changed his name to Muhammad Ali and became the heavyweight boxing champion of the world.


사실 이거 한국인끼리는 잘 안 할 독설인데, 인요한이라 그냥 그려려니 하고 다들 넘어감. 그래서 준석이 많이 아픔. Inch로 주고 feet로 받았음. (2023년 11월 26일 발언)


생각해보면 스마트폰 이전 인터넷은 웹사이트 위주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거의 모든 가게와 회사들이 홈페이지를 운영했다. 개인 블로그들이 넘쳤고 각종 쇼핑몰들이 활약했다. 수많은 개인과 소상공인들이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각자의 개성과 정보, 상품을 공유했다. 그래서 그땐 인터넷 사용의 중심이 검색엔진과 포털이었다. 구글과 네이버의 시대였다. 모바일 웹 이후, 지금은 대부분의 웹 활동이 몇몇 거대 플랫폼 속으로 흡수됐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아마존 등이 기존에 분산돼 있던 수많은 웹사이트들을 대체했다. 소통과 소비는 어마어마하게 늘었는데 그 흐름의 통로는 좁아졌다. 예전에 컴퓨터를 켜고 접속해 일정시간 사용하고 끄는 게 인터넷이었다면 이제 항상 손안에 있고 항상 켜져있어서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태다. 그렇게 일상화가 되다보니 편의가 더 중요해졌고 자연스럽게 모든 상업행위와 놀이는 인터넷에 접속해 검색해서 해결하기 보다 해당 앱을 켜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플랫폼의 시대다. IT 업계의 큰 매출 흐름이 문지기 구글에서 플랫폼 사업자 페북, 아마존 등으로 나눠진다. 이제 다시 ChatGPT 등장으로 인터넷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구글 등 기존 사업자 트래픽이 급속도로 줄고 딱 그만큼 ChatGPT 등의 트래픽이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인터넷 사용의 통로가 여러 플랫폼에서 생성형 AI로 다시 좁아지고 있다. 이렇게 접근 방식이 단순화되고 중앙집중화된다고 해서 전체적인 정보 교환량이나 지식 생산량이 줄어들까? 모바일 웹의 경우를 보면 그 반대다.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AI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증가가 이뤄진다. 인터페이스는 좁아지지만 정보의 양과 작업의 속도는 계속 증가한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면, 이제 AI가 몇 초 만에 정제된 결과를 제공해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하지 못했던 일, 예를 들어 코드 작성, 번역, 기획서 정리, 데이터 분석 등을 AI를 통해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 일자리를 뺏는 노동의 외주화라는 우려가 있지만 사실상 우리 인지 능력의 확장이다. 우려할 부분도 물론 있다. 모바일 웹으로 전환하면서 정보의 흐름을 몇몇 플랫폼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플랫폼의 권력화도 이뤄졌고 다양성과 우연성이 줄어들었으며 사람들이 필터된 정보만 소비해 SNS 풍선 속에 갖히게 됐었다. 모바일 웹 이전에는 누가 찾든 안 찾든 다양한 주제에 대한 웹사이트들이 있었고 더 중요한 건 사용자 개인에 특화된 큐레이션이 적었던 시절이라 우리 눈에 들어오는 웹사이트들이 정말 다양했다. 우리 취향에 맞는 것만 보여주는 페북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구글을 통해 접했기 때문에. AI 시대에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이제 다양한 플랫폼이 아닌 단일 AI 모델에 더 많은 사용자들이 집중되며 정보의 다양성이 줄어들 수 있다. 머스크의 Grok AI가 보여주듯 AI가 사업자의 성향을 반영하는 문제도 있다. 더 핵심적인건 정보 소스와 사용자 간의 연결이 끊어진다는 점이다. 예전엔 내가 만든 HTML를 구글이 인덱스 해뒀다가 당신이 검색하면 내 웹사이트가 있는 서버로 연결해줬고 지금은 페이스북에 내가 쓴 글을 페북 알고리듬이 당신 화면에 뿌려준다면, AI는 대부분의 경우 검색이나 원본에 접속 없이 "생성"해서 뿌려준다. 인터넷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 생산자와 소비자간 직접 연결이 끊어진다. 이게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정보생산자들이 고립되니 전체적 정보량의 위축이 올지, 원본에 의존하지 않으니 금본위 졸업 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제규모처럼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량이 100이라도 AI는 200, 400을 생성해 줄 수 있으므로 더 폭발적으로 성장할지. 사실 AI가 더 이상 우리가 생산하는 정보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소통하고 계속 웃긴 사진 공유하고 영화관람 후기를 적을 거다. AI의 도움으로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쉽고 빠르게. 인터넷 상거래가 아마존 등이 직접 파는 물건들도 있지만 개인 사업자들이 아마존에 올리는 물건들이 대부분인데, AI 시대에는 아마존 등이 개인 사업자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페북이나 아마존이나 플랫폼 사업의 핵심은 수많은 생산자/판매자와 소비자들이 사용하며 수수료를 낸다는 거고, 그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플랫폼 사업자가 특별한 비용없이 활용한다는 건데, AI 시대에는 그 수많은 판매자들의 노동력이 AI에 의해 대체되며 개인 점포들이 가져가던 수익까지 쿠팡이 갖는 사업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시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인터넷은 살아있다. 계속해서 진화한다. 그러나 다수에서 소수로 집중되며 양적 팽창하는 경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수 생산자가 모든 결실을 가져가던 구도에서 다수 생산자의 결실을 소수 사업자가 가져가는 구도로, 이제 정보 생산의 큰 부분도 사업자가 가져가는 구도로 바뀌고 있다. 우리 모두 그 흐름에 쓸려 떠내려가는 입장이지만 이게 어디서 온 홍수 물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다. 인터넷을 쓸 것인가, 사용될 것인가.


포장을 바꿔도 내용물이 같아



지가 아무리 다른 척 해봤자 덜 늙은 윤석열이지 뭘




미국에서는 아이디어만 나왔지만 중국에서는 이미 무인 트럭 현장에 투입 시작.


홍준표는 하와이에서 돌아오고 싶을까. 홍준표의 옵션은 대충, 1. 아무 것도 안 하기: 이재명 당선되고 명태균 특검 시작되면 난리난다. 2. 김문수 선거운동: 어차피 김문수 당선도 안되고 아무 얻는 게 없다. 명태균 특검 못 막는다. 3. 이재명 캠프 쪽으로 옮기기: 그나마 처벌을 피해볼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 일단 탈당도 했고 국힘을 거하게 비판하고 있는 건 이재명 캠프를 향한 구원 요청이다. 근데 이재명 캠프에서 과연 그런 부담을 얻어가며 홍준표를 원할 것인가… 아무리 중도보수 기치를 들었다지만 홍준표는 지금까지 자기 정치만 해왔지 데려올 의석도, 파벌도, 지역도 없다. 일단 대선 후까지는 하와이에 머물며 소환도 좀 미뤄보고 관망을…

해외에서 한국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걸 보니 애초에 민희진 편들기 외에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었구만. 저러다 유승준 되기 딱 좋은데.
얘네가 한심하긴 한데, 온라인에서 하도 반으로 쪼개져 편들어줘서 저 상황까지 간거라고 본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는 민희진을 언론과 특히 입진보들이 개저씨에 맞서는 전사 취급해주며 띄워주는 거에 얘들도 혹해서 끝까지 가도 된다고 판단했을 거다. 어린 여자 대 나이 많고 뚱뚱한 부자 남자 구도에서 밀릴리가 없다고 봤다.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관심과 호응이 사라질 줄은 몰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