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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처리

필요한 만큼의 문해력과 통찰력을 갖추는데에는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후에도 다양한 타인, 유명인의 의견에 영향 받을 수 밖에 없다. 예전같으면 작가, 기자, 정치인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유튜버들이다.

보통 이런 저런 유튜브 방송을 듣다가 공감가는 내용을 발견하고 그 채널의 다른 의견을 접하며 영향받게 된다. “이 사람의 분별력이면 세상을 파악하는 적절한 시각이다”라고 결정하고 그 사람의 나머지 견해는 비교적 비판없이 수용하게 된다. 그게 유시민이면 다행이지만 2천공일 경우 대통령이 돼버리는 수가 생긴다.

“잠깐, 그동안 즐겨듣던 인물이지만 과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 확인해보면 크게 도움되는 부분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착각, 오판을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자신의 과거 오판과 실수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찾아보면 그 사람의 진짜 실력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실수를 인정하고, 어느 부분이 문제였는지 분석하고 그 뒤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아무리봐도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면 슬슬 다른 멘토들을 찾아보는 게 좋다. 완벽할 사람일 가능성이 0.1%면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추는 사람일 가능성이 99.9%다.

피지 GR 은혜로교회

피지에 갈일이 생기면 현지에만 있는 브랜드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성공적으로 현지 경제를 장악한 브랜드가 GR이다. 공항 근처 상가에 붙은 트루마트 간판, 난디 시내의 스노우하우스, 수바 길목의 그레이트웍, 외딴 주유소의 모빌 간판 옆에도 GR 로고가 들어가 있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다른 브랜드들이지만, 줄기를 따라가 보면 모두 하나의 그룹으로 이어진다. Grace Road. 한국에서 은혜로교회로 알려졌던 바로 그 집단이다.

단순히 사업을 크게 한 정도가 아니다. OCCRP 자료와 피지 정부 문서를 보면, GR은 피지에 10년 동안 9개 법인을 세웠고, 신도 339명의 자금 2,253만 피지달러에 국가 개발금융 대출까지 끌어모아 농업·유통·외식·건설·주유소로 사업을 퍼뜨렸다. 약 400헥타르 농장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자신들의 마트로 공급하고, 주유소부터 카페까지 한 섹터를 ‘수직 통합’한 기업처럼 움직인다. 남부 도로축을 달리다 보면, 피지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상당 부분이 GR 손을 거친다는 사실이 체감될 정도다. 실제 피지 경제를 20-30% 장악하진 못했지만 노출 정도로는 피지의 삼성같은 존재다.

이 압도적인 확장의 동력은 정상적 기업 운영이 아니었다. 신도 300여 명이 여권을 빼앗긴 채 임금 없이 일했고, 이 인건비 0원 구조가 현지 자영업자와 기업들을 시장에서 밀어냈다. 현지에서는 “정부가 허가를 너무 쉽게 내줬다”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로 바이니라마라마 정권 시기 GR 계열사는 총리·대통령 관저 리모델링 같은 국가 핵심 시설 공사를 도맡았고, 정부 고위직들까지 개점식에 참석해 이 그룹을 치켜세웠다.

교주 신옥주는 한국에서 징역 7년이 확정돼 복역 중이지만, 피지의 GR은 오히려 더 체계화됐다. 중심에는 신옥주의 아들 다니엘 김(김정용)이 있다. 그는 피지 법인 9곳의 단일 이사로 등재된 사실상 대표로,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이면서도 피지 현지에서 보석 상태로 버티며 소송전을 이어가고 있다. 피지 새 정부가 이들을 사이비로 규정하며 추방을 시도했지만, GR은 막강한 현금력으로 로펌을 고용해 법적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뭔가 새로운 시도인 것 같지만 통일교 모델이다. 그냥 작은 나라에 가서 크게 했다. 영상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매우 한국적이다. 너무 사무치게 한국적이다.

영웅본색

제작사에서 계속 퇴짜맞다 스스로 제작사를 차린 서극과 갱스터영화를 만들고 싶었으나 B급 코미디만 맡던 오우삼을 살린 1986년작 [영웅본색]

미국 핵심 인프라를 움직이는 낡은 시스템들

겉으로는 최신 앱과 클라우드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의 핵심 산업과 공공 인프라는 몇십 년 전 기술 위에 올라가 있다. 놀라운 점은, 이 시스템들이 단순히 “남아 있다”가 아니라 “여전히 가장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세상을 움직이는 낡은 시스템들이다.

가장 유명한 예인 COBOL은 1959년 미국 국방부 프로젝트로 만들어졌다. 금융권의 계정계 시스템은 지금도 이 언어가 심장부를 차지한다. 미국 은행의 예금·대출·이체 기록은 하루에 수십억 건이 처리되는데, 그 안정성을 새로 만드는 건 리스크가 훨씬 크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은행권에서도 같은 이유로 COBOL 메인프레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의료계는 MUMPS(M 이라고도 불린다)라는 더 독특한 언어를 품고 있다. 196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병원 행정을 위해 만든 언어인데, 미국 병원 시장을 지배하는 Epic 같은 시스템이 지금까지도 M을 코어에 두고 있다. 의료 데이터는 즉시성·동시성·안정성이 핵심이라 새로운 언어로 갈아타는 시도가 번번이 미뤄졌다. 이스라엘, 유럽 일부 병원들도 Epic 도입과 함께 이 체계를 유지한다.

정부와 군사 분야에는 Ada가 있다. 1970~80년대 미국 국방부가 항공전자·미사일 제어를 위해 만들어낸 언어로, 방위 산업에서 지금도 핵심 안전 시스템은 Ada 기반으로 돌아간다. 비슷한 계열의 유럽 항공 산업(에어버스 등)도 Ada 코드가 여전히 유지된다.

항공 예약 시스템에는 TPF(Transaction Processing Facility)가 있다. IBM이 1960년대 항공권 예약을 위해 만든 체계인데, Amadeus나 Sabre 같은 글로벌 예약 네트워크가 아직도 이 구조를 버리지 못한다. 초당 수십만 건의 트랜잭션을 처리하기 위해 오랜 기간 최적화된 구조라서 대체 기술이 나오기 어렵다.

통신 분야의 Erlang은 1980년대 초 스웨덴의 에릭슨이 전화국 스위칭을 위해 개발했다. 미국 통신사들도 대규모 메시징과 실시간 서비스에 지금도 이 언어를 사용한다. WhatsApp 같은 현대 서비스도 초기에 Erlang 기반으로 움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조업과 공장 자동화는 더 오래된 방식을 쓴다. PLC에서 사용하는 Ladder Logic은 1970년대 전기 공학 기반 도식 언어다. 산업용 장비를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과 멈춤 시간이 너무 커서, 미국·유럽 공장 대부분은 지금도 이 방식으로 생산 라인을 돌린다.

대형 유통과 물류 시스템에는 AS/400과 RPG가 있다. IBM이 1988년에 내놓은 플랫폼인데, 미국 소매·물류 회사들이 재고·주문·결제 시스템을 이 코드에 얹어둔 채로 30년 넘게 돌린다. 일본·독일도 AS/400 비중이 높은 편이다.

기상청, 기후 연구소, 해양 모델링은 FORTRAN이 지배한다. 1950년대에 개발된 언어지만, 대규모 수치 해석에서 여전히 가장 빠르다. 미국 NOAA, NASA, 유럽 기상센터(ECMWF)까지 모두 핵심 모델을 FORTRAN으로 유지하고 있다. 코드를 전부 새 언어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과 리스크가 너무 크다.

결국 낡은 시스템들은 단순히 관성의 산물이 아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안정성, 대체 불가능한 성능, 교체 과정의 위험이 서로 얽히면서, 오늘날의 금융·의료·군사·항공·통신·제조·기상 인프라를 여전히 떠받치고 있다. AI 등 최신 기술이 화려한 겉모습을 만드는 동안, 세상의 기초 구조는 여전히 1970년대의 논리와 1960년대의 언어가 책임지고 있다.